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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5 | [문화저널]
중세 유럽의 음악
문윤걸․전북대 강사, 사회학 (2004-01-29 13:33:42)
유럽역사에 있어서 9세기는 유럽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남쪽의 회교를 믿는 사라센 족들이 스페인을 점령하고 프랑스 남부지방까지 그들의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기독교를 믿는 유럽인들을 위협하였는데 유럽인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현재의 프랑스지역을 중심으로 프랑크왕국을 건설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유럽인들의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 신성로마제국은 유럽인들의 힘과 능력을 한군데에 모음으로써 이전의 혼란을 수습하고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이러한 평화로움이 문화가 꽃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11세기를 전후로 유럽은 경제생활이 부흥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많은 대도시들이 건설되었다. 더불어 강력한 신성로마제국의 영향으로 사회전체가 안정되고 회교도들의 서진에 대항한 십자군전쟁의 시작은 유럽사회 전체를 기독교적 신앙관으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문화에 있어서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견, 세속문화의 영향력 확대 등 인간생활의 변화는 그레고리안 성가로 대표되던 중세의 종교적 음악관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음악사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이 기간동안의 뚜렷한 변화들은 이후 서양음악에 기본적인 성격을 부여해주며 세계의 다른 음악과 유럽음악이 구별되는 특징들을 갖게 하였다. 유럽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 시작한 9세기경부터 약 13세기까지의 시기를 예술사에서는 보통 '로마네스크 시대'라고 부르는데 음악에서 이 로마네스크 양식과 견줄 수 있는 양식의 음악이 음악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예술적 감동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유형화된 형식주의와 객관주의'라는 특징을 가진 그레고리안 성가이다. 이처럼 감각적인 것을 거부하고 종교적 권위를 높이려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균형과 조화, 엄숙하고 경건한 성격은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의 이념과 일맥상통한다.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은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세련된 기법을 최대한 단순하게 표현함으로써 그것의 정신적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려는 노력의 결과였디. 이러한 건축양식을 토대로 많은 교회가 건축되었는데 교회의 권위는 귀족의 권위와도 같은 것으로 여겨져서 귀족들은 각 지역에 크고 웅장한 교회를 세우기에 바빴고 거기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로마네스크예술은 교회예술이면서도 그안에 귀족주의적인 지배이념을 담고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유럽은 폐쇄적인 자급자족 경제에서 교역경제로 바뀌면서 경제가 부흥되고 새로운 도시들이 건설되는 등 사회를 지배하던 경제적 토대가 바뀌기 시작하였는데 예술양식도 이러한 변화에 부응해서 자유로운 기운이 표면에 나타났다. '후기로마네스크'고 불리는 이 시기에는 표현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고 그리스적인 장식취미가 되살아나는데 그레고리안 성가도 보다 규모가 커지고 아주 긴 멜리스마(가사 한 음에 붙여진 멜로디)가 장식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아직도 음악에 종교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해야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단순성 대신 음악의 아름다움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인식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음악을 예술성이나 미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등장했음을 뜻하는데 이러한 예술관의 변화는 당시의 신부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교회음악도 세속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의 음악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서 우리는 줌세음악에 있어서 세속음악이라고 불리워지는 민중중심의 음악이 교회음악 더 뛰어난 수준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중세의 음악적 여건을 볼 때 교회음악은 그레고리안 성가의 전형화된 틀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변화를 추구하기 힘들었으며 기교나 꾸밈보다는 단순성만을 중시하여 그를 지켜왔고 악기를 전혀 사용하지 못한 반면 세속음악은 상대적으로 변화에 자유로왔으며 음악이 그 쓰이는 다양한 용도에 따라 폭 넓게 창작되고 악기를 사용하였으며 현란한 기교를 자랑해 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교역경제를 토대로 시민계급이 등장하게 되자 문화의 세속화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 시기에 남프랑스의 프로방스지역을 중심으로 우리가 흔히 중세의 음유시인으로 알고 있는 세속음악을 담당했던 기사계급 출신의 ‘트루바두르(Troubadour)가 출현한다. 이들은 음유시인이나 광대로 통칭되며 주로 민중들로 구성된 ’민스트렐‘(Minstrels)'이나 ’종글레‘(Jongleur)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트루바두르‘는 모두가 완전한 귀족계급은 아니었지만 돈을 벌거나 생계유지를 위하여 하는 예술은 가치없는 것이라는 귀족주의적 사고를 갖고 귀족주의적 이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투루바두르가 아무리 자신들의 예술을 귀족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이들의 예술에서 세속적인 요소들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행하는 작품의 소재는 민스트렐이나 종글레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소재의 취급방법을 달리 함으로써 자신들의 예술을 구분 지으려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표현을 사용하여 지적인 우아함을 과시하려 한다던지, 선율의 구분을 불명확하게 한다든지, 자유로운 리듬처리와 함께 교회음악 양식에 가까운 현학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등 다분히 귀족적인 취향을 드러냈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에는 세속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두 요소가 한데 어울려 있었는데 이러한 교회음악적 자료와 세속음악적 자료, 정신적인 사랑과 관능적인 사랑의 상반된 두 가지 요소는 투루바두르음악에서는 완전한 통일을 보지 못했다. 이는 1150년경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라는 뜻으로 주로 실현불가능한 궁정 내의 사랑을 노래했던 게르만 족으로 이루어진 ’민네징거(Minnesinger)'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결국 트루바도르의 음악은 예술의 비중이 서서히 종교에서 이탈되어가기 시작하는 시기에 생겨났으며 그속에서 나타나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중세는 성속(聖俗)의 구별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던 시대로서 교회내에서는 자신들의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세속과 종교를 철저하게 분리시키려 하였지만 트루바두르, 민스트렐, 종글레와 같은 세속음악인들의 음악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이와 함께 경제적 토대의 변화를 통해서 부를 축적하게 된 도시인들은 더욱 현세적인 쾌락에 몰두하였는데 이교적 관습이 가미된 북부 프랑스의 당나귀 축제나 영국의 바보제등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런 세속적인 기운은 결국 교회음악에까지 침투하여 성속의 두요소를 새로운 방법으로 음악에 융합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여러 소리 음악'(多聲音樂 : Polyphony)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여러 소리 음악은 음악양식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음악적 사고에서 출발하고 있다. 여러소리 음악이 처음 책에 기록된 것은 9세기 경이었는데 이때는 '오르가눔'(organum)이라고 불렀다. 오르가눔이라는 음악은 둘 이상의 가락이 같은 방향으로 오르내리는 것이었다. 즉 '도레미파솔파미레도'라는 가락과 '솔라시도레도시라솔' 이라는 가락이 동시에 소리내며 같이 움직이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도'와 '솔', 이 두음 사이에는 '도레미파솔' 등 다섯 계단이 있는데 이를 5도라고 부르고 '도'와 '파'사이에는 4계단이 있으므로 이를 4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중세 사람들은 5도 음정인 '도'와 '솔'이 함께 울리거나 4도 음정인 '도'와 '파'가 함께 울리는 소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로 생각하여 여러 소리 음악의 맨 처음형식인 오르가눔은 5도나 4도 차이로 둘 이상의 가락을 만들어 이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방법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르가눔이 처음에는 똑같은 음길이로 된 여러 가락들이 같이 오르내리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게 끄는 가락과 짧게 움직이는 가락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오르내리는 음악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5도나 4도의 규칙이 잘 지켜졌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 다른 음정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는 서로 잘 어울리는 소리도 있었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도 있었다. 음악가들은 이런 여러 가지 소리 중에서 잘 어울리는 것만을 골라내는 방법을 익혀 갔으며 어떤 음들을 서로 섞을 때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지를 찾아내면서 화음의 규칙을 발전시켰다. 이런 과정으로 발전해 오던 여러 소리 음악이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이 인간생활에서 맞부딪치며 융합을 시도하던 11세 기를 전후로 하여 색다른 양식으로 변화하였다. 각각 가락과 가사가 전혀 다른 곡조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형식인데 예를 들면 한 사람은 라틴말가사로 된 성가곡을,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 말로 된 사랑의 노래를 같이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음악이 생겨난 이유는 늘 교회음악만 듣고 살아 온 교인들이 세속음악의 유행으로 교회 밖에 서 는 세속음악들을 듣게 되었는데 세속음악은 교회음악보다 가사를 이해하기도 쉽고 그 내용도 훨씬 재미난 것이어서 더 자주 불리웠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적 관념으로 보아 일상생활이 항상 교회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는데 교회의 일을 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노래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라틴말로 된 성가와 그 지방 말로 된 노래들을 한데 섞어 부르는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음악을 '모테트'(Motet)라고 하였는데 프랑스 말인 'mot'는 말이란 뜻으로 '다른 말을 가진 음악'이라는 뜻이었다.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진 두개의 선율이 각각 독립성을 가지고 한 공간에서 울려 퍼진다는 여러 소리 음악의 원리는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지만 이러한 노래형태는 아주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즐겨하게 되었다. 모테트는 두개의 가사를 엮는 것에서 출발하여 점점 세 가지, 네 가지의 다른 가사와 가락을 엮는것으로 발전하여 갔다. 이 과정에서 서로 잘 어울리는 가락을 찾고 이를 조화있게 엮기 위한 기술이 발전되었는데 이것이 결국 음악을 새롭게 만드는 방법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여러 가락이 잘 어울리려면 여러 가락들의 긴음과 짧은 음들을 정확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었는데 음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방법 외에도 여러 가지 부호를 통하여 음의 길이를 표시하거나 표준 음높이를 나타내는 음자리표 등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했던 사람 중에 수도승인 귀도 다레초(Guide d'Arezzo)는 음의 기억유지장치로 '귀도의 손'이라는 기보법을 창안하였고 오늘날의 계이름과 비슷한 7음의 이름을 만들어내었다. 세속과 종교사이의 타협으로 보이는 이러한 노력들은 초기 다성음악에서는 완전히 타협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다성음악의 뼈대가 되는 정선율은 아직도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채택되었고 일단 정선율로 채택된 성가의 선율은 일정한 변형을 거치는데 여기에서 선율의 자연적인 리듬에 대한 요구는 무시되었다. 중세인들은 리듬선법에 기초하여 아주 아카데믹한 방법으로 이를 처리했는데 이로써 정선율은 여러 소리 음악을 구축하는 무미 건조한 뼈대의 구실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처럼 객관적이고 무미 건조한 정선율 위에 복잡하고 역동적인 선율들을 쌓아올리는 것이 바로 고딕양식의 특징이었다. 여러 소리 음악이나 고딕 미술의 다의적(多意的)성격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딕 양식의 회화 속에 나타나는 각 인물들의 개별적인 성격은 전체적인 조화나 구도의 원리를 무시하고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물론 이들 예술이 신의 나라에서 인간의 나라로, 상징적이고 절대적인 것에서 일상적이고 감상적인 것으로의 이동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아직 종교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못하였다. 14세기는 조화와 통일이 강조되던 이전의 시기와는 달리 변화와 다양성의 시대였다. 이제 사람들은 신앙과 이성을 분리해 생각하게 되었고 교회가 더 이상 인간의 이성적인 영역에 까지 참견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교회의 권위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음악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나 음악을 학문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던 기존의 음악관에 반기를 들고 음악을 실제적인 것으로 파악하려 하는 음악관이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아르스 노바' (신예술 : Ars Nova)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이는 14세기 전반에 유행했던 음악양식을 지칭하는 말로서 이 시기에 음악의 중심은 교회음악에서 세속음악으로 옮겨왔다. 이 운동은 14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으나 정신문화와 예술의 전성기에 막 들어선 프랑스에 전파되면서 신속히 퍼져나갔다. 이 운동의 목적은 지금까지 엄격한 규칙에 매여있던 음악을 해방시키자는 것이었다. 아르스 노바의 특징은 이 시기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변화와 다양성을 가져왔다는데 있다. 점차 인간 중심으로 가는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한데 음악의 역할은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고 음악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현하기 위한 기법상의 배려를 해주어 반음계적 기법이 나타났다. 이러한 배려들은 모두 작곡의 개념으로 흡수되었으며 작곡가의 존재가 드디어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술작품에 자신이 이름을 내거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태도는 시민 계급의 민주적 사고와 일치하고 있다. 이제 시민계급은 새로운 문화 담당층으로서 귀족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인간이 모든 사회적 행위의 주체이고 중심이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중세에서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들어서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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