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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3 | [문화저널]
모던과 리얼 -신식국독자의 「고호」의 귀
김원호․전북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장 (2004-01-29 12:05:31)
너도나도 ‘리얼한 것’을 찾고 있다. 망둥이도 뛰면서 예술이 보다 리얼리티를 획득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탐미주의나 형식주의 예술의 오랜 자폐증적 환상에서 깨어나 신식국독자에 걸맞는 현실성을 획득해야만 한다라는 사회적 예술분위기로의 성숙은 긍정적이지만, 그러나 리얼리티 획득을 통한 '치열함과 넉넉함의 변증법적 종합'이라는 자위적 미사여구는 어쩐지 낯간지럽고 허하다. 목마르게 또는 자의식 수준에서 열나게 리얼해야 한다라는 열정에 비해서는 뭔가가 비어있는 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진보적 문예진영에서도 소위 비판적 리얼리즘과 당파적 리얼리즘이 한편이 되어서 인민주의 및 경제주의 문예와 대결하는 구도가 되어야 한다고 일단은 폼나게 정의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엇이 비어 있어서 리얼한 것은 속시원하게 현현(顯現)해하지 않을까? 자, 우리에게 리얼리즘의 체감온도는 실제적으로 몇도나 될까? 남한 민중문예운동 진영이 획득해낸 현실주의의 수준은 그 집요한 과학적 주장만큼 예술적 감동으로 발현되는 있는 것일까? 남한 물질운동의 발전만큼이나 명확하게 그 감각이 세련되게 훈련되고 있는 대중들에게 현실주의가 생생한 현실성을 증거나 해주고 있는지? 목표는 달성되라고 존재하지 그 자체로 존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남한 변혁운동은, 현재의 솔직한 수준일테지만, 그간 목표의 의식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느라고 그리로 가는 방법, 즉 과정의 축적이 몇 개의 단선으로 비현실적으로 그어져 왔다. 그것이 준 폐해는 여러 부문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원전 수준의 ‘교조’와 현실을 이끌어 가는 ‘원칙’과의 혼동을 중심으로 현상되고 있다. ‘언제나 정당한 운동권, 허울 쓴 민중사랑, 혁명적 열정과 그 결과에 대한 무책임, 상대를 이해하려하지 않는 것, 심지어 독재자의 싹’ 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남한 사회주의자에 대한 「한 선진노동자의 분노」(『길을 찾는 사람들』, 1992년 3월호)는 현재 우리 운동의 현실적 수준에 대한 일리있는 자성이다. , 예술운동 영역에서는 현실성의 획득, 즉 문예에서 현실주의의 실현으로 반성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생생한 현실의 획득이 아직도 예술적 전범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수준이 주는 온갖 공론과 그마만큼의 고통이다. 따라서 우리가 소중하게 원리화시킨 당파성이라는 개념이 현실과정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만큼 떨어져 있어야만 되는 폼나는 목표 정도로 빈약한 염불이 되고 있다. 현실주의는 현실을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내며 당연히 현실의 구체적 조건을 염두에 둔다. 그 구체성은 예술의 당대성, 즉 예술의 물질운동과의 조응력이 보장해준다. 우리의 진보적 예술이 리얼하지 못하고 있는 반쪽의 이유는 모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데까당스한 모더니즘이라는 조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상부구조의 현실적 수준에 보다 일치해야 함을, 즉 현대성(contemporary)이어야 함을 말한다. 우리의 리얼리즘은 모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비린 남루’와 누추함을 현실 속에서 극복해낼 수 없다. 과학적 현실인식을 통해 획득해낸 문예의 이념적 구도에만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모던한 대중의 첨예하고 다양한 현실속으로 현실주의문예는 들어가야 한다. 화가 「고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걸로 유명하다. 그의 삶은 병약했고 예술적 주제도 그리 탐탁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그림은 불꽃이 연상될 정도로 격렬한 맛을 보여준다. 그에 관한 일화 하나. 그는 타히티로 떠나기 전의 「고갱」과 잠시동안 같이 살았는데, 깡패같이 활달하고 거침이 없는 고갱과의 성격차이로 많은 고생을 한 모양이다. 어느 날 심혈을 기울여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는데, 고갱이 트집을 잡다가 그림으로 표현된 귀와 고호의 실제 귀가 전혀 같지 않다라고 빈정대었다. 이에 격분한 고호는 자기 귀를 나이프로 싹둑 잘라 그림에 대어보면서 그림의 귀와 자신의 귀는 똑같다라고 항변한다. 물론 귀는 다시 붙이지 못하고, 그 지경에도 붕대를 얼굴에 칭칭 동여매고 그려낸 것이 “귀잘린 자화상”이란 그림이다. 소위 모더니즘을 태동시킨 표현주의의 비조중의 한 사람, 고호의 모던한 기질이다. 이후 모더니즘의 그 지독한 자폐증적 자의식과 현실비관 의식의 화려한 개화가 시작되며 예술가들은 뭔가 괴팍한 것을 하나씩 가져야만 예술가 반열의 적자인 듯한 유행이 생겨났다. 「뒤샹」은 전시장에 남자 소변기를 갖다놓으면서 예술의 형식실험시대를 열었고 「뭉크」의 그림 “절규”는 포스트모던시대의 호러영화로 귀결되어 갔고, 「조이스」의 미래는 어머니의 자궁 속이라는 원형적 질이 되었으며, 급기야 기다려도 올 리 없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베게크」에 와서는 서구사상의 깜깜절벽의 마지막까지 현상시켰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들도 현실을 비판한다. 그들의 미래는 비판적이고 묵시록적 예언수준이기 때문에 그 비판은 조속적이고 자족적이지만 19세기 유물론의 천박한 반영인 자연주의에 맞서서 인간의 자유에 대해 치열한 실험정신을 가졌던 점은 높이 사야한다. 비록 형식주의, 심미주의에 대한 탐닉정도이지만, 제국주의가 무르익는 시기의 그 거대하고 불안한 다양성과 복잡성을 나름대로 세련된 감수성으로 ‘전위’적으로 살아낸 그들이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었던 공로는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엘리어트」의 “황무지에서는 예술의 난해함을 열었지만 20세기 영미문학의 비평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점은 유의미하게 음미를 해보아야 한다. 남한 문예운동진영의 혁명적 낭만주의 청산은 아직 말뿐인 수준이다. 소시민적 민족문학론, 민중적 민족문학론, 민주주의 민족 문학론, 노동해방문예론 등의 문학논쟁이 거둔 성과는 현실주의의 획득으로 귀결될 터이지만 우리는 아직 모더니스트들이 갖고 있는 ‘내공’수준에는 닿아 있지 못하다. 비평은 아직 자족적 인식정리 수준으로만 사용되고 있으며 창작은 관점과 태도가 혁명적 낭만주의와 아직 ‘닮은 형제’이다. 자, 남한의 리얼리스트들은 온전한 리얼리티의 자기정체성이 언젠가 확립되어야만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리얼리즘을 기다리며”의 신종 「베게트」들인가? 리얼리즘은 목표로서만 존재할까? 사회자체는 항상 보편적으로 완성태가 아니다. 직관수준일지라도 사물에 대한 본질접근의식과 헌신성, 그를 위해 고호처럼 귀라도 잘라바칠 수 있는 열정, 그 수준의 아이덴티티의 축적이 본질해석의 올바른 시행착오와 사물에 대한 진정한 실제적 접근을 조건보장해준다. 지금 이러한 점에서 문예운동진영은 턱없이 부족하다. 과학의 핑계(?)아래 추상이론적 ‘조심스러운’ 성숙은 있지만 보다 삶의 총체성으로 종합화된 성숙(진정한 리얼리즘)을 보장하는 주요한 하나의 축인 그 예술가적 기질의 모던성의 부족이 심하다. 모더니즘은 무시의 대상이 아니라 배우면서 극복해야 할 엄연한 현실이다. 유물론적 사고의 신식국독자 남한적 축적은 90년을 지나면서 이제 그 출발의 자신감을 가질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하면서도 혹 과학자체가 목표가 되는 빈약함은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 현실주의는 현실의 조그만 조심스러운 사실적 축적(추상이론적 배경힘이 뒷받침될지라도)에함 매달려서는 당대의 정치경제학적 질을 조응시켜내는 그 엄정한 풍부함을 획득하지 못한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새로워야 한다. 구태의연한 예술적 주제와 포맷은 대중의 감각수준을 무시하는 것이 되며 그마만큼 예술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이 되어간다. 일상과 관념만큼의 예술을 읊는다면 감동이 창출될 리가 없는 사회가 지금 신식국독자이다. 지금의 예술은 파노라마틱해야 하며, ‘극적’이어야 하며, 갈등의 진한 냄새가 나야 하며, 반전이 폐부를 찌르는 감동으로 되어야 한다. 그 내용은 폭력과 포르노일테지만 대중의 감각 수준은 빼고 더할 것 없이 신식국독자 남한의 물질운동 수준이다. 우리의 과학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폼 나는 목표가 아니라 현실주의라는 방법을 가진 현실의 무기이어야만 대중의 감각은 변형적 정서로 승화될 수 있다. 우리의 리얼리즘 전통은 김수영과 신동엽에 바탕을 두면서 축적되어 왔다. 신경림과 황석영과 고은의 축적, 그리고 김정환과 김남주와 신학철의 애씀은 남한의 현실주의의 성과를 곧 당파적 현실주의의 성취로 접근시켜 나갈 것이다. 그러나 황지우와 이성복, 기형도들이 빈약한 내용이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에 접근해 나가는 모던성도 우리 것으로 승격시켜내지 않는 한 우리 문예의 누추함은 계속 될 것이다. 독점자본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다. 그를 문화적으로 현상시키는 독점자본의 대중은 폭력과 섹스를 MRA(도덕재무장운동) 수준으로 성토를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은근히 즐길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문화와 실제적으로 게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당대의 모던한 현실을 경원만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과학을 우리 식의 MRA적 전도만 하다가는 내리 삼 대 빵의 퍼펙트 몰수게임만 당할 것이다. 이제는 뭔가 풀셋트 접전까지는 가야지 변혁을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대중의 응원소리에 최소한 부끄러워하며 우리의 귀를 잘라 볼 용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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