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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 | 연재 [유주환의 음악 이야기 ⑤]
"파가니니, 아멘!"
유주환(2019-05-31 15:40:34)



연주회에 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는 바대로, 연주회란 음악을 연주하는 모임이며 공개를 목적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서양음악 연주회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구별된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9세기 이전의 연주회는 작곡가가, 먹고살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푼 귀인에 헌정하는 음악 이벤트입니다. 본래 나를 향한 찬사는, 쟤도 함께 들어야 제 맛이니 친구도 불러 모으고, "저 음악이 내게 헌정된 것이라네," 잘난 체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엄선된 이들과의 특별한 자리이니 그날 초대된 만으로도 권력이었으며, 그 연주에 넓은 공간이나 무대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부터의 연주회는 개인 맞춤형이 아닌, 약간의 돈으로 티켓을 구입하신 분 모두를 귀인으로 삼는 방식입니다. 물론 거기에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먹고 살기 급급했거나 음악과 영 데면데면할 분은 빼고, 적당한 교양과(척이라도 했거나), 십시일반 정신의 입장료를 지불할 만한 중산계급, 그것이 19세기 이후 연주회의 청중입니다.


중산이 새 시대의 고객님으로 자리 잡을 수 있던 배경에 군주제의 붕괴가 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후 시절이 하 수상하던 터라, 연주회 따위에 올동말동해진 귀족의 틈을 이들이 메우기 시작한 겁니다. 어떤 이들은 무대 위 음악을 가정에 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귀족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그들은 자녀에게 악기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대량 생산 탓에 저렴해진 피아노와, 바이엘, 부르크밀러 같은 대중 교재, "나는 없이 사느라 배우지 못했지만 우리 애 만은······"이라는 회한이 교육으로 이어져, 있는 집 애들 레슨이 음악가의 생계수단으로 자리 잡습니다. 


일단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어제까지는 객석의 아빠 미소로 환대하던 중산이, "······나도 좀 알거든," 선무당으로 변해 음악가의 염장을 지르게 됩니다. 당시 연주자를 그저 그런 수준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구태만으로는 풀칠하기 어려울 험한 세상을 맞이하게 됩니다. 프로 음악가에 동반되던 같잖은 평이 과거에 없던 것도 아니었고, 어쩌다 내 음악에 내려지는 허세에, "네 전하, 과연 지당하십니다." 조아리면 그만이었지만, 지금껏 프로였던 이들의 음악을 불특정 중산이, 그것도 떼로 물어뜯기 시작하니, 이 난국을 타계하려면 프로는 더 프로로, 전설로도 되어야 했습니다. 전설이 되려면 오디션 프로그램의 가수처럼 맞춤형 스토리도 있어야 했는데, 예를 들어 '악마와 호형호제' 한다거나, "저 인간, 사람도 몇 죽였다." 같은 괴담도 필요합니다. 거장성virtuoso이 그 시대의 전유물은 아니었지만, 19세기 음악을 이해하려면 이를 좀 살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르투오소라는 찬사를 몸에 두르고 다녔던 음악가들은 구별되었고, 자기 초상과 자아의 선언이 분명한 이들입니다. 니콜로 파가니니는 그 마케터 중에서도 갑입니다. 으뜸의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악마와 결탁하고, 사람도 죽인 불한당이라는 소문을 몰고 다녔습니다. 그 추문의 파장은 그가 죽어서도 계속되었고 교회는 파가니니의 장례를 오랫동안 거부했습니다. 

파가니니를 스캔들로만 기억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역사는 그를 19세기의 '현상' 하나로 삼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파가니니의 음악은 일반의 빠른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모두가 그의 무대를 경험하려 했고, 악마적인 매력에 경도되었습니다. 연주가가 당장의 인기를 획득하려면 조건 몇 가지를 만족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기교가 폭발적이어야 합니다. 파가니니는 가늘고 긴 손가락, 현란한 몸짓, 특유의 매너로 청중을 압도했습니다. 누구는 이를 '파가니니 현상Paganini phenomenon'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무대에 경악했으며, 추종하거나 저주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깊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내가 제2의 파가니니가 되겠노라," 선언하기도 합니다. 그 따라쟁이 중에 리스트와 슈만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하나. 그 줏대 없던 아멘족이 파가니니를 롤 모델 삼은 이유가, 결코 파가니니의 음악이 아니었다는 점. 대신에 흠모한 것은 작두무당 같던 파가니니의 '무대'였다는 점입니다. 빠른 인기를 획득하기 위한 조건이 또 있습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의 흡수력이 높아야 합니다. 대중친화라는 말로도 통합니다. 기교가 뛰어나도 음악이 어렵다면 공감을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저는 음악 문장의 편안한 설계가 조건의 하나라 생각합니다.


낱낱의 말이 편안한 문장이 되려면, 먼저 그 문법이 명쾌해야 합니다. 음악 문법에서 중요한 화음은 으뜸화음과 딸림화음입니다. 이 화음들의 위치를 문법상 안전하게 설정하는 것이 편안한 음악의 시작입니다. 으뜸화음은 화음의 맏이입니다. 글과 말에 '맺음'이 중요하듯 음악도 맺음이 중요하며 으뜸화음이야말로 맺음에 기여합니다. 예를 들어, "네가 가는 길에 꽃을 겁나게 뿌리겠다."라는 말이 있다고 칩시다. 여기서 "다"로 인해 문장은 종결됩니다. 이 맺음의 역할을 하는 음악 말이 으뜸화음입니다. 이때, "겠다"의 "겠"이 하는 기능을 음악과 비교하자면 딸림화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겠"은 제 혼자 기능하는 법이 없고, "다." 앞에 꼭 붙어 서서, 문장을 맺고 주어도 설명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뜻을 전달하기로는 이런 식의 말만큼 효과 만점인 것도 드물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말하려 한다면, 화를 내거나 위협하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요? 언사가 담백하다 못해 건조하기 때문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술이 간략하고 분명한 음악 문장은 이해하기 쉽지만, 메마르거나, 뻔한 음악이 될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유행가 가락이 그런 예입니다. 청중이 파가니니에 환호한 이유 중에, 그 음악의 문법적 설계가 지나치게 명쾌하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는 음악을 종종 "네가 가는 길에 꽃을 겁나게 뿌리겠다."라는 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이의 시심은 이를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진달래 꽃, 김소월),"라고도 표현하는데 말이죠. 작곡가 이자이Ysaÿe는, 그래서 "파가니니에 알맹이는 없다,"라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파가니니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또 있습니다. 그가 '호흡 맞춤형 음악'을 구사하던 작곡가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탈리아는 노래가 강한 나라입니다. 오페라의 발상지이며, '노래+간단한 반주'라는 마드리갈, 칸초네타가 유행하던 곳입니다. 노랫말은 결국 시인데, 시는 운율을 따르고, 운율은 호흡을 바탕한 말의 유희이니, 노래 음악이 그 호흡을 따르는 것은 매우 응당합니다. 호흡은 자연의 것이며 그 양과 방식과 주기는 어느 사피엔스를 불문합니다. 악구의 기본을 '보통 속도moderato'의 4마디로 삼은 데에는 인간의 호흡에 충실했던 노래 문화를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파가니니가 이탈리아 노래 전통에 충실하고 있는가. 이에 관한 저의 대답은 과연 그렇다, 입니다. 생전의 그는 기타 연주자이기도 했습니다. 기타란 주인공과 동거하는 겸손한 조력입니다. 그런데 노래와 반주, 이 두 매체에 의지하는 상상력이라는 게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그 이원적 사고를 바탕한 음악이 파가니니입니다. 작곡가의 주력 악기는 그 음악 생각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피아노 없는 쇼팽을 상상하기 어렵듯, 기타를 밀어내고 파가니니를 이해하려는 것은 그를 반만 이해하는 셈입니다. 


파가니니는 여전히 위력적이며 전 세계에서 매일 연주되고 있습니다. 그 위력의 뿌리는 그가 19세기의 작곡가였다는, 타고 난 운으로부터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연주회가 격변하던 때의 작곡가였다는 운, 신비주의 시기의 작곡가였다는 운, 대중화로 인한 문화 평준에 걸맞은 작곡가였다는 운, 근대적 음악 교육 시기의 작곡가였다는 운, 모두가 다 천운입니다. 이 운세의 지경에 그는 작품 하나를 더합니다. 바로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24 Caprice, Op.1>인데요. 이 작품은 연습을 목적한 교육용 작품 중에서도 귀감입니다. 저는 역사에 살아남은 작곡가에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작품성으로 승부를 본 작곡가 그룹 하나와, 역량은 좀 떨어지지만 대신 중요한 연습곡을 남긴 작곡가 그룹으로 말입니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등을 그 먼저의 예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초중고 음악실에서 조차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포퍼(1843-1913), 세브직(1852-1934), 고도우스키(1870-1938) 등은 그 후자에 속합니다. 음악실에서 이들을 찾기란 어렵지만 전문 음악 교육과정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연습곡 작곡가들입니다. 파가니니도 과연 그렇습니다. 이 후자들이 모두 19세기 사람들이라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여러 의미에서 19세기는 지금의 우리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바이엘, 체르니, 하농이 작금의 연습곡으로 여전하다는 것은, 우리 음악교육의 바탕이 그때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19세기에 파가니니가 살았습니다. 만일 그가 백 년을 앞서 살던 작곡가였다면 누리기 어려웠을 호사는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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