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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5 | [문화저널]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불상, 태안 마애불상을 중심으로
문화저널(2004-01-29 13:38:18)
불교미술은 한국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화가 많이 남아있어 삼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불교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삼국은 각기 불교를 기초로 문화를 발전시켰고 불교라는 종교가 가지는 속성에 의하여 공통성을 지니게 된 반면 각국이 가진 문화적 역량과 환경에 의하여 나름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삼국의 문화에 대하여 '고구려의 생동감과 패기, 백제의 우아한 인간미가 돋보이는 부드러움, 그리고 신라의 고졸한 멋과 더불어 섬세함과 세련미‘라는 평가가 있다. 이 평가는 어떤 면에서는 각국의 문화를 충분히 드러내기에 미흡한 점도 있으나 삼국의 문화에 대한 독창성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은 각기 그들이 점하고 있는 공간에 대하여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감정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점한 공간, 즉 자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미술을 통하여 표현되고 그 표현의 기회는 당시 각국의 고급 이념체계로서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불교사원을 통하여 주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불교미술에는 불교에 귀의하는 당시 사람들의 신앙심과 더불어 그들이 살아 숨쉰 공간, 더불어 살아갔던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의식이 담겨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같은 관점에서 백제의 미소로 일컬어지는 서산마애석불과 그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태안 마애석불을 먼저 개관하고 이를 중심으로 이들이 가지는 백제 불교미술에서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같은 불교미술을 낳게 만든 백제문화의 특성을 간단히 드러내고자한다. 1. 서산 마애석불 서해바다를 접하여 중국쪽으로 돌출된 곳에서 오랜 기간을 세상과는 유리된 채로 풀덤불에 파묻혀 있던 이 불상은 1960년에 그 미소와 더불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용현리에 있는 백화산에는 '인바위'로 불리는 천연절벽이 있으며 불상은 바로 이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중앙에 여래상이 있고 그 좌우에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중앙의 여래상 높이가 2.8m에 달하며 본 불로서의 당당한 모 습을 갖추고 있으며 몸체의 뒤에는 연화 무늬가 새겨져있는 보주형의 두광이 있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본존상은 각이 죽은 네모진 얼굴에 두 눈은 크며 코는 크고 넓으며 양끝이 살짝 올라간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머금어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올려 시무 외인(施無畏印 : 중생에게 위험과 해를 주지 않고 두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손의 형상)을, 왼손은 아래로 내려뜨리고 손바닥을 펼침으로서 여원인(與願印 ;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는 손의 형상)을 결하고 있다. 이같은 손의 형상은 삼국시대 불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어려움에 있는 중생들을 감싸안으려는 모습의 불상을 제작함으로써 그 같은 불상에 안기고자 하는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진 것으로 생각된다. 옷은 두 어깨를 감싸며 길게 내려와 발 위에까지 닿았으며 치마부분은 허리띠의 매듭으로 구분을 하고 허리 아래고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로 갈라져 다리를 감싸고 있는데 다리부분에는 동심원의 옷주름을 새겨 놓았다. 또한 발 밑에는 연꽃이 장식되어있을 뿐이나 이 불상이 연화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존불의 좌우에 본존을 모시는 보살상중 오른 쪽에는 서 있는 보살이 있고 왼쪽에는 반가상이 있어 일반적인 삼존상과는 다른 구도를 보이고 있다.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아래로 긴사각형의 얼굴에 두 눈은 은행알 만큼 뜨고 있으며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전체적으로 근엄한 인상을 보이는데 이는 본존과 같은 분위기다. 옷은 양 어깨로부터 하체에 이르기까지 U자형 주름을 얇게 새기고 있다. 머리에는 역시 광배를 원으로 돌려 갖추었고 발 밑에는 연화를 조각하여 연화좌를 마련하였다. 본존 왼편에 위치한 반가상은 이 '서산마애삼존석불'의 특색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특이한 예로서 관심을 끌뿐만 아니라 백제의 반가상으로 이렇게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점이 더욱 귀중하다. 이 반가상 역시 광배가 있으며 발밑에는 연화좌가 표현되어 있다. 머리에 쓴 보관은 꽃으로 장식되었고 높은 편이며, 얼굴은 아래로 긴사각형의 모를 죽여 둥근 형태를보이며 입가에는 어설픈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의자에 앉아서 오른발은 뻗어서 연화좌대를 디디고 있으며 왼발은 오른발의 무릎위로 올려놓은 반가상을 하고있으며 무릎위에 올려진 발에 기대어 한손을 굽혀서 턱을 보이고 다른 손은 뻗어내려 반가한 발목을 잡고 있다. 상반신은 드러낸 상태로 표현되고 아래로는 옷무늬가 새겨져 앉아있는 의자를 감싸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두 협시보살은 양식상 서로 다른 구도를 보이지만 그 제작 기법은 같으며 크기도 1.7m 내외 높이로 거의 비슷하다. 이 불상은 왼쪽에 있는 불상이 반가상을 하고 있으며 손으로 턱을 고이고 있는 점에서 소위 반가사유상으로 미륵불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오른 쪽의 보살은 관세음 보살이며 본존은 그에 따라 석가여래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같은 삼존상의 구성은 그 당시 민중들에 의하여 신앙되던 대표적인 여래 와 보살을 골라 한데 모신 것으로 생각된다. 2. 태안 마애석불 서산 마애불이 있는 백화산의 다른 쪽 산자락 행정구역상 서산군 태안읍에 또 하나의 삼존상이 있다. 이 삼존상은 백화산의 정상 바로 밑에 자리한 태안읍에 자리하고 있는데 서산마애불과 비슷한 시기인 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불상은 서해바다를 면하고 주변 경관이 좋은 곳에 동쪽을 향해 서 있는 큰 바위에 가득히 세 구의 불상을 새겨 두었는데 그 배치방법이 이채롭다. 즉 왼쪽과 오른쪽에 커다란 여래상이 서있고 그 사이에 작은 보살입상이 끼여 있다. 왼쪽의 여래상과 오른쪽의 여래상의 높이는 각각 2.07m와 2.09m로 거의 비슷한 크기이며 중앙에 있는 보살상은 1.3m이다. 이들 또한 당대의 믿음에 따라 이러한 배치를 하고 있으며, 이를 새긴 것으로 짐작되는데 불상의 이름은 각각 석가여래, 관음보살, 약사여래라고 전해진다. 양식을 살펴보면 두 여래상은 거의 비슷한데, 머리엔 작은 육계가 있고 미소를 띤 얼굴은 조금 긴 편이다. 옷의 문양과 손모양은 거의 같으며 다만 오른쪽여래상의 왼손에 둥근 합을 들고있는 것만 다를 뿐 넓은 어깨와 함께 당당한 풍채를 보이는 점은 같다. 두 여래상의 가운데 있는 보살상은 높은 관을 쓰고 '서산마애삼존불상'의 보살입상과 같이 가슴 부분에서 두 손으로 둥근보주를 감싸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백제에서 주로 유행하였던 양식으로 생각되는데 부여 신라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이나 근래정림사지에서 발견된 불상편에서도 같은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태안마애삼존불'의 발 밑을 발굴한 결과 '서산마애삼존불'의 경우와 같은 양식의 연꽃 무늬의 대좌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발견된 연대가 오랜 기와와 주춧돌로 미루어볼 때 원래는 이들 삼존불상 위에 나무로 된 방과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불상 자체를 보호하는 동시에 신도들이 예배하고 공양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이같은 진실 구조는 이후 경주 석굴암이나 중원 미륵리와 같은 석굴사원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3. 삼국시대 불상의 보편적 양식 우리나라 불상의 초기양식은 불교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에 분명하듯 중국의 불상양식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지녔던 문화전통을 기반으로 자주적 역량을 발휘하여 외래불상의 답습이 아니라 우리 나름의 조형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삼국에서 만들어진 불상의 예를 살펴보면 삼국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초기불상양식이 있다. 즉 여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의 삼대 양식이 주로 제작되었다. 여래상은 양식에 따라 앉은 자세로 된 불상(佛像)과 서 있는 자세로 된 불상(立像)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와 달리 혼자 있는 불상과 그 좌우에 다른 불상이나 협시보살이 있는 불상으로 나눌 수 있다. 삼존상의 경우 여래상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보살상이 각기 놓이는 것이 보편 적이며 이 경우 여래는 앉거나 서있는 자세이며 보살은 서있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 여래와 구분되어 단독으로 등장하는 보살상은 대부분 입상이다. 다만 반가사유보살상은 크게는 보살상에 속하지만 그 앉은 자세의 독특한 형식으로 해서 따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다. 한 다리를 무릎 위에 얹고 앉아서 한쪽으로 턱을 괸채 깊은 사유에 잠긴 모습을 하고 있는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로 추정되고 있는데, 6~7세기에 걸쳐 삼국 모두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상양식의 하나이다. 반가사유상은 본디 불상이 앉아있을 때 취하는 결가부좌에서 한쪽 다리(보통 왼쪽 다리)를 풀어 늘어뜨린 자세 인 반가상과 왼손으로 가부좌를 풀지 않은 발목(보통 오른발)을 잡고 오른팔은 팔꿈치를 오른편 무릎에 고인 손을 들어 약간 앞으로 숙인 얼굴의 볼을 받치고 있는 사유상의 결합된 형태이다. 이 같은 자세의 불상은 미륵보살이 도솔천 용화수 아래에서 앞으로 자신이 여래가 되어 중생을 제도할 일을 생각하는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같은 자세는 본디 석가여래가 성불하기 전에 인간의 괴로움 을 구제하고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나 중국으로 전래되어 미륵보살이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4. 백제의 불상 불상의 전래와 더불어 이 땅에 꽃피기 시작한 삼국의 불상들이 그 양식에 있어서 닳은 점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내용 면에서도 동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불상이 만들어지는 이유가 다르고 그것을 제작하는 당사자들이 갖는 사회적, 정치적 여건과 그에 대한 적응방식이 또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늘상 그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백제 옛 땅의 불상은 그 나름의 특징을 지니며 이는 백제 문화의 속성과도 관련이 있다. 백제불교가 꽃피워 그 절정을 이룬 시기는 사비(부여)를 수도로 하였던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많은 불교 사원의 건축과 더불어 각종의 불상과 불탑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기간은 다시 600년을 사이에 두고 불상의 양식상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가 있다. 즉 위덕왕(威德王 554~597)치세인 6세기 후반과 무왕(武王 600~640)의 치세로 대표되는 7세기에 각각 해당되는 시기로 중국 남북조 양식이 기본이 된 전기와 중국에 수․당과 같은 통일왕조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양식이 도입되었다. 또 후기에는 외부문화의 토착 문화에서의 융합과 동화에 의하여 백제 나름의 불상 양식이 설정되어 석제 불상을 만드는 것이 유행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서산, 태안 마애불은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점은 불상들이 당당하며 기개가 넘치는 점에서 분명한 것이다. 이 불상들은 보편적인 불상들과는 얼마간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첫째 마애불상이라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깊은 산속 높은 절벽에 새겨진 불상은 사찰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일반적인 불상과는 다르다. 즉 마애불이라는 점에서 대중성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는 속성이 있으면서 동시에 깊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와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불상이 자리하고 있는 서산, 태안이 당시 중국과의 교섭 을 위한 뱃길이라는 점에서 파악한다면 대중과의 유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불상들이 당시 일반적으로 신앙되고 있던 부처, 특히 민중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처들로 구성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민중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그 구도의 일탈성이다. 삼존상일 경우 중앙에 있는 여래가 크고 좌우의 보살이 작은 것이 보편적이며, 여래보다 한급 아래에 녹이는 보살이 작게 표현되는 것은 신분계급제 사회였던 당시로서는 당연한 구도였다. 그런데 태안 마애불에서 보이는 양상은 마치 자애로운 부모가 어린 아이와 더불어 어딘가를 가고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또 서산마애불에서 서있는 여래의 왼편에 앉아서 웃고 있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도 전형적인 구도와는 다른 양상이다. 셋째 이들 불상 모두에서 보이는 인간적인 미소를 지적할 수 있다. 그 미소는 얼핏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의 어색한 웃음처럼도 보이며, 바보 같은 미소처럼도 보인다. 이들의 미소는 그 같은 점에서 바로 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백제인의 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바보인 듯 하면서도 바보가 아니고, 모자란 듯 하면서 모자라지 않는 미소인 것이다. 이 미소는 극히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입의 좌우 끝부분을 움푹 패이도록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표현기법상의 미소가 아니고 그 같은 미소를 끌어낸 사람과 그 사람이 몸담던 당시의 문화가 의미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 백제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은 지배자로서의 부처가 아니고 바로 우리의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모자란 듯 마음좋은 이웃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불상을 만들 수 있었던 백제는 적어도 불교에 관한 한 왕실 중심의 확실성이 요구되지 않는 문화를 구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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