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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5 | [문화시평]
화려하고 세련된 신라인의 옛 멋을 만나는 기쁨 - 신라불교 공예 특별전을 보고 -
장순순․전북대 박물관 연구원 (2004-01-29 12:17:30)
얼마전(3월 31일)부터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국립 경주박물관소장 신라불교공예특별전'이 기획되어 신라의 불교공예품들이 다양하게 전시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오는 6월 14일까지 계속될 예정인데, 국립 경주박물관이 전시실 개․보수관계로 본관과 안압지관을 임시휴관하게 됨에 따라 열리게 된 것이라 한다. 이번 특별전이 기획된 목적은 신라의 불교공예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함으로써 백제의 옛땅인 전북지역에 신라지역의 문화재를 이동, 전시하여 움직이는 박물관의 역할을 하는데 있고, 아울러 이 지역의 연구자, 문화재 애호가 및 일반인들에게도 신라불교미술에 대한 연구와 감상의 기회를 마련하여 지방문화의 활성화에 기여 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한다. 계속 미루기만 하다가 오늘은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출발을 하였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따뜻한 봄기운을 느끼게 해줬던 날씨가 갑자기 심술을 부리더니 오늘은 기온이 더욱 떨어져 추운 겨울같고, 설상가상으로 심한 바람에 간간이 빗방울까지 뿌리곤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지 인적이 드문 탓에 쓸쓸함마저 느껴 졌지만, 그래도 박물관 앞에 간간 히 수줍게 얼굴을 내민 철쭉꽃을 보니 내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박물관 1층에 위치한 기획전시실에는 한 눈에 반할 만한 신라불교공예품들이 잘 정돈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의 전시실(편의상 제1전시실이라고 하겠음)에는 7~10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불교 공예품들이, 이어진 다른 전시실(편의상 제2전시실이라고 겠음)은 찬란했던 신라문화를 표할 수 있는 유적인 황룡사지와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중심이 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제1전시 꼴은 화장한 유골을 매장하기 위하여 담는 항아리인 골호(骨壺)와 와당, 전(塼), 불상, 불사리장암(佛舍利莊巖), 십이지신상 등이 중심이 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에 들어가자 마자 여러 가지 형태의 골호가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으로 설명문을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에 있어서 골호의 사용은 불교의 수용과 함께 화장이라는 새로운 장례법이 들어옴에 따라 유행하게 된 것으로 그 시작은 삼국시대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신라의 경우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 그 발생이 늦어서 현재로는 7세기 초부터로 추정된다고 한다. 전시되어 있는 골호는 그 형태가 다양하였다. 집모양의 골호, 단경호, 손잡이 달린 발(鉢)모양의 골호, 탑형골호…… 설명에 의하면 탑형골호는 인도의 산치탑과 유사한 형태로 당시 신라가 인도와 문화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집모양이나 발모양의 골호를 통해서 당시 신라인들의 가옥의 형태나 그들이 사용하였던 생활용기를 보고 있자니 새삼 조상들의 유물하나 하나가 얼마나 살아있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전시실을 돌아보면서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되었다. 얼굴무늬수막새와 벽사의 상징으로 마루 끝에 장식했던 도깨비얼굴을 한 기와가 그 것인데, 신라인들의 삶이 끈끈이 녹아 있는 듯하여 무서워야 할 도깨비 얼굴마저 해학적인 모습으로 표현된 것을 보면서 신라인들의 온화하고 해학적인 웃음은 우리의 멋 조상의 그것이 아닌 바로 내 이웃, 아니 나의 웃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의 안녕과 중생들의 구제를 기원하면서 무수히도 많이 쌓았을 저 와당과 벽돌들 하나 하나에 최고의 아름다움과 서로를 위하여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하였을 신라인들을 생각하면서 상실되어 가는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쉽기만 하였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불상 하나하나에 까지, 십이지신상 하나에까지 깃들여 있었다. 부처의 광명이 어느 곳에나 두루 비치기를 기원하면서 조성하였을 수더분한 모습의 동제비로자나불입상에도, 사람들의 질병과 수명을 연장시켜 주고 중생들을 어떠한 고통에서든지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조성되었을 약사여래상에도 신라인들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였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약사여래상은 고신라시대 후반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서방극락정토의 주인공인 아미타여래와 함께 가장 많이 조성되어 당시의 주된 예배대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불사리장암을 두루 보면서 화려하고 세련된 신라인들의 공예 솜씨를 볼 수 있었다. 이렇듯 조그마한 것 하나 하나에 정성을 들여 만든 세련되고 솜씨가 뛰어난 공예품은 아마도 삼국이 통일 된 후 우리 지역에서 꽃피웠던 백제의 문화가 가미되면서 더욱더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리라. 찬란했던 백제문화가 단절되지 않고 이렇게 나마 이어졌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신라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황룡사와 안압지 유물이 있는 전시실로 발길을 돌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했는데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에 절로 고쳐 짓고 이름을 황룡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553년경에 1차 가람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선덕여왕 12년(643)에 황룡사의 9층 목탑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는 진골출신의 승려인 자장이 9층목탑을 세우면 주변의 9개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지켜줄 것이라고 건의함에 따라 세우게된 것으로 백제사람 아비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이때 목탑의 완성과 더불어 이루어진 절(이를 2차가람이라고 한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황룡사이다. 그 후 1238년 몽고의 침입때 황룡사와 함께 소실된 9층목탑은 신라의 불교가 호국불교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번에 전시된 황룡사지의 유물은 1976년부터 문화재 연구소 주관으로 이루어진 수 차례 에 걸친 발굴을 통하여 출토된 것들이라 한다. 전시유물은 황룡사지를 발굴하면서 출토된 조그마한 불상에서부터 와당, 전, 조그마한 탑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유물로는 황룡사 찰주본기(刹柱本記)가 있다. 이 본기는 제28대 경문왕때 황룡사의 9층목탑을 고쳐 지으면서(871~873) 목탑의 중심기풍인 찰주 및 석제사리공(石製舍利孔)안에 봉안된 금동제 사리함에 새겨진 것으로 탑의 조성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다. 황룡사탑의 창건 경위와, 탑의 중수가 신라정부 및 불문(佛門)의 중대한 일이었음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현존하는 탑지(塔誌) 가운데 내용이 가장 풍부한 금석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관련내용이 『삼국유사』와 거의 일치하고 있어 당시 신라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울러 중창공사에 참여하였던 관리 및 승려들의 명단을 계급별로 기록하고 있어 자료 가 극히 빈약한 신라사회사의 자료로도 그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안압지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뒤 왕 14년(674) 궁궐안에 못을 만들고 이곳에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던 곳이다. 이 못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남은 국력을 활용하여 자신의 마음과 몸의 피로를 풀기위한 의도로 조성된 것이라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안압지 유물들은 1975년부터 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하여 실시한 발굴조사로 세상에 빛을 보게된 유물들이며, 발굴로 출토된 총 3만여점의 유물 가운데 그 일부이다.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할 때 못안으로 빠진 것들과 935년 신라가 멸망하여 동궁(東宮)이 폐허가 된 후 홍수나 천재지변 등으로 못으로 흘러 들어간 것들로 추정된다고 한다. 유물 가운데는 금동용머리, 도깨비모양을 한 금동문고리, 금제 장신구, 수정 등 옥제장식품, 금동봉황 장식 등이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은 통일신라의 화려했던 문화뿐만 아니라 중국의 당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훌륭한 기획전시를 보고 굳이 아쉬움을 털어 낸다면 두 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첫째는 박물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겠지만, 기획전시를 소개하는 안내책자나 팜플렛으로나마 관람자들이 모처럼 귀하게 감상한 신라불교 공예품들을 두고두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둘째는 전시의 단조로움을 들 수 있겠다. 좁은 전시공간과 부족한 전시시설로 인하여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유물들이 관람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스쳐지나가기 쉽게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애써 전시를 기획한 관계자들의 노고를 상실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관람자로 하여금 좀 더 가깝게 그리고 쉽게 그 유물의 가치를 느끼게 하려면 적당한 크기의 진열장과 알맞은 전시 공간이 필요하고, 아울러 적당한 조명시설 등의 과학장비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쉬움은 비단전주박물관 뿐만 아니 라 우리나라 거의 모든 박물관도 같은 실정으로 적절한 재정적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훌륭한 유물과 적절한 과학기구가 만남으로써 우리 유물은 더욱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고, 관람자도 훌륭한 감상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과거와 미래와의 만남'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치 않을까 ? 앞으로도 이러한 기획 전시회의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하여 우리 지역에서 자주 접할 수 없는 유물들을 관람함으로써 이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다른 지역 문화에 대한 자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고, 아울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유물들과 비교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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