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22.7 | 연재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유하,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굽은 척추를 곧추세워 주는 멋진 선언
이휘현 KBS전주 PD(2022-07-11 17:36:42)

굽은 척추를 곧추세워 주는 멋진 선언

글 이휘현 KBS전주 PD




흘러간 것들은 모두 가슴에 사무친다.

우리의 생은 앞만 향하고 있기에 등진 모든 것들이 그리움의 향수를 뿜어댄다. 그것은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애절하다.

흘러간 것들에 유달리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로부터 ‘퇴행적’이라며 조롱받지만, 어쩔 것인가! 그렇게 태어난 것을. 그들에겐 애초에 선택권이 없었다. 세상에 몸을 들이밀고 나왔는데, 유독 지나간 것들에 눈길이 닿는 걸 어쩌란 말인가.

불행하게도 나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다. 마흔여덟 해 남짓 살아왔는데, 내 시선은 자꾸 뒤를 돌아본다. 남기고 온 것들을 안타깝게 곱씹으며 마음으로 운다. 행여 이런 내 부끄러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그러다가 나와 비슷한 족속을 만나면 안도한다. ‘당신도 세상 살기 참 팍팍하지요?’ 무언의 눈짓이 오가고, 짧은 시간이나마 유달리 민감한 고독으로부터 나는, 우리는, 해방된다.

20여 년 전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를 펴들었을 때에도, 나는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추억에 민감한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었다니! 그 순간 나는 몹시도 흥분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숨이 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끝없는 마음의 비틀거림.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그 사실이 나를 숨차게 한다. 

-유하,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277쪽


유하는 영화감독이다. 2004년 <말죽거리 잔혹사>로 한국영화사에 제법 짙은 인장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영화계 입문 전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전업 시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그리 큰 유명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1989년 우리 나이 스물일곱에 그가 선보인 첫 시집 <무림일기(武林日記)>가 한국 시단에 새로운 경향을 엿보여줬다고는 하나, 장정일이나 황지우만큼 파격적이진 않았다. 그럭저럭 문학평론가들의 눈에 띄어 주목받는 시인 축에는 낄 수 있었지만, 대중적으로는 전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유하’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세상에 거론된 건 그의 나이 서른에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3)를 내놓으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동명의 시집이 먼저 출간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홀딱 망했고, 다만 신인가수이자 신인배우인 엄정화를 한국 연예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걸로 역할을 다했다. 그리고 장렬히 산화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30세가 온다.

-위의 책, 277쪽


시도 영화도 잘 안 되고, 연애도 시원찮았던 서른 백수는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글감은 빤했다. 성공담도, 달큰한 연애담도 쓸 수 없으니, 그가 끼적인 건 그의 기억 속 지난날들이었다. 그렇게 헤집은 추억 속에서 그는 자신의 영혼에 자양분을 뿌려준 ‘그 시절’ 대중문화에 천착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시공간 속에 웅크린 수많은 문화 기호들.

영화 <섬머타임 킬러>의 청순 미녀 올리비아 핫세. 아련한 멜로디로 귀를 적셔주던 존 덴버. 그리고 진추하, 장현 등등. 답답한 현실에 갇힌 청춘의 영혼을 단박에 무릉도원으로 띄워주던 수많은 무협지. 무엇보다도 특유의 괴조음으로 모리배들을 물리치던 ‘우리들의 영웅’ 브루스 리(이소룡)까지.


196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를 성장기로 관통한 동년배들을 시인 유하는 ‘이소룡 세대’라 명명했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국가동원체제 속에서 성장해, 5월 광주로 스물 청춘을 맞이한 가장 정치적인 세대. 그들이 정치의 격랑 속에 휩쓸려 들어간 1980년대 이전의 역사를 유하는 이소룡, 올리비아 핫세, 크리스 미첨, 세운상가의 불법 복제물, 무협지 등등의 다양한 창을 통해 반추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 기억은 추억으로 윤색되어 감미롭다. 나이 서른이 넘어 기성세대에 편입되어버린 ‘어른 소년’ 유하의 퇴행 욕망은 어른 되기 이전의 아름다운 시절을 끄집어냄으로써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늦추고자 하는 것으로 작동되었으리라. 하지만 그 안에는 그 시절 대중문화 히어로들을 통해 시대의 맥락을 읽어내고자 하는 인문학적 치열함 또한 자리하고 있다. 





퇴행성과 지성의 부조화. 키치스러움과 진중함의 어색한 동맹. 이 모순 속에서 문장은 유려하게 피어난다. 술술 잘 읽히고 가슴에 쏙쏙 박힌다.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낸 시절이 아님에도 유하의 타임슬립이 마치 10년 주기의 평행이론처럼 나같은 1970년대생의 추억마저 자극한다.

이소룡 세대는 ‘서태지 세대’로 치환되고, 이소룡은 주윤발로, 쌍절곤은 쌍권총으로 대체된다. 올리비아 핫세는 고소영의 얼굴과 스타일로 뒤바뀐다. 세운상가 불법 복제물 그리고 도색잡지는 무료 다운로드 사이트로 깔끔하게 체인지!!

껍질은 변했으나 추억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MZ세대들도 추억하는 대상만 다를 뿐 나이 서른의 문턱 너머 껴안게 될 추억의 아련함은 이전 세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그들도 언젠가는 먹먹한 마음을 담아 BTS나 블랙핑크를 회고하겠지…).

그러므로, 우리 이제 추억하는 걸 주저하지 말자. 추억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니까.

유하의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는 ‘뒤돌아 보는 자’의 굽은 척추를 곧추세워 주는 멋진 선언문이다.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미래는 현실 속의 나에겐 아직 고정화 된 관념이고 어느 정도 읽혀진 정보 그 자체이다. 그러나 추억의 이미지란 고정된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담는 자의 마음의 모양에 따라 수시로 변화되는 액체성의 풍경이다. 그리고 현재를 다양한 모습으로 비춰볼 수 있는 살아있는 거울이다. 

-위의 책 7-8쪽


1995년 출간된 이 책은 지난 2012년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데 제목이 바뀌었다.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로.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이전 제목보다 감흥이 훨씬 떨어진다. 그래서 1995년 낡은 버전 읽기를 권한다. 훨씬 맛깔난다. 유하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와 시집 <무림일기>를 이 책과 동시에 감상하면 더 좋다. 추억의 극장으로 향할 때 들고 가면 좋을 삼단 콤보! 와… 이 정도면 정말 고급 정보 아닌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