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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 | 기획 [우리 음악의 꽃, 산조]
과거와 현재, 치열한 고민 속에서 영글 소중한 소리
이동혁, 김하람(2019-10-15 14:04:50)

반주 악기 하나만으로 완성되는 텅 빈 듯 속이 꽉 찬 산조, 스승의 곡을 제자가 받아 연주하는 그 과정 속엔 삶과 호흡이 담기기 마련이다. 악보만을 남기는 서양 음악과는 달리 구전심수를 통해 스승에게서 인생을 통째로 전수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조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음악적 기교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바뀐다고 했던가. 지금 이 시대 산조 연주자들은 과거와는 또 다른 변화의 과도기 속에 있다. 스승과 동거동락하며 수학하던 배움의 과정은 물론, 우리 소리를 지루하다 여기는 대중의 편견까지 바뀐 시대에 발맞춰 산조 역시 변화해야만 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로서의 음악이 아닌 이상 변화는 필연이다. 그것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그렇게 누적된 변화는 다시 새로운 전통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허투루 쌓이진 않는다. 변화엔 치열한 고민이 담겨야 하고, 그렇지 못한 변화는 결국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과연 우리 산조는 지금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 뿌리 깊은 전통의 맥을 온전히 잇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현재의 산조가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산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들여다본다.



산조, 과거와 지금 무엇이 다른가
현재의 산조를 살펴 보면, 과거와 비교해 몇 가지 뚜렷한 변화들이 눈에 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즉흥성'이다. 전통 사회의 산조 명인들은 오히려 고정 선율로 연주하는 것이 어려웠다. 전설적인 가야금 산조 연주자 서공철 명인은 탈 때마다 산조 가락이 달라 음반 녹음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서공철 명인의 스승인 정달영 명인 역시 고정 선율로 연주하지 않아 채보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자유로운 음악이었던 산조가 즉흥성을 잃은 데에는 서양식 오선 악보 사용의 이유가 크다. 전통 사회 명인들의 산조 가락은 연주자의 구성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데, 그중 한 번 연주한 가락을 채보하여 악보로 만드니 즉흥성과 다양함이 담길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서양식 악보를 사용한 산조 교육이 시작된 것은 1959년 서울대학교에 국악과가 창설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산조 교육은 점차 구전심수에서 악보를 통한 교수 학습 방법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서양식 악보 사용은 산조에 있어 일장일단의 선택이었다. 교육 부분에선 예습, 복습을 가능케 해 짧은 시간 내에 학습을 완수할 수 있게 했고, 음악의 구조 파악에도 용이해 우리 음악의 대량 확산과 보존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러한 순기능을 얻는 대신 산조는 자유로운 즉흥성과 탄력을 잃고 말았다.
서양식 악보 사용이 불러온 또 다른 문제는 연주자들이 창작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산조 연주자가 곧 작곡가였지만, 악보라는 틀이 만들어지면서부터 연주자들은 즉흥 연주가 어려워졌다. 나아가서는 악보대로 타지 않으면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까지 형성돼 결국 산조 가락의 재창조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지루하단 인식 바꾸기엔 우리 소리를 알릴 통로가 너무 적다
많은 사람들이 산조는 지루하다, 혹은 따분하다고 말한다. 왜 이런 인식이 생긴 걸까?
가장 큰 이유는 가요나 팝송의 확산과 함께 대중들이 빠른 음악에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 음악의 박자는 맥박이 한 번 뛰는 심장 박동을 기준으로 하여 한 박을 둘로 나누지만, 산조를 포함한 국악의 장단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개가 한 박을 이룬다. 때문에 한 박, 한 박이 서양 음악보다 느긋하고 여유로워 상대적으로 정적인 느낌을 주고, 애잔함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는 국악의 극히 적은 일면만을 바라본 편견일 뿐, 우리 음악에는 휘모리장단과 같이 빠른 장단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마냥 느긋하고 정적인 음악이 아닌 것. 그럼에도 우리 산조에 대해 지루하단 인상을 갖는 것은 자주 접해 보지 못한 이유가 크다. 통속적으로 알려진 이미지만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전체인양 일반화해 버리니 우리 음악 전공자들로서는 억울한 마음이 클 것이다.
최근에는 외국에서 먼저 주목하고 호평을 받는 젊은 산조 연주자들도 늘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 산조는 여전히 지루하고 어려운 음악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소리를 접할 통로가 압도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각 방송사마다 편성돼 있던 국악 프로그램도 이제는 거의 다 사라져 가요, 드라마, 예능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됐고, 전문 편성 채널로 하나쯤 마련돼 있을 법한 케이블 방송에서조차 우리 소리를 전문으로 다루는 방송이 없다. 국악이 민족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전통 예술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211개 전문 편성 채널 중에 국악 전문 방송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서양 음악은 '음악', 우리 음악은 '국악'?
산조가 시대에 발맞춰 변화하기 위해선 젊은 층 관객 유입도 필요해 보인다. 그들이야말로 앞으로 산조를 떠받칠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젊은 층에게 산조는 여전히 난해한 음악이고, 전공자가 아니면 새로운 20~30대 관객도 찾아 보기 힘들다.
젊은 층 관객이 적은 이유 중엔 각 중고등학교에서 이뤄지는 우리 음악 교육도 단단히 한몫한다. 음악 교과서에서 국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 정도지만, 정작 교육 현장에서는 이를 가르칠 인원이 없어 뒷전으로 밀리거나 간단한 설명만으로 대체되기 일쑤다. 산조를 가르치더라도 내가 국악 전공자가 아닌데 어떻게 가르치냐는 식이다. 이처럼 자라면서 산조를 제대로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낯설고 지루한 음악이란 편견에서 탈피하기도 쉽지 않다.
국민의 90% 이상이 국악의 유지, 보존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지만, 현실은 해금과 아쟁, 대금과 단소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가야금, 해금, 생황 등 우리 국악기보다 서양 악기인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더 친숙하게 여기지 않는가. 우리 소리, 우리 악기란 말이 참으로 무색해진다.
이런 문제는 우리 음악을 굳이 국악이라 칭하는 부분에서도 자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서양 음악을 '음악'이라 칭하고, 우리 음악을 '국악'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음악 교육이 얼마나 서양 음악 일변도로 이뤄졌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
서양 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올해로 약 130년이 됐다. 바꿔 말하면, 130년 전만 해도 음악이라 하면 당연히 우리 음악을 가리켰을 것이다. 발전적인 의미에서 다른 나라의 음악과 교류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외국의 음악을 배우는 것과 우리 음악을 뒷전으로 미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혹자는 "우리 것이라 해서 사명감이나 의무감으로 듣는 시대는 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싫다 해도 내 부모는 내 부모다. 산조는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이상 소중히 지켜 가야 할 우리 음악이다.


전통과 파격 사이, 산조 대중화에 대한 고민
우리 음악은 따분하다는 편견, 압도적으로 부족한 알림 통로, 서양 음악에 치우친 음악 교육까지, 산재한 문제들 앞에서 우리 산조는 과연 어떤 길을 모색하고 있을까?
산조의 대중화에 대해 알아 본다면, 국악방송이 주관하는 '21세기 한국음악 프로젝트'도 들여다볼만하다. 국악의 대중화, 현대화를 목표로 2007년부터 진행되어 온 21세기 한국음악 프로젝트는 매년 창작곡을 개발하고 신진 국악인들을 발굴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대회다.
실제 대회 영상을 보면, 이게 우리 음악인지 의심이 드는 대목도 아쉽지만 많다. 국악이 바탕임에도 뮤지컬인지, 무용인지, 재즈인지 정체성이 모호하고, 보기에 따라선 '파격'이 아니라 '파괴'로 비춰지기도 한다. 거기다 퍼포먼스에 치중하는 분위기까지 더해져 불편한 마음을 아주 숨길 수는 없지만, 보다 친숙하게 우리 악기와 음색을 대중들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선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듯싶다.
새롭다, 혁신적이다 칭해지는 모든 시도들이 그렇듯 낯섦은 어려움을 동반한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고 해도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자극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 산조 역시 똑같다. 싫은 것이 아니라 낯설어서 어려워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 소리에 대한 낯섦을 해소해 친숙함을 심어 주는 21세기 한국음악 프로젝트의 시도는 비록 그 틀이 전통적(대회의 정체성부터가 창작곡인 까닭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이라 말할 순 없더라도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선 충분히 평가의 여지를 남긴다.
21세기 한국음악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화려한 퍼포먼스, 크로스오버 프로그램, 창작곡 지향이 꼭 옳은 방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앞서 서양식 악보 사용이 일장일단의 득실을 가져 온 것처럼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통과 대중화, 그 사이에서 산조 연주자들은 지금도 옳은 길을 찾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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