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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 | 특집 [‘조국 사태’와 조선일보 증후군]
우리는 아직도 파시즘의 쓰나미 속에 있다
이진경(2019-10-15 14:21:33)



이것은 일종의 기적 아닌가? 120만 건을 상회하는 기사가, 한 달 남짓한 시간 사이에 어떤 한 사람에게 바쳐졌다는 것이니. 아무리 축소하고 겸손하게 말해도 최소한 언론의 역사상 최대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대부분 그 사람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이었으며, 사실 확인을 한다거나 상반되는 얘기라면 양쪽 얘기를 듣고 게재한다거나 하는 기본적인 일도 생략했을 뿐 아니라, 사실을 초과하는 의견이나 평가를 전면에 내걸고, 종종 가짜뉴스마저도 거의 모든 매체들이 만들어내는 사태. 언론의 역사에 언제 이런 일이 있었던가?


물론 우리는 이와 유사한 사태를 이미 십 년 전에 겪은 바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조롱의 기사들이 한 달 사이 30만 건을 상회하며 급속히 쏟아져 나온 사태를. 기사들이 써지던 방식도 아주 유사했다. 전 대통령을 자살로까지 몰고 갔던 '논두렁 시계'는 언론사나 기자들에겐 최악의 오명이 되었고, 기사를 보고 읽는 대중들에겐 '그들'을 결코 고지식하게 믿어선 안됨을 환기시키는 사이렌소리가 되었다. '기레기'란 말이 만들어져 널리 사용되게 된 것은 바로 이를 계기로 해서였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지나간 모든 것은 어느새 잊혀지고 말아서일까? 아니면 그 치명적인 사태의 교훈조차 눈앞의 목표 앞에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일까? 십 년 전의 비극을 초래한 끔찍한 사태가, '논두렁 시계'를 상기시키는 지적마저 뭉개버리며 몇 배 증폭된 형태로 집요하게 지속되고 있다. 정말 비극적 '결말'을 볼 때까지 밀고 가려는 것처럼 보여, 섬뜩한 악의적 감정마저 느껴진다.


이런 사태를 볼 때, 우리는 어느새 <조선일보>를 떠올린다(요즘은 종편까지 더해졌으나, 이름은 이 하나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때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가장 앞장서 공격적 기사를 쓰고, 일방적(편파적!)이고 감정적이며 확인되지 않은 기사를 써갈기는 사태의 전위는 언제나 <조선일보>였다. 사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조선일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차라리 그러려니 싶다. 오히려 놀라운 건 다른 매체들, <조선일보>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매체들은 물론 심지어 반대 성향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향신문>이나 <한겨례신문>, <JTBC>마저 <조선일보>의 기사형식을 빼다 박은 동형적인 기사들을 동일하게 양산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한 곳에서 시작된 어떤 증상이 옆에서 옆으로 감염되어 가며 유사한 증상들을 증식시키며 하나로 묶일 법한 거대한 증상군을 만들어가는 것 같다.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유사하거나 연관된 현상들이 모여 하나의 두드러진 증상군을 형성할 때 의사들은 '증후군(syndrome)'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유도 모르고 의식하지도 못한 채 유사한 양상의 기사들이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며 생산되어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현상을, 그 발원지의 이름을 따서 '조선일보 증후군'이라고 하면 어떨까?


어떤 지점에서 발생한 일이 옆에서 옆으로 분자적으로 감염되며 유사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집합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대중'이 그것이다. 촛불대중도, 혹은 일베-대중도, 메갈리아-대중도, 워마드 대중도 형성되고 작동하는 양상이란 점에서 보면 모두 이렇다. 그런데 그렇게 형성된 대중이 어떤 긍정적 생성의 힘을 결여한 채, 단지 혐오나 비난의 부정적 감응 속에서 파괴와 죽음의 선을 그리는 경우가 있다. 옆에서 옆으로 감염되며 누군가를 파괴의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런 사태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전체주의와 구별하여 파시즘이라고 정의했던 들뢰즈/가타리라면, 이 '조선일보 증후군' 속에서 정확하게 파시즘의 징후들을 읽어냈을 것이 틀림없다. 맞다, 파시즘이다. 언론-파시즘이다. 누군가 죽거나 망가져 더는 회복할 수 없을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위선'이니 뭐니 하며 감정을 자극하는 도덕적 비난을 사실인 양 기사로 써대며 거의 일치단결하여 동일한 스타일로 대규모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 정확하게 그러하다. 사실보다 중요한 건 '적'이라 믿기에 그를 공격하는데 필요하다면 어떤 것도 유용하다고 믿고, 유용하다면 그게 사실인지 애써 확인할 것도 없으며 상대방의 반론은 무시하고, 자신들이 확산시킨 주장들을 '여론'이란 이름으로 내 주장에 얹어, 최종적 섬멸을 향해 오직 한 길로 매진하는 저 120만 기사들, 그것은 분명 '파시즘'이란 말에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는 파시즘-대중이다.


창 대신 펜을 든 저 백만의 기자 하나하나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음을 알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저 무서운 파시즘적 쓰나미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각하지 못한 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종종 그것을 저지하려는 행동이나 그 대세를 거스르는 언행에 대해선, 얼마 전 <한겨레 신문> 일부 기자들이 그러했듯, '진실'의 이름으로 정색을 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동색(同色)의 기사를 쓰도록 재촉하는 이들은 그저 취재를 독려하는 자들로 보이고, '이건 아니지'라며 그 동색의 기사들을 제어하려는 이들은 '언론의 자유에 반하는' 자들로 보이는 것일 게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의 편에서 거짓을 폭로하는 비판을 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 쓰나미는 '최종 결말' 이전에는 멈출 줄을 모른다(노무현의 자살 뒤에야 <경향신문>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 그들은 자신이 표명한 그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할까? 혹시라도 '최종적 결말'이 나면 그때 다시 반성하는 사설을 쓸까? 불행하게도 이젠 그마저 쑥스러워 쓰지 않을 것 같다). 증후군을 이루는 동색 기사들에 대한 저지는 진실을 은폐하려는 편견이자 문제가 되는 자를 '편드는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그들은 '진영논리'라는 이름으로 비난한다. 누군가를 편들기 위해 사실 대신 변호론을 펴는 '진영론'이라고. 바로 그것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바임을 알지 못한 채, 역으로 자신의 '상대편'에게 쏘아대는 것이다. 완전히 전도망상(轉倒妄想)이다.
이 전도망상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그들의 전위가 갖는 탁월한 프레이밍 능력 덕분이다. <조선일보>식 프레이밍. 내가 보기에 이는 세 가지 반어적 형식의 전략으로 직조된다. 진영론자의 진영론 비판, 반도덕적 도덕주의, 허구적 사실주의가 그것이다.


공격하는데 필요하다면 어떤 것도 유용하다고 믿고, 유용하다면
그게 사실인지 확인할 것도 없으며 '여론'이란 이름으로 내 주장에 얹어,
섬멸을 향해 매진하는 저 120만 기사들, 그것은
분명 '파시즘'이란 말에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진영론자의 진영론 비판

진영론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누구 편인가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진영론은 진영대결이 표면화되기 이전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사태를 포착하고 그에 접근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 태도의 요체를 누구보다 명확히 보여준 것은 나치의 계관정치학자 칼 슈미트였다. 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란 무엇인가를 묻고 이렇게 답한다.


"정치란 적과 동지를 가르는 문제다."


세상 사람을 적과 동지로 가르려는 태도, 그게 바로 진영론이다. 문제가 되는 누군가를 적인지 동지인지 먼저 판단한다. 동지라면 최대한 지지하고 방어해주는 기사를 쓰고, 적이라면 박살내줄 것을 찾아내고, 없으면 만들어서라고 공격하는 기사를 쓴다. <조선일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이것이고(그들의 기사는 언제나 '아(我)/타(他)'가 분명하다), <조선일보>가 이번 사태에서 가장 빠르게 선방을 날리며 일을 시작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노무현도, 조국도, 사태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들에겐 명확하게 적이었다.


누군가 편을 가르는 순간, 관련된 자는 모두 갈라진 편의 한 쪽에 서게 된다. 진영을 가르는 행위 자체는 모두를 어느새 그중 한 진영 속에 서게 한다. 진영론은 세상을 적과 동지 둘로 가르기에, 당연히 반대편으로부터 대칭적인 공격을 받게 마련이다. 내가 누구를 적으로 삼는 순간 상대편은 그를 동지로 삼을 것이고, 반대도 마찬가지니까. 이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적으로 설정한 대상에 유리한 기사라면, 그게 심지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를 편드는 기사'라고 비난하는 것이다(사실을 캐서 반박하는 것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방법인가!). 자신이 행하는 진영론적 태도를 자기 아닌 모든 이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물론 자기 적을 비난하는 기사는 그를 '편들지 않는 기사', 따라서 '공정한 기사'라고 간주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인물에게 유리한 기사를 쓰면 '편드는 행위'가 되기에, '공정한 기사'를 써야 한다는 직업적 정의감은 '편들지 않는 기사'만이 공정한 기사라는 환상에 포획되고 만다. 모든 게 양분된 진영론의 전선에서 '편들지 않는 기사'란 비판하는 기사일 수 있을 뿐이다. 이로써 공정한 기사를 쓰려는 정의감은 어느새 누군가를 적으로 모는 공격에 가담하게 된다. 어느새 그를 적으로 모는 편에 가담하게 된다. 가장 편파적인 진영론자가 진영론 비판의 고지를 선점하고, 공정한 기사를 쓰려는 이들을 명목적인 진영론 비판 아래 실질적 진영론자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반도덕적 도덕주의

<조선일보>가 자신의 적들, 특히 '진보'를 자처하는 적들을 공격하는 가장 통상적인 논리는 '도덕주의'다. '진보'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개 과거에 '기득권을 내려놓고 대의를 위하여' 살았던 경력이 있고, 또 그런 태도를 옳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파에게서 흔히 보이는 부패와 대비되어 도덕적 우월성을 장악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래서 종종 '진보주의자'는 도덕주의가 자신의 강점이라고 믿기에, 스스로가 도덕주의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태도는 역으로 진보파인 누군가에 대해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면 그에 대해 같이 맹렬히 비판하거나, 진보파를 구하기 위해선 그에게 등을 돌려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조선일보>는 도덕주의자의 이러한 성향을 잘 안다. 그것이 강점일 뿐 아니라 약점임도 잘 안다. 진보주의자의 도덕주의를 약점으로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문제가 되는 어떤 진보파 인물에 대해 그의 도덕적 약점을 찾아내 공격하면 된다. 그들은 이를 위해 도덕주의를 비판의 무기로 든다. 그 비판의 칼로 진보파 속내를 깐다. '너도 까놓고 보면 나와 다를 바 없는 더러운 놈이야!'


이러한 종류의 비판은 명백히 도덕주의적 형태를 취하지만, 이는 도덕을 권장하고 도덕적 사회로 가자고 주장하기 위한 게 아니다. 반대로 도덕 타령하는 놈들도 알고 보면 다 속이 시커면 위선자니, 그저 솔직하게 까놓고 살자며 반도덕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다. 반도덕을 위한, 반도덕적 도덕주의다. 이러한 도덕주의도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이의 속내를 까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낸다'는 환상에 들어맞는다. 이 환상 속에서 진실에 대한 추구는 '너도 알고 보면 그렇고 그런 놈이지'를 향해 나아가는 데 발걸음을 맞추게 된다. 가려진 미덕을 찾는 것은, 그게 진실이어도 누군가를 '미화하는 기사', 속에 숨은 악덕을 감추는 기사, '위선을 편드는 기사'가 된다. '진실을 밝혀라'라는 정언명령은 이제 감추어진 "반도덕과 위선을 까발려라!"가 되고, 그걸 한 건 하는 것이 진실의 수호자인 듯한 환상을 제공한다. 모두가 달려들어, '진실성'의 깃발 아래 '너도 이런 짓 했잖아!'라며 신상을 털게 한다.


허구적 사실주의

이런 전략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누군가의 위선을 폭로하고 반도덕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사실을 반대편에 유리한 사실까지 애써 찾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한 자신감이 생겨난다. 문제 인물은 어느새 도덕적 위선을 까발려야 할 '적'이 되었기에, 포착된 정보가 정말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위선을 까발리는 것이니, 까발리는 기능을 하면 충분하다는 묵시적 믿음이 공유된다. 더구나 사실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은, 더구나 속보경쟁을 해야 하는 '전쟁터'에선 한가한 요구라고 간주되기 십상이다. 대충 비판의 단서나 의혹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도덕적 위선이란 심증을 갖게 되면, 약간의 의혹마저도 위선의 증거라는 믿음으로 쉽게 이어지고, 의혹에 대한 반문은 위선의 혐의에 '쉴드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제는 위선의 증거라는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그 의혹이 사실임을 어떻게든 '증명'하려 하게 된다. 이 '증명'은 의혹에 대한 의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걸 지우며 간다. 의혹을 반박하는 것은 그의 일이지, 숨은 '진실'을 폭로하려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믿음이 당연한 것이 된다. 이런 믿음은 자신이 포착해서 글로 쓰는 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라는 믿음을 만들어준다. '진실을 보도 하라!'는 정언명령이 '속내를 까발려라!'가 되었기에,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나 의혹을 통해 속내를 사실처럼 구성하는 것이 실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의혹에 심증을 더해 만들어진 허구는 이제 '진실'이 된다. 많은 경우 잘 만들어진 허구는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고 진실보다 훨씬 더 진실 같다. 사실이나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잘 만들어진 허구는 시간이 지나도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음을 문학의 역사는 보여준다. 더구나 인용할 수 있는 유사한 기사의 수가 120만 건 정도 되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허구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살아남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전략으로 만들어진 사건화의 프레임이 이번의 '조국 사태'에서처럼 효과적으로 작동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120만 건의 과도함이 전면화되고, 기사들의 일방성이 문제가 된 다음에도, <조선일보>는 물론 다른 매체들이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그다지 진지하게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신문> 신진기자들이 오히려 이 편파적인 기사들을 '진실'이란 이름으로 옹호했던 것은 <조선일보>가 만들어낸 이 프레임 안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특정인을 '편들지 않는' 기사, 위선의 장막 뒤에 숨은 '진실을 폭로하는' 기사, 그렇기에 심증이 사실보다 더 일차적인 기사들의 '진실성'을, 자신들의 '비판적' 기능을 믿고 있는 것일 게다. 편파적 공격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공정성'이고, 허구적 사실주의의 가장 중요한 식량은 '진실성'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이런 일은 이후에도 다시 반복될 것이다.


청문회가 끝나고 보통 같으면 시효 만료로 인해 잦아들기 마련일 비난의 기사들이 그치지 않는 것은, 조국을 '주적'으로 설정한 또 하나의 조직에 의해서였다. 조국이 표명한 검찰개혁의 깃발 뒤에는 문재인이 있고, 그 문재인의 가슴 속엔 노무현이 있음을 잘 알기에, 이번의 검찰개혁을 무산시키는 게 이전 어느 때보다 쉽지 않음을 직감한 이 나라의 '실세'들. 그들 역시 <조선일보> 식 프레이밍에 친숙하다. <조선일보>와 친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검찰이란 포지션 자체가 문제가 된 누군가(피의자)가 '범죄자'임을 입증하는 것을 업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손에 걸린 자는 누구나 이 사회의 '적'을 가정된다. 즉 이 사회의 정의를 집행한다고 믿는 그들의 '적'이다. 진영론의 검찰에겐 일종의 '선험적 판단형식'인 것이다('선험적'이란 '경험 이전의', '경험적 사실을 선규정하는'이란 뜻이다).


잘 만들어진 허구는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고 진실보다 훨씬 더 진실 같다.
인용할 수 있는 유사한 기사의 수가 120만건 정도 되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허구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들은 '많이 해봐서' 잘 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음을. 그러나 종종 털어도 먼지가 별로 안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조사한 사건과 무관한 것을 걸어서라도 범죄자화한다('별건수사', '별건 구속'이라 한다). 그것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비법적인--'불법적인'--전술을 사용한다. 법을 다룬다고 법만 다룰 줄 안다면 목표를 이루기 어려운 때가 있음을 그들은 잘 알기에. 그래서 이번에 보았듯이 위법의 '혐의'('의혹'이란 뜻이다!)와 도덕적 비난을 야기할 '사실'들을, 비법적인(불법적인!) 방법으로 언론사를 골라가며 흘려준다. 이미 수십 곳을 압수수색하여 수사한 검찰이니 그들이 흘려주는 것은 '진실'일 거라는 순진한 믿음은 취재하는 기자들의 '선험적 판단형식'이 된다.


이 두 개의 '선험적 판단형식'이 결합되면, 경험적 확인 이전에(즉 '선험적'으로) 그 '사실'이 이미 '진실'이라는 '선험적 판단'이 발생한다. 더구나 검찰발 기사니 입증책임을 기자가 질 일도 없다. 이로써 수사를 하는 검사와 거기서 흘려주는 걸 받아 적는 언론사의 동맹은 어떤 경험적 진실도 '선험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허구를, 사실보다 강력한 허구를 양산한다. 그것이 진실임을 믿기에, 기자들은 '진실을 알 권리'를 그 허구의 공장 앞에 내건다. 청문회 마지막 시간에, 흔하디흔한 표창장 위조를 이유로 써진, 관련자 대부분이 특정되지 않은 다섯 줄짜리 공소장은 '조국 사태' 2회전을 위해 언론사를 다시 불러모으기 위한, 정말 보잘것없는 미끼였다. 그러나 카뮈 소설에서처럼, 페스트균으로 가득 찬 대기 속에서는 이 보잘것없는 바늘로 긁은 상처마저 치명상이 될 수 있음을 검찰도 기자도 잘 안다. 그 치명상에 대한 기대가 그들을 다시 묶어준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나왔던 120만 건의 기사를 검찰이 수사하고 확인하는 형식으로 재생산되기 시작한다.


이 모두가 '진실'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도덕'의 깃발 아래 이루어진다. 그 깃발 아래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도 끔찍하게 여겨 비난하는 나치의 인종주의도 생물학적 진리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고, 참혹한 분서갱유도 도덕주의의 깃발 아래 행해졌음을 우리는 안다.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해보는 것이다. 그런 의심을 잊었을 때 '진실'은 가장 효과적인 허구가 된다.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로 나타나면 그것은 이미 효력이 다한 것이다. 파시즘이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날 때, 그것은 대개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파시즘이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파시즘인 줄 모르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덮쳐올 때다. 덮쳐와도 모르는 채 휩쓸고 가는 쓰나미, 이것이 가장 무서운 파시즘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 쓰나미 속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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