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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다시, ‘좋은 도시’를 생각한다.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
이휘현(2020-01-15 10:26:41)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만다라> 앞부분에는 전주 한벽당이 나온다. 두 주인공 법운(안성기 분)과 지산(전무송 분)이 걷는 철길 위에 한벽당이 떡 하니 놓여있는 것이다. 지금은 한옥마을에서 전주생태박물관으로 향하는 지점 중간에 위치한 고즈넉한 굴로 자리하고 있지만, 이곳에 가본 사람들은 다 안다. 한때 전라선 철길이 이 한벽당 아래 굴을 관통해 갔다는 것을.
영화 <만다라>는 그 까마득한 기억의 순간을 동영상으로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1980년 겨울에 촬영된 영화이고, 전주역이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 1981년 5월의 일이니,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본의 아니게 전주시민들에게 좋은 영상 사료(史料)를 하나 남겨준 셈이 된다.


그 한벽굴에서 치명자산 앞을 지나 색장동으로 향하는 길은 옛 기찻길의 기억을 머금은 채 지금은 멋진 산책로로 변신해 있다. 한편 그곳으로부터 전주의 구시가지 쪽으로 옛 기찻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동네가 있는데, 바로 선미촌이다. 이곳은 전주시민들 대다수가 알고 있듯 아주 오랜 시간 사창가 골목으로 밥벌이를 해왔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곳이 ‘둑 너머’라 불리었다. 아마 옛 전주역 기찻길 옆으로 둔덕이 길게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옛 전주역 자리의 역사(歷史)를 가장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곳이 이곳 선미촌인지도 모를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들어오는 자와 떠나는 자가 교차하는 곳에는 매음(賣淫)이 자리를 잡았는데, 옛 전주역 자리에 자생한 선미촌은 역이 자리를 옮긴 뒤에도 그대로 남아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곳 선미촌이 바뀌고 있다. 전주시가 한옥마을을 비롯해 노송동 경원동 등을 아우르며 추진 중인 백만 평짜리 원도심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날개를 달기 위해서는 선미촌이라는 족쇄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크게 박수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지켜보는 내 마음에는 기대만큼 우려도 적잖이 자리 잡고 있다. 향후 선미촌이 새롭게 갖출 공간의 마스터플랜이 확실히 서있나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서울의 미아리나 청량리처럼 재개발사업을 통해 아파트촌이 또 하나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 것이다. 도시의 그늘을 하나 지웠으나, 기껏 그렇게 해서 볕이 든 곳에 자본의 또 다른 욕망을 이식시키다니! 선미촌이 제2의 미아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전주시가 많은 고민을 해야 할 텐데, 과연 그런가?


죄송스럽지만 이런 의문을 갖는 데에는 전주역 앞 첫마중길에 대한 나의 실망이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첫마중길 조성 계획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왔다. 하지만 정작 길이 만들어진 후 운영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한 마음 지울 수 없다. 첫마중길이 예쁘게 생겨났다고 전주의 첫인상이 좋아졌나?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본다. 문제는 그 길 내부를 채울 콘텐츠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에서 터져 나왔다. 첫마중길이 조성되었다고 해도 그 길가 주변의 상가들이 크게 탈바꿈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형 나이트클럽 건물이 위용을 뽐내고, 길 요소요소에 마사지(안마)를 빙자한 퇴폐업소들이 눈에 많이 띈다. 1킬로미터 가까운 산책길을 걸으면서도 첫마중길 내부에 시선을 돌릴만한 콘텐츠가 없다 보니, 관광객들이 그 길을 걸으며 보게 되는 건 엉뚱하게도 길 바깥의 퇴폐업소인 것이다. 전주의 첫인상이 ‘퇴폐’라니! 이게 바로 전주역 첫마중길의 아이러니다.


결국 도시 공간을 바꾸기 위한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그 안을 채울 확실한 콘텐츠와 차별화된 마스터플랜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 첫마중길의 교훈이 말해준다. 그리고 그 콘텐츠는 어느 도시에서나 엇비슷하게 엿볼 수 있는 상투성을 뿌리치고 그 공간만의 고유한 공기를 주입시켜야 한다. 오직 전주 첫마중길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풍경, 그리고 분위기. 첫마중길의 이 긴급한 숙제는 아직 풀리지 않은 듯 보인다.


모처럼 또 하나의 도시 역사를 만들어가는 선미촌 도시재생사업도 마찬가지다. 첫마중길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면, 선미촌이 가진 지정학적 위치(전주한옥마을과 구도심을 잇는 가교)를 고려한 후 그에 맞는 선미촌만의 콘텐츠를 알차게 채워야 한다. 선미촌의 성공이 전주가 추진하는 도시재생사업의 키워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런 관심과 상상력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한 권 추천하고 싶다. 건축학자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가 바로 그것이다. 유현준은 한 케이블채널의 교양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나는 2년 전 이 지면에 그의 전작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소개한 적이 있다(그 글에는 전주역 앞 첫마중길에 대한 나의 기대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를 다시 이 지면에 소환하는 이유는 하나다. 이 도시와 공간을 바라보는, 또 욕망하는 사람들의 부박한 시선에 그간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도시를 욕망의 용광로로 바라본다. 끊임없이 조성되는 신도시와 그 화려한 지반 위에 솟아나는 고층 아파트는 순정한 욕망의 대상이다. 어쩌면 20세기 중후반을 관통하며 한국 사회를 부화뇌동하게 했던 각개약진의 신화는 이제 이 아파트 신드롬 속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다리가 걷어차인 와중에 그나마 나에게 든든한 물적 자본이 되어줄 것이란 환상을 좇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델하우스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 숨 막히는 광기 속에는 어떠한 인문학적 숨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도시는 그렇게 비대해지고, 또 그만큼 멍들어 간다.


유현준이 대중적 필력으로 술술 풀어가는 글의 행간 속에는 이 왜곡된 욕망으로 뒤뚱거리는 도시괴물을 향한 비수들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살기 위해 만든 공간이 어느샌가 살아내야만 하는 공간으로 기괴하게 변해버린 현실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풀어내고 그 대안이 될만한 도시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던져준다. 여러 도시의 흥망성쇠를 분석하며 인간에게 진짜 행복한 도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고민에는 과하다는 말이 필요 없다. 듣고 들어도 또 들어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유현준을 이 지면에 다시 소환한 이유다. 나는 전주시민들이, 아니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그의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그 고민의 결과물들이 도시의 숨결이 되어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으면 좋겠다._이휘현 KBS전주 PD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
지은이 유현준
출판사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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