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1.2 | 연재 [문화비평]
문화부의 의욕과잉을 염려하며
이종민 본지주간(2004-01-29 11:33:33)

문화부가 '공보(公報)'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독립한지 벌써 일년이 되었다. 문화라는 것이 비정치적이고 탈이념적인 것이라는 수상쩍은 주장을 되풀이하면서도 정부 혹은 정권의 선전대 역할을 자임하여 스스로를 문화공보부라 칭하더니 작년 초에야 그 명칭이 자신들 주장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무리 사리에 맞지 않은 주장일지라도 그 자체내의 논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가 무엇을 ‘공보’한다니 말이 되는 얘기인가? 이제야 비로소 문화를 관장하는 부처가 스스로 표방하던 것에 어울리는 옷을 차려 입게 된 것이다.
이 때늦은 반성에 근거한 딴살림 차리기를 많은 문화인들은 호들갑으로 반겼다. 이제야 비로소 문화가 정치나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구나! 이제야 고고하고 아름다운 예술이 무식한 정치군인이나 꾀죄죄한 관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창공을 날 수 있겠구나! 더구나 그 살림의 책임자가 ‘치꺼분하기 이를 데 없는 정치나 경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야말로 고상하기 이를 데 없는 말들, 그래서 보통 삶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은 그 대강의 의미조차 짐작하기가 지속적으로 해오던 분이니 어느 ‘문화인’이 기대에 부풀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공문문안들을 ‘이쁜’ 말들로 바꾸어 나가는 ‘문화인’ 다운 실천행위를 보면서 이제야 비로소 참다운 문예부흥이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설레임을 가진 이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공보’의 딱지를 떼내는 것에 어떤 음모가 서려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그 얼굴마담의 면모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현정권의 문화적 공세가 더욱 교묘한 형태로 고도화하지 않겠는가 하는 언뜻 잘 이해가 안가는 혐의를 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해가 잘 안가는 혐의’가 점차 이해되기 시작했다. 문화부의 문화예술 정책이 특정계급 혹은 계층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민족분단이나 제국주의에의 예속이라는 한반도의 뒤틀린 상황을 어찌할 수 없는 기정의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아니면 이를 은폐하려는 데 주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남북 문화교류 5대 원칙에서 표방하고 있는 민족적, 평화주의적 입장의 한계(특히 전통문화의 성격을 식민지시대나 봉건왕조시대의 것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 등), 남북음악인들의 공동작업의 결과인 “통일의 노래”의 음반제작 취소,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 대한 부당한 간섭 등을 통하여 확인된 것이다.
겉으로는 탈이념을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지배세력들의 보이지 않는 문화적(혹은 이데올로기적) 공세의 전위를 맡고 나셨다는 것이 이들, 매사를 ‘삐뚤어진 눈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의 지적이다.
그런데 이처럼 ‘부정적인 사람들’의 의구심이나 혐의에 무관심했던 많은 문화예술인들도 문화발전 10개년계획 시행 첫해인 91년 문화부의 원대한 사업계획에 접해서는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교육혁신과 국민정서 함양방안’에 관한 오개부처의 합동보고에서 드러난 “문화예술을 통한 국민정서 함양”이라는 제목의 사업계획 보고의 요지는 “전통문화와 산업문명이 조화를 이룬 새 심성”을 정립하겠다는 실로 야심적인 것이다.
이 사업계획은 크게 문화감수성 계발과 문화시설 확충으로 대별될 수 있겠는데 특히 주목의 대항이 되는 부분이 국민심성의 개조를 목표로 하는 첫 번째 부분이다. 언뜻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연상시키는 이 계획은 우연찮게도 신임 총리가 취임사에서 밝힌 ‘국민정서함양’에 대한 소신과 맥이 통하고 있다. 구체적 내용에 있어, 한국인의 필독기본도서 일백권을 선정 전국도서관, 문화원, 마을문고 등에 보급 특별관리하겠다는 것이나 한국인이 갖추어야 할 평균적 교양수준을 정해 놓고 ‘국민문화 교양지수’를 측정하여 취직시험 등 인물평가에 참조하도록 하겠다는 발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된다. 그 실현성과 무관하게 이 계획이 안고 있는 편협한 중앙집중적 일원주의에 근거한 문화정보의 통제 및 강제보급은 군사정권에 의한 개발정책의 문화적 변형에 다름이 아니다.
지역문화축제를 개발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문화의 서울중심화나 지역간의 문화적 격차를 줄여나간다는 차원에서 의미있다 할 수 있겠으나 그 세부적 계획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지역의 자발적인 창안을 뒤에서 후원하는 차원이 아니라 중앙으로부터 지역에 일방적으로 분배한다는 성격을 띤다면 이 또한 문화예술의 자발성 자율성에 대한 도전으로 그 심각한 역기능인 염려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염려는 실제 ‘연극 영화의 해’ 계획에 대한 연극 영화인들의 거센 반발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여기에서는 그 자율성에 대한 침해와 더불어 ‘장기적인 대책없는 일과성(一過性)’이 중요한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다. 사실 문화예술의 건강한 발전은 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에 상응하는 것이지 정치경제의 질서(문화)가 엉망이 되어가는데 문화예술만 유별나게 꽃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계획은 장기적인 것이어야 하며 건강한 문화예술의 토대가 되는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장식적인 행사위주의 문화부 사업계획이 또 다른 ‘국풍81’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장식성 ‘하향식 문화사업’이라는 혐의는 문화시설에의 확충 계획에서도 확인된다. 서울근교에 다목적 전통공방촌을 건설한다는 것도 그렇고 내무부와 협조하여 전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 ‘문화의 거리’를 조성한다는 것도 그렇다. ‘문화의 거리’가 새마을 운동의 지붕개량식으로 조성될 수 는 없다. 공방촌의 건설도 인위적으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루어져서는 의미가 없다.
이러한 지적들은, 앞서 밝힌 것처럼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려는 사람들’만의 투정이 아니다. 문화예술의 기본적인 속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문제점들이다. 정권홍보의 저의만 없다면 자기과시의 허욕만 없다면 문화부 장관은 물론 임직원들도 쉽게 느낄 수 있는 점들이다.
소기의 예상되는 성과에 비하여 너무도 초라한 예산 배정 때문에 장관 이하 모든 임직원들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현 정권의 속성을 고려해 볼 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독립을 했으니 그 명분이 맞는 일을 해내야 한다고 조급해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초라한’ 예산으로 뭔가 ‘엄청난’ 일 해내려는 의욕과잉이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국민심성을 바로 잡겠다는 것은 쿠테타 군인이나 품음직한 야망이다. ‘연극영화의 해’를 선포한다고 연극이나 영화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의 화려한 오케스트라나 무용단을 초청하여 좌석하나에 몇만원하는 공연을 마련한다고 해서 국민심성이 변화되는 것도 아니다. ks에 나무를 심어 가꾸는 것처럼 오랫동안의 공력과 정성이 있어야만 한다.
문화부 장관 한사람의 탁월한(?) 식견과 노력으로 우리 문화예술에 비약적 발전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차분하게 각 부분에서 잘 자라나고 있는 예술문화의 나무들이 파쇼적 관료들의 외풍에 시달리지 않도록 방패막이 역할이나 충실히 했으면 좋겠다. 문화가 탈이념적이라거나 비정치적인것이라는 허위 이데올로기를 버리라는 요구가 무리임을 잘 알고 있기에 다수 민중의 건강한 정서를 지향하라는 주문은 차마 할 수가 없다. 다만 다수 민중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만은 삼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