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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 | 칼럼·시평 [문화칼럼]
집단기억과 국가 공동체
전우용 역사학자(2023-06-21 09:06:17)



집단기억과 국가 공동체 


전우용 역사학자



현대 한국인 대다수는 하늘의 신 환웅이 지상에 내려오면서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현대 불교인은 모두 석가모니의 다비식에서 8섬 4말의 사리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현대 그리스도교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물론 지금 단군,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 세대의 기억에서 다른 세대의 기억으로 전승을 거듭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저들의 존재를 과거에 묻어두지 않고 현실로 끌어들인다. 이것이 기억의 위대하고 신비한 힘이다. 기억은 까마득한 과거와 현재를 곧바로 연결시키며, 그럼으로서 인간에게 초(超) 시간적 사유(思惟), 즉 초월적 사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초월적 사유는 다시 미래를 예견하고 현실을 바꾸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특출한 동물인 이유 중 하나는, 기억을 공유하고 전승하는 공동체를 형성했던 데에 있다. 오직 인간만이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간대에 배열할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세대를 뛰어넘어 전승되는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 


과거의 사실들에 대해 특정한 인간 집단이 공유하는 기억이 ‘역사’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이나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처지와 기준에서 과거를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언쟁이 “그때 네가 그랬잖아.”라는 말에 대해 “내가 언제?”라고 대답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서로 살아온 경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기억을 요구하는 것은 본래 무리한 일이다. 소수자의 기억과 다수자의 기억, 지배자의 기억과 피지배자의 기억, 여성의 기억과 남성의 기억이 다 같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과거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로 묶일 수 없다. ‘국가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함께 겪어온 과거 사실들에 대해 완전히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 공동체’를 이룰 수는 없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서로 다른 기억들 사이의 대립과 투쟁’은 국가 공동체가 무너져 가는 조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억의 분열은 공동체의 분열, 나아가 공동체를 구성했던 사람들 간의 ‘내전(內戰)’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왕조시대에는 군주와 지배계급이 역사 서술을 독점했다. 평민들 사이에 떠돌아 다니는 ‘옛날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역사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사실 왕조국가는 평민들에게 공통의 기억에 입각한 ‘공동체 의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데에는 ‘왕권(王權)’ 하나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王)이 사라지고 신분제가 철폐된 뒤, 근대국가는 자신을 ‘기억 공동체’ 또는 ‘역사 공동체’로 재정립해야 했다.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先烈)’을 함께 기억하는 일은 국가를 역사 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우리나라에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국립 ‘추모시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0년의 일이었다. 이 해 남산 기슭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奬忠壇)이 건립되었다. ‘충성을 장려하는 제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제단에서 제사를 받은 사람들은 ‘고종에게 충성하다 죽은’ 신하들뿐이었다. 이때까지도 왕과 국가는 구분되지 않았다. 왕권과 국권이 함께 소멸되어 가던 을사늑약 이후, 민간에서 선열(先烈)들을 기리려는 움직임이 본격 출현했다. 이순신, 최영, 을지문덕 등의 전기가 간행되었으며, 이런 책들은 일본의 침략 상황과 맞물려 ‘민족의식’ 또는 ‘민족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는 데에 상당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역사 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다. 일본 군국주의 지배자들이 강요한 기억과 독립운동가들이 지키려 한 기억이 서로 대립하며 한국인들의 의식을 분열시켰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 ‘피지배 민족’으로 고통을 함께 겪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순국선열들을 발굴, 선양하는 일에 착수했다. 더불어 그들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기초로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민족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로 시작하는 제헌헌법 전문이 탄생했다. ‘정의 인도와 동포애’를 민족 단결의 3대 가치로 삼은 것은, 이것들이 바로 독립운동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의 말대로 ‘자존(自尊)보다 생존(生存)이 먼저’였다면, 선열들은 결코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독립운동을 벌이지 않았을 터이다. 제헌헌법 공포 이태 뒤 6.25전쟁이 발발하여,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이들을 기리는 일 역시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였다. 


휴전 직전인 1954년 5월, 대한민국 정부는 6월을 ‘군경(軍警) 원호의 달’로 정했다. 1955년에는 서울 남쪽 동작동에 국군묘지를 마련했고, 1956년에는 6월 6일을 현충일(顯忠日), 즉 ‘충성을 드러내는 날’로 지정했다. ‘군경 원호의 달’이 ‘원호의 달’로 바뀐 것은 1963년, 다시 ‘호국보훈의 달’로 바뀐 것은 1985년의 일이다. 순교자들이 각 종교의 ‘성자(聖者)’인 것과 마찬가지로, 순국자들은 각 나라의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성자(聖者)’이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일은, 국가 공동체를 하나로 유지하기 위한 최소 요건이다. 나아가 기억이 영속(永續)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가능해진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전남도청 주변에 절규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우리는 광주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를,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도청에서 탈출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바란 것은 단 하나, ‘잊히지 않는 것’뿐이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동포들의 자유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린 사람들에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잊지 않는 것’, ‘기억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곧 국가공동체를 지키는 일이자 애국하는 일이다. 나아가 우리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기억, ‘정의 인도와 동포애’에 기초한 기억을 왜곡하고 전복하려는 시도에 맞서 싸우는 것도, 이 국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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