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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5 | [서평]
『춤추는 언론, 비틀대는 선거』 (강준만 지음, 1992, 도서출판 아침)
박영학․원광대 교수․신문방송학과 (2004-01-29 13:35:07)
『춤추는 언론 비틀대는 선거』는 현단계 한국언론을 비교적 꼼꼼하게 가식없이 분석 논평한 평론이다. 마침 이 책이 나올 무렵 한국사회는 14대 총선으로 휘청거리고 있을 때여서 그야말로 정권의 언론 ‘플레이’에 ‘춤추고 나팔부는’ 언론이었고 ‘비틀대는’ 공명선거였다. 한 100년후쯤 한 연구자가 이 책과 함께 이 시대의 선거보도를 함께 읽어내려 한다면 그는 분명 이 책의 저자를 미래 사회에 관한 투시력이 대단한 문명예언가쯤으로 감격적으로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분명 이 시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언론보도만을 통해 금시대를 조명하고 이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점의 그 가상의 연구자에게 있어서 이번 14대 총선 보도는 별로 큰 문제없이 조용한 현실로 그의 앞에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보도내용에 담겨있는 시대적 함의를 추출 이해하는 데 엄청난 노고를 수반해야할 것이다. 그럴 때 마침 그가 바로 이 책 『춤추는 언론 비틀대는 선거』를 먼지 쌓인 도서관 서가에서 찾아 읽고 난다면 그는 너무도 쉽사리 100년전에 있었던 한국의 14대 총선보도의 본질을 비로소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될 것이다. 보통 현단계 한국의 언론은 진실보도에 게으르다고 비판한다. 어떤 사건의 단편적 묘사-좀더 적절한 표현은 편린의 확대포장-에 그치고 만다. 국민의 알권리를 담보삼아 돈방석에 앉은 언론 기업주들의 엄청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필자는 한국언론의 선거보도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중론에 동의하며 그것이 한국 언론 자체 문제 때문이라고 전제하면서 선거보도라는 한국의 언론나무를 「선거의 언론보도」「텔레비젼 시대의 선거」「여론과 프로파겐다」라는 4가지 갈래로 가지치기를 하므로써 그것을 발가벗기고 있다. 이때 쓰인 전지가위는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것이 미제임을 스스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국보다 선거 경험이 풍부한 그쪽 토양이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일 수 있다는 긍정적 바램도 함께 담고 있는 듯하다. 그의 그런 솔직함이 오히려 이 책을 돋보이게 한다. 난삽한 외국서적들의 이론들을 기고만장으로 뇌까리는 자칭 대가연(大家然)하는 부류에 비교할 때 더욱 그러하다. 특히 경마저널리즘이 횡행하는 미국의 선거보도를 한국토양에 대위(對位)시켜 볼 때 필자는 대권(大權)저널리즘이라는 간단하고도 매우 쉬운 핵심어로 접근하고 있다. 물론 언론의 양비론이 빚는 정치무상(원저자는 허무라고 썼음) 또는 무관심조장의 보도가 기본적으로 체제홍보라는 이른바 허풍떠는 나팔수에 다름 아님을 알게 해준다. 어느날 갑자기 헌법질서를 단절시킨 주역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노태우 후보가 만면에 웃음을 가득담고 TV화면을 통해 우리앞에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의 부처님 귀와 "이 사람을 믿어주세요"라는 진실에 찬 단호한 어조에 반신반의했었다. 지근한 거리에서 그를 관찰할 수 없었던 대부분의 TV시청자들은 한낱 TV렌즈가 제마음대로 그려내는 그에 관한 그림 앞에 속수 무책으로 황홀하게 매료되었다는 표현이 좀더 적절했을 것이다. 그가 헌정단절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그가 민주질서의 원천적인 파괴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TV화면에 등장한 그는 화려하게 변신한 민주화의 실천자였다. 그것이 TV의 마술임을 시청자들은 미처 감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가 30몇 퍼센트의 득표율로 권좌에 앉을 수 있었던 바탕이 바로 이 책의 필자가 말하는 'TV의 이미지 메이크업‘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또한 국가경영의 포부와 경륜보다는 오히려 TV화면에 걸맞게 포장될 수 있는 외모가 중시되는 TV의 호의적인 이미지 창출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중심절차인 선거를 쇼로 둔갑시키는 위험 요소인 것 이다. 이 책의 필자는 이렇듯 TV의 야누스적인 두 얼굴을 놓치지 않고 있다. 따라서 TV시대의 선거는 알맹이보다는 화려한 포장이 유권자들의 투표 행태를 교란시키므로써 정치를 '볼꺼리'(쇼)로 둔갑시키고 있음은 깊이 음미해야할 것 이 다. 더욱이 권력분산을 통한 '상호 견제와 균형'이라는 이른바 권력 정립토대가 취약한 한국의 민주 역량을 감안할 때, 선거관련의 TV보도는 한없는 권력의 시녀되기에 충분하며 더우기 관직을 미끼로 삼는 권력 핵심의 TV 경영 핵심주체에 대한 원격조정 작폐를 충분히 예 견할 수 있다. TV가 권력 편향보도를 능사로 삼을 수 있는 빈틈은 언론관련 법규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날 KBS노조가 관리주체와 힘겨운 싸움에서 결과적으로 백기를 들고만 격이 됐던 관변인물 서기원사장의 퇴진 싸움을 상기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당시 적법한 법절차에 의한 대통령의 고유 인사권행사라고 「서」사장을 감싸고 나온 권력층의 속뜻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뻔한 일이다. 인사권을 틀어쥐고 권력에 위해(危害)적인 보도를 제재하겠다는 속셈을 뿜고있었다는 뜻이다. TV의 편향보도 행태는 이번 14대 총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바 있다. 안기부의 야당후보에 대한 흑색선전물을 그대로 시청자에게 보여준 대목이다. 방송주체는 그 같은 사건이 있었으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사실보도에 충실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 사건의 진실이 흑색선전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여성관련의 추문과 연계된 흑색선전물을 단편적으로 보도 하므로서 투표일을 앞둔 관련 후보 당사자에게 미칠 섹스와 관련된 부정적인 면을 보도자는 몰랐을리 만무하다. 오히려 그 점이 그 같은 보도자의 노림수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TV시대의 연설, TV토론과 선거, TV행사와 선거, TV의 정치 광고, TV가 선거에 미친 영향 등에 관한 이 책의 필자의 논고는 미국의 경험을 우리토양에 접목시킨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조금도 낯설어 뵈지 않는 것은 필자의 유려한 화술(필치)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와 유사한 한국적 TV환경을 어렵지 않게 접해온 우리들의 지난날의 경험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끝까지 읽고난 결과를 종합하여 다시 정 리해보자. 주말이면 송송한 재미를 토해 내는 「사랑이 뭐길래」같은 홈드라마를 저녁마다 방출하는 이 마술상자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짓이 없다는 끔찍한 상상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물이나 공기처럼 접하면서 사는 언론매체들이 이렇듯 악마적 속성을 지닌 마술 상자임을 바로 꿰뚫어 알게해준 것만도 이 책이 선거시기이면 서점의 진열장을 넘치도록 채우고도 모자라는 선거관련서적보다 월등 돋보이는 이유이다. 또한 이 책에 앞서 선보였던 강준만 교수의 『한국 언론과 민주주의의 위기』와 함께 이 책을 읽는 것이 한국 언론매체의 야누스적인 두 얼굴을 훨씬 적나라하게 꿰뚫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서평 『떠나가는 노래』- 한 여자 이야기 - (김향숙, 1991, 현대문학) 조명원․편집위원 위기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도 하고, 자본가-노동자간의 계급문제는 더이상 중요한 게 아니라고도 한다. 이쯤 되면 리얼리즘이 설자리가 점점 좁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리얼리즘적 창작을 고집하는 작가들이 있다. 김향숙도 그 중 하나다. 그동안 주로 중산층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 변혁의 움직임을 조망하면서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주목을 받아왔던 그가 여성문제에 발을 들여놓았다. 작품의 부제가 말해주듯 이 소설은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또한 한 여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남성 우월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질기고도 폭력적인 올가미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여자'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아니 거의 전부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수많은 그 여자들의 경우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여성문제를 일깨우고자하는 분명한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정한 여성해방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을 떨치기 힘들다. 노동력을 상실한 아버지 대신 어린 딸을 방안에 가둬놓고 일을 나가야 하는 어머니,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학업을 포기해야하는 주인공 혜옥과 여동생 종옥, 그들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은 혜옥의 친구 송영자와 영분언니, 그리고 혜옥의 딸들…… 이들은 도시빈민의 생활과 남성중심적 가치관에 이중으로 억압받는 여성들의 전형이다. 그들이 꾸려가게되는 조금씩 다른 삶의 내용들은 여성해방의 모색 그것이다. 먼저 혜옥의 삶은 한 마디로 남동생을 위한 희생과 남편에 의한 일방적 피해로 이루어진다. 일찍부터 공부를 때려치우고 돈 벌궁리를 하는 송영자와 오빠의 희생물이 될 수 없다며 집을 뛰쳐나가는 종옥의 충고도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짐을 과감히 벗어던지게 하지는 못한다. 탈출에의 꿈은 말 그대로 꿈에서나 이루어질 뿐 공장의 기숙사 생활은 또 하나의 억압의 현장이다. 그곳에서 만난 영분언니의 해방선언-고시공부하는 오빠의 후견인 노릇을 그만두고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조차 선망의 대상 그 이상은 아니다. 누나 덕에 대학까지 마친 남동생 혜구는 재벌 딸과의 결혼에 성공하여 '모양 갖춰놓고' 살게 되지만, 처음으로 자신을 '천덕꾸러기가 아닌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여기게 해준 이웃 공장의 노동자와 결혼한 혜옥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생활고와 이기적이고 터무니없는 우월감에 빠져 있는 남편의 횡포에 짓눌려 몸과 마음이 망가져간다. 딸만 셋을 낳고 더 이상 출산을 할 수 없는 몸이 된 그녀에게 퍼부어졌던 시어머니의 구박은 남편 승태의 파렴치한 행동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맞아들이려는 시어머니 앞에서 큰딸 정수는 엄마의 이혼을 다그치며 가출을 선언하고, 정수나이에 똑같은 생각을 했었던 여동생 종옥은 남편의 구타에 멍들어 있으면서도 아이 들을 생각해서 이혼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상반된 의견에 결정을 못내리고 머뭇거리던 그녀는 시어머니가 안고 들어온 '아들'과 마주한 순간 실명상태가 되면서 정신을 잃는다. 한편, 죽어도 엄마처럼 살지는 않겠다던 친구 송영자는 결국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술집에 나가 번 돈으로 금남의 방을 꾸며놓고 행복해하며 살다가 '남자를 절대로 방에 들어 놓지 않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애인에게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고, 가족과 연을 끊고 독립한 종옥은 애써 이룩한 경제적 안정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빌미로 구타를 일삼는 남편 때문에 편할 날이 없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삶을 위해 오빠를 버린 영분언니는 검정고시와 야간대학을 거쳐 교사생활을 하는 독신주의자가 되어 있다. 이들의 삶을 보면서 어느 쪽에서도 선뜻 박수를 보낼 수 없는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것은 독자의 탓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패배주의에 빠지고 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남자는 적'이라는 메시지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신주의자 영분언니가 혜옥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라는 것이 남자들 속성을 알고난 뒤면 필연적으로 갖게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한 귀절로 작가의 여성관을 판단하기는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본격 여성 해방 소설이라 불리 우는 이경자의 『절반의 실패』나 박완서의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에서 해결책은 남자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때 느꼈던 미진함이 그대로 남는 건 무슨 연유인가. 작품들의 한계가 여성문제를 단지 남녀 대립구도에서 바라볼 뿐 사회구조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파악해내지 못한 데에 있다는 기왕의 지적을 상기하면, 『떠나가는 노래』가 드러내 는 문제점도 결국 그 점을 극복하지 못한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작품이 주로 중산층 여성을 다룸으로써 어쩔 수 없이 계급적 한계를 노정했다면 도시 빈민 혹은 노동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김향숙은 설정은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위에 서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노동자적 시각을 담보해내지 못함으로써 여성문제의 올바른 시각 정립에 실패하고 만다. 이런 사실은 노동자인 혜옥부부의 노조에 대한 시각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따뜻하고 자상한 동료 미순이 보여주는 당당함을 부러워하는 혜옥은 "미순에게 이끌리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코 남자들에게 밥맛 없는 여자로 비쳐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미순을 만나면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 사용주에 맞서 싸워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만 헤어지고 나면 미순의 뒤를 따라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사그라들고 만다. 이유는 "그 주장들이 어쩐지 과격한 것으로 여겨진" 때문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더는 괴롭히고 싶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또 "노동…생산의 주체…그런 말을 하기엔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할 뿐"이다. 반면에 승태는 혜옥이 미순과 가까위지는 것을 극구 말리다가 자신이 노조에 가담하면서 정반대로 돌아서 아내의 반진보성을 닥달하더니 주체세력에서 밀려나자 노조와해 공작에 앞장서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런 이중성과 기회주의적 속성이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또는 본질적인 성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작가는 의외로 고심하지 않는 듯 하다. 어쩌면 "남자라는 것들의 그 이중성, 이율배반“을 증명하는데 몰두한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남자들이 운동을 이끌어 가는 한 나는 앞으로도 구경꾼 노릇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마음이기도 하다"는 혜옥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벼랑끝에선 혜옥에게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없는 속수무책에 있다. 독신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미순의 가치관적 불구성도, "또 다른 남자를 찾아야 하는 못할 노릇"에 대한 부담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는 종옥의 굴욕적인 삶도 혜옥이 받아들이기인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전도된 가치관과 패배주의적 인간형은 소설의 전망 부재와 직결된다. 부잣집 딸이면서도 착하고 인정 많던 학교 친구 은경의 삶-대학을 중퇴하고 매 맞는 여성들을 위한 상담 일을 하다가 말기 위암을 앓고 있는-에 관한 한 유독 남편의 존재와 그 역할을 모른체하고 그녀의 임박한 죽음만을 부각시킨 것도 남자에 대한 불신과 패배의식이 보다 가치 있는 삶을 통해 극복될수 있는 가능성을 그 뿌리에서부터 잘라내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런저런 아쉬움 때문에 이 작품이 지닌 작지 않은 의의가 무화될 수는 없을 일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에 충실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여자다움의 미덕이란 이름으로 희생 을 강요하는 남성 지배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이만큼 꼼꼼하개 짚어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문제의 폭로, 우리는 그것을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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