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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 | 기획 [세상을 보다 재밌게 만드는 그들, 문화기획자]
부지런히 문화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들
이동혁(2019-11-15 10:23:40)



'문화기획자'란 직업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문화'가 가리키는  그 폭넓은 범위 때문이기도 하고, 공연, 전시, 무대 연출이라는 좁은 의미에서부터 예술과 소비자를 잇는 '매개자', 협상과 설득, 조정에 능한 '교섭인',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설계자', 하나와 하나를 보태 서너 가지의 효과를 창출해 내는 '크리에이터' 등 기획자 본인이 무엇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기획자들 사이에선 이런 농담이 우스갯소리처럼 돌기도 한다. “문화기획자 100명이 모이면 100개의 전공이 만들어진다.” 그만큼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기획자들이 많고, 동시에 문화기획엔 답이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 몇 년 새 문화기획자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고령화, 도시 쇠퇴 등을 해결할 방안으로 '지역문화진흥'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오히려 지자체 측에서 먼저 문화기획자 양성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을 정도다. 문화저널에 뿌리를 둔 사회적기업 마당 역시 2002년이라는 이른 시기부터 건강한 문화 생태계와 문화기획자의 역할을 고민하며 '문화기획 아카데미'를 운영해 온 바 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은 더욱 치밀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발 디딘 위치를 자세히 살피며 일상에 더 큰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화저널이 창간 32주년을 맞는 11월, 전국 각지의 문화기획자들이 그들 자신의 자리에서 어떤 문화의 씨앗을 심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기획을 준비했다. 도시기획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바른 도시의 미래를 그려 가고 있는 문승규 블랭크 대표, 생활 문화를 토대로 공동체의 걸어 나갈 길을 모색하고 있는 안태호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이사, 독립문화예술단체를 표방하며 대구 곳곳에 낭만을 심고 있는 이창원 인디053 대표, 한적한 고장 순창에 새로운 문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장재영 BOVO문화관광연구소 소장, 민간 전문가로 문화예술 정책의 올바른 방향을 제안하고 있는 정민정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기획경영실장 등 다섯 사람이 펼치고 있는 활동과 건강한 문화 생태계에 대한 고민을 들었다.



문승규 서울 블랭크 대표, 작은도시기획자들 이장
기획자들의 권익, 함께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위한 작은 실천이 이어질 때 이뤄질 수 있다


- 대표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건축과 도시를 공부하고, 2012년 서울시 마을만들기 공모전에 제안한 프로젝트가 서울시 도시재생사업으로 진행되면서 연구원으로서 지역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 만난 지역 주민들과 축제 기획, 집수리 등 다양한 협업 활동을 하며 문화기획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블랭크'라는 회사를 창업하여 커뮤니티 기획과 관련된 일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는 '작은도시기획자들' 모임에 참여하며 전국의 기획자들과 네트워크를 맺었고, 기획자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 어떤 계기로 문화기획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2013년, '블랭크'라는 회사를 창업할 당시 서울에서는 청년허브, 마을공동체지원센터, 사회적경제지원센터 등 지원센터가 설립되었고, 청년과 주민, 시민의 참여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가 큰 화두였습니다. 도시재생이란 단어가 아직 어색하던 시절, 서울시 마을만들기 사업에 연구원으로 참여하면서 '상도동'과 첫 인연을 맺었고, 지역 사업에 기여할 다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행정에서 주도하는 사업이 실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기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상도동으로 이사를 오고, 공유 공간을 조성하고,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여 건축가로서, 기획자로서, 그리고 운영자로서 지역에서 역할을 새롭게 정의해 나가고 있습니다.


- '블랭크'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요?
지역 내 빈 공간을 활용하여 커뮤니티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생활 공간을 조성,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작구 상도동의 비어 있는 상가와 주택을 공유부엌 〈청춘플랫폼〉, 공유사무실 〈청춘캠프〉, 공유주택 〈청춘파크〉, 커뮤니티바 〈공집합〉 등 지역 내에서 머물며 일하고 교류할 수 있는 생활공간으로 전환했고, 이러한 공유공간을 중심으로 형성된 네트워크를 통해 서점, 식당, 카페 등 지역의 필요에 기반한 생활 거점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또한, 타 지역에서 유휴공간을 활용한 커뮤니티 거점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일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주민센터 내의 유휴공간을 주민들과 워크숍을 통해 공유공간으로 전환한 〈마을활력소〉를 비롯하여 서울시 청년공간 〈무중력지대〉, SH 〈서울하우징랩〉, 고용노동부 〈서울시청년일자리센터〉 등 사회 이슈를 주제로 다양한 주체들이 공간에서 어울리면서 해결방안을 모색하거나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열린공간으로서의 공유공간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소도시 리모트 라이프를 위한 빈집 큐레이션 플랫폼 '유휴' 오픈을 준비하고 있으며, 서울이 아닌 지방에 적합한 커뮤니티 거점을 늘려나갈 예정입니다.


- 실패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화기획자도 예외는 아닐 텐데요. 대표님이 겪은 실패의 경험과 그로부터 배운 것은 무엇인가요?
2013년, 회사를 창업할 때만 해도 '기획'이란 업무는 그저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일종의 '서비스'로 여겼습니다. 자문을 요청받아 참석한 자리에서 나중에 일을 맡게 될지도 모르니 '가설계'를 무상으로 해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고, 사업비가 있으니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해 보라며 '기획안'을 받아 가고는 별다른 연락도 없이 비슷한 프로그램이 자체적으로 진행되는 상황도 몇 번이나 목격했습니다.
2015년, '작은도시기획자들'이란 모임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지역과 분야의 기획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러한 관행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행정과 계속 함께 일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2030 기획자들이 단지 젊다는 이유로,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겪는 편견과 차별은 무형의 자산인 '기획'의 가치가 온전히 인정받기 어려운 장애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공공에 의존하는 사업 구조에서 탈피하여 민간 영역에서 역량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자체 사업을 확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더 나은 기획자의 권리를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는데, 어떤 변화들이 이뤄지고 있나요?
다행히 지난 몇 년간 개발에서 재생으로, 행정주도에서 시민참여로 정책의 방향이 전환되면서 '기획'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2년 전에는 작은도시기획자들 회원분들과 함께 서울시에 도용, 차별, 폭언 등 문제제기를 하여 간담회를 진행했고, 재발 방지를 위한 개선 방안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또,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기획자'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난 9월 21일 토론회를 진행했고, 이번 달부터 '전국 도시기획자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한 연구위원회'를 출범하여 기획에 대한 업무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연구하고, 내년에 입법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후속 지원을 이어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 지역에서 많은 기획자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수도권에서 유행한 아이디어가 지역에서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이 지역다운 색을 띠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경험할 수 없는 지역 고유의 라이프 스타일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일회성 관광이 아닌 정주인구를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배타적인 지역 문화를 지양해야 합니다. 여전히 외부에서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있습니다. 지역 문화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기존 문화에 기반한 새로운 시도를 할 때 매력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지요시 마사하루의 〈이토록 멋진 마을〉 저서에서 지역의 성공여부는 '젊은이, 외지인, 괴짜'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서 나오는 활력, 다른 환경을 경험한 사람들의 새로운 관점, 통념과 관습을 거부하는 이들의 발상의 전환이 지역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입니다. 옛날 가치관이나 관례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지역이 활성화되고, 이를 위해 지자체에서는 젊은 세대가 지역에 애착을 느낄 수 있도록 매력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 대표님이 생각해 온, 그리고 실천하고 있는 건강한 문화 생태계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혁신도시, 혁신학교, 혁신센터, 혁신파크... '혁신'은 어느덧 지역의 미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호가 되었습니다. 전국에 혁신을 외치는 다양한 공간이 조성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 일상에서 큰 변화를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업은 넘쳐나지만, 지역에는 사람이 없고, 빠르게 변하는 정책의 속도에 피로감을 느끼고 지역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역혁신, 도시재생 등 거대한 목표 앞에 '개인'보다 '공공'을 중시한 나머지, '나다움'을 존중하지 않는 배타적인 공동체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7년 동안 한 동네에서 공유공간 기획자로서, 건축가로서, 운영자로서 다양한 이웃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지역혁신' 이전에 '자기혁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에서 실천하지 않는 혁신은 결코 우리의 지역을 바꿀 수 없습니다. 건강한 문화 생태계란 지역을 바꾸고 싶다는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각자가 지속가능한 동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생활 안전망을 구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대상으로 자기혁신을 고민하고 있고, '작은도시기획자들' 모임과 같이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그룹들과 파트너십을 맺으며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지역에 자기혁신을 실천하는 사람들과 '나다움'이 존중받는 공동체가 많아진다면 지역혁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 많은 기획자들이 문화 생태계의 자생을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보조금이 끊기면 당장 행사 하나조차 치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자생은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일까요?
문화기획자들의 기업가 정신이 더욱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이라는 일이 활동에 머물지 않고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전 정신과 리더십, 비즈니스 창출 역량 등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블랭크에서는 이를 위해 근로자가 주주가 되는 '사원주주회사' 형태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모든 팀원들이 주주로서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자생을 위한 고민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두터워진다면 지속 가능한 문화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기획자를 비롯한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에 대한 낮은 대우와 임금, 최근 불거진 기획안 도용 사건 등 아직도 산재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요?
지난 8월, '괜찮아마을'은 '행정안전부'와 '삶기술학교'로부터 기획안의 일부 자료를 부정 활용 당하였으나 당사자가 납득할만한 사과와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지속적으로 고충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을 지켜본 수많은 기획자들은 공감하고 또 격분했습니다.
행정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예술계 내부에서도 기획자들의 권익이 침해당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부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자들 사이의 공감대와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기획' 업무가 가치 있게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동의 목소리를 내고, 각자가 일상에서 변화를 위한 작은 실천을 이어가야 합니다.
행정에서도 임기응변식 대응이 아니라 문제의식에 충분히 공감하며 기획자들이 나이나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현장에서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앞장서야 합니다. 행정과 기획자들이 갑과 을의 관계를 넘어 민관협력의 파트너로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건강한 거버넌스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안태호 서울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이사
다양한 나무와 식물, 동물들이 공존하는 풍성한 숲처럼


- 이사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이사, 웹진 예술경영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안태호입니다. 문화예술단체 활동가로 시작해 부천문화재단, 제주문화예술재단 등 공공기관에서 일을 해왔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다양한 현장을 다니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 어떻게 문화기획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문학소년으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진학한 국문과에서 저는 좌절을 맛봐야만 했습니다. 세상에는 빼어난 재능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창작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지만, 그럼 예술가들 주변에서 놀기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대학 시절 저를 좌절시켰던 이들이 이상문학상을 받거나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장면을 접할 때면, 창작자에 제대로 도전도 못해본 게 아쉬워지기도 합니다.


-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저는 고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소속도 여러 군데인데요, 한국문화정책연구소와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의 이사직을 가장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한국문화정책연구소는 문화정책과 관련한 각종 연구를 합니다. 최근에는 용역사업으로 진행하는 연구작업 외에 문화정책 웹진을 발간하며 한국의 문화정책 담론을 일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는 협동조합으로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기획자 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술을 중심으로 도시의 문제를 사고하며,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만큼 조형물을 비롯한 각종 사업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통해 바뀌어 가는 지점들, 그런 변화들에서 받는 자부심도 클 것 같습니다. 그간 어떤 변화들을 일궈 오셨나요?
사실, 정책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개인의 노력과 힘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슈를 제기하고 문제를 정식화하고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 전체가 많은 이들의 참여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테면 이명박 서울시장 당시 추진했던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사업을 저지했던 일을 저는 큰 보람으로 여기는데요, 당시에 문화예술단체와 환경단체, 정당을 포함한 많은 구성원들이 목소리를 모아 주고 실제 액션에 나섰기에 가능했던 지점이 있습니다.
부천문화재단 시절에는 문화다양성 사업을 맡아 운영하며 현재 전국 문화재단에서 진행되는 무지개다리 사업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당연히 저 혼자 한 게 아니고 팀원들의 노력과 부천의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등의 단체가 갖고 있던 노하우를 활용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최근에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웹진 편집장을 맡았는데요, 편집위원들과 실무자 덕에 문화예술계의 이슈를 짚어 가며 즐겁고 의미 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지역에서 많은 기획자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수도권에서 유행한 아이디어가 지역에서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이 지역다운 색을 띠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역문화와 관련해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들었던 말 중 하나는 현재 예술인복지재단의 상임이사로 계신 정희섭 선배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하던 70, 80년대에는 지역문화를 현재처럼 '어떻게든 살려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서울로 대표되는 '중앙'의 문화가 상업적으로 치우쳐 있고 찌들어 있어 회생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여전히 생기를 확보하고 있는 지역의 건강한 문화에서 그 에너지를 수혈하겠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저는 여전히 지역에는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의 기술적인 측면이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지역의 삶을 담아내는 문화예술기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 이사님이 생각하는 건강한 문화 생태계란 어떤 것인가요?
자기 자신의 자리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그리고 독립된 개체로 서로를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상황, 공공의 재원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컨센서스, 시민력 또는 문해력을 자극하고 높일 수 있는 다양한 활동 등이 건강한 문화 생태계의 기반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몇 마디 말로 정리하거나 실현할 수 있는 거라면 이렇게 많은 이들이 문화 생태계를 입길에 올리지도 않겠지요.
풍성한 숲을 예로 들면 좋겠습니다. 나무와 각종 식물들이 자라고, 그런 숲을 삶의 터전으로 다양한 동물들이 공존하는 공간, 햇볕과 바람과 물과 흙이 삶의 기반이 되어 주는 환경. 아마도 문화 생태계의 요소들을 대입해 보면 대략의 상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
문화 생태계가 지속력을 갖기 위해선 자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자생에 대한 판단이 지원기관과 문화예술 주체들 간에 다른 것 같습니다. 기관/정부에서는 예술가나 단체가 지원금을 마중물로 해서 재정적 독립을 추진하고 더 이상 지원사업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을 자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술가나 단체들은 자생을 예술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사실, 보몰과 보웬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예술의 시장 실패는 명약관화합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지원금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져 지원기관만을 바라보거나 그 구조에 줄을 서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이 사회에 필요하다면 공공의 재원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거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자생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내는 것이 자생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획자를 비롯한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에 대한 낮은 대우와 임금, 최근 불거진 기획안 도용 사건 등 아직도 산재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요?
여전히 문화예술계에 시민 사회의 합리성이 정착하지 못한 지점이 많습니다.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계약서를 제대로 쓰는 것만으로도 해소될 지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고 합의하는 것만으로도 합리적 진전을 이룰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물론, 계약서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지점들이 있고,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힘 있는 이들의 선의가 아니라 힘 없는 자들의 연대라는 관점도 필요합니다. 필요한 일에는 정확하게 문제 제기를 하고, 문화예술계 내의 권력구조 내에서 용기 있는 문제 제기가 희석되지 않도록 반응하고 연대하는 풍토 역시 절실합니다.



이창원 대구 인디053 대표
문화기획은 외국어를 하나씩 배워 나가는 과정


- 대표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사)인디053 대표 이창원입니다.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문화예술, 특히 음악과 관련된 공연, 축제, 전시, 공공문화 프로젝트, 문화정책 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을 총괄•기획했으며, '칠곡군인문학마을만들기사업'의 운영총괄을 맡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경북 의성군 안계면의 폐업한 목욕탕을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예술의 성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인디053은 무엇을 하는 단체인가요?
(사)인디053은 독립문화예술을 의미하는 인디(INDIE)와 대구 지역번호 053을 합쳐 만든 이름으로,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전방위적인 독립문화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다양한 독립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음반 제작, 공연, 전시, 축제, 공공문화 프로젝트 기획은 물론 마을 만들기, 예술인 네트워크, 지역문화정책개발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건강한 문화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쌓아 온 수많은 경험들 중엔 실패의 경험도 있을 듯합니다.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듣고 싶습니다.
문화기획에 있어 대부분의 실패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소통 부재와 실수에서 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지역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동네사진전'을 기획하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 벽에 자신의 얼굴 사진을 찍어 전시하는 것이었는데, 한 집에서 그 집에 살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을 전시했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한 추모의 뜻이기도 했고 의미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민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민들은 '뭐 하러 돌아가신 분을 전시하느냐, 무섭다'며 반대를 했죠.
기획 의도와 주민들의 생각이 맞지 않았던 것이고, 나아가서는 지역에 대한 면밀한 소통이 부재했던 탓입니다. 문화기획에 있어 대부분의 실패는 이런 소통의 부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소통 능력과 방법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접근과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며, 특히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문화기획은 마치 외국어를 하나씩 배워나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통해 바뀌어 가는 지점들, 그런 변화들을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자부심도 클 것 같습니다.
문화가 매개가 되어 사람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김광석다시그리길'이나 '칠곡군인문학마을만들기사업' 등을 통해 저의 작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리게 되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지역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 나가는지 실감했습니다.
좋은 기획자와 함께 작업을 하나 끝냈을 때, 기획자는 물론 함께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며, 그들이 느끼는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힘들을 모아내고, 문화를 통해 조금 더 나은 삶과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을 하는 것에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 지역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문화 행사들을 보면, 수도권에서 유행한 아이디어가 지역에서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이 지역다운 색을 띠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도시는 시민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은 지역민들의 상상력을 어떻게 펼치고 만들 것인가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언어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자신의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대표님께서 생각하는, 그리고 실천하고 있는 건강한 문화 생태계란 어떤 것인가요?
문화라는 것은 특별하다거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쉽게 접하고 활용 가능한 것입니다. 생태계라는 것은 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들이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의 일원으로 문화가 자리를 잡아야 하며, 특히 세상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데 일조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건강한 문화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결국 자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태반이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생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활동 모델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보조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분야의 펀딩에 있어 보조금만 존재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보조금도 그 목적에 맞게 적절히 잘 사용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또한, '자생'이라는 것이 꼭 '펀딩'과 등치되는 것도 아닙니다. 펀딩 이외에도 생존을 위한 다양한 조건(철학ㆍ가치ㆍ조직ㆍ운영ㆍ규모 등)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살아남고 버티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 그리고 현실적 조건에 대한 전방위적인 진지한 접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기획자를 비롯한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에 대한 낮은 대우와 임금, 최근 불거진 기획안 도용 사건 등 아직도 산재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기획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아직 시기상조일까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부분은 이런 것에도 이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관심입니다. 답을 내리고 대안을 찾아 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다양한 상상과 실험입니다. 이런 과정과 경험치가 쌓여야 하고, 이제껏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문제의 대안을 찾는 데 실패하더라도 꾸준히 시도해 봐야 합니다. 누군가는 욕받이가 될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현재보다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한 준비와 노력을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재영 순창 방랑싸롱 총괄 코디, BOVO문화관광연구소 소장
독창성에 대한 고민! 재미있으면 사람들은 모인다


- 소장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순창 로컬브랜더 '방랑싸롱'의 총괄 코디와 문화기획 'BOVO문화관광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는 장재영입니다. 순창 공정여행 페스티벌 'BOVO순창'을 2회 개최했고, 정형화된 공연장이 아닌 도심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즈 페스티벌인 순창 JAZZ FESTA를 2회 개최하는 등 지역 문화 활성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순창에서 힐링하고 치유받는 청년힐링캠프 '마인드홀리데이'를 기획•진행했으며, 청년허브컨퍼런스, 청춘토크쇼 '어서와! 순창은 처음이지' 등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할미넴프로젝트'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마을 청년과 래퍼가 두 팀으로 나뉘어 각각 마을에서 어르신들과 교감하며 당신들의 이야기를 랩으로 표현해 보는 프로젝트인데, 11월 15일 두 마을 간 랩배틀 '쇼미더 순창'으로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 프로젝트 진행 상황은 영화로 제작 중이며, 추후 독립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진행 중입니다. 여행만 다니던 세계 여행자가 순창에 정착하여 지역을 '핫'하게 만들어서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싶은 꿈을 이뤄보기 위해 기획과 콘텐츠 생산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 방랑싸롱 총괄 코디를 맡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 공간인가요?
방랑싸롱은 등록 소공연장인 동시에 카페이고 문화공간입니다. 버려진 고추장 저온창고는 방랑싸롱으로써 재생을 했고, 다시 문화로 옷을 입었습니다. 방랑싸롱은 지역을 브랜딩하는 로컬 브랜더로써 지역에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기획과 도시재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방랑싸롱의 정체성은 여행입니다. 지역으로의 여행 또는 방문을 유도하기 위하여 꾸준히 콘텐츠를 생산하고, 고추장으로 획일화된 이미지를 조금은 '힙'하게 바꿔 보려 노력 중입니다.


- 방랑싸롱의 역사가 깊진 않지만, 펼치고 있는 활동들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체계적이란 느낌을 받습니다. 사전에 전부 계획된 활동들인가요?
마흔 넘게 살면서 부끄럽지만, 당장 앞으로의 1년, 2년을 계획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행에 미쳐 천둥벌거숭이처럼 지구만 떠돌던 방랑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다 보니 하루하루가 굉장히 즐겁습니다. 매년 갱신되는 경력은 둘째치고 다음 달에 어떤 일을 할지, 내년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 스스로가 궁금해 미칠 지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젠 계획이란 것을 하게 됐습니다.
1년, 2년, 나아가서는 5년 후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5년 후엔 지금보다 두 계단 더 나아가길 고대합니다.



- 많은 기획자들이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소장님이 생각하는 지역문화란 어떤 것인가요?
사실 60여 개국을 여행하며 살아온 저의 아이디어 원천은 우리나라, 특히 수도권이 아닌 외국입니다. 그렇다 보니 때론 너무 앞서가서 지역에서 소화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이 지역다운 색을 반드시 띠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라질 삼바 축제의 역사는 겨우 150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브라질을 상징하는 축제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이처럼 꾸준히 유지되는 것이, 그리고 만들어지는 것이 문화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역의 색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소장님이 생각하는 건강한 문화 생태계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줄곧 여행자로 살다 문화판에 들어온 지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사례로써 건강하지 못한 환경에 처해지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특히, 기획에 대한 존경과 인정이 없다 보니 아이디어는 없고 복사만 남습니다. 이런 것들이 과연 개선될 여지가 있을까요?
자생에 대한 고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창성이 없으니 홀로서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독창성이야말로 자생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있으면 사람들이 모인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죠. 태국의 송크란 축제나 인도의 홀리 축제는 누가 가라고 하지 않아도 전 세계 많은 이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런 독창성과 콘텐츠라면 굳이 보조금이 필요 없겠죠. 하지만 우리나라 환경에선 그런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한 보조금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보조금에 의지하기보단 보조금을 지급하는 주체와 수혜받는 당사자 간의 거리가 유지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보조사업이나 공모사업에선 기획자의 인건비를 책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기획자에 대한 인식도, 그 아이디어에 대한 대우도 현시점에선 대접을 받기 요원해 보입니다. 기획 당사자를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나아가 그들의 아이디어를 등록하여 재사용 또는 표절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면 조금 더 나은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민정 부산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기획경영실장
변화하는 상황들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 건강한 문화 생태계를 만든다


-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해 오셨나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에서 5년째 활동해 왔습니다. 지역문화지 〈안녕 광안리〉의 창간호를 준비하던 2010년부터 잡지 기획과 운영을 시작했고, 2012년부터는 부산문화재단 기획홍보팀에서 근무하다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이 설립된 2014년부터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던 대학시절부터 인쇄매체와 관련된 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안녕 광안리〉 발간부터 재단 근무시절 비평지 〈공감 그리고〉 발행을 담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문화와 콘텐츠 분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에서 활동하면서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교육 프로그램 기획과 함께 조직의 운영•관리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 문화기획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중앙일보 문화사업부와 코엑스 전시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대학시절, 부산이라는 도시의 특성과 매력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업 분야가 전시•컨벤션 분야라 생각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 도시가 가진 특성과 매력을 발견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다시 부산에 내려와 살게 된 광안리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안녕 광안리〉 잡지를 함께 만들게 되었는데,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이미 익숙한 일상을 되돌아보고, 몰랐던 지역의 이야기와 일상을 사람들과 나누었던 경험들이 지금의 저저를 있게 한 계기이자 원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 '플랜비'는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가요?
2000년대 후반부터 부산의 대안적 문화공간, 매거진, 축제, 인문학 분야에서 활동해오던 기획자들과 연구자들이 부산문화재단의 '공공예술기획지원사업'으로 진행된 〈부산회춘프로젝트〉, 〈부산청년문화수도프로젝트〉, 〈무빙트리엔날레〉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협업하면서 축적한 네트워크와 성과를 지속하기 위해 2014년 설립됐습니다.
문화예술 정책연구와 컨설팅, 예술가 및 문화단체들과 협업하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문화예술 인력의 교육과 지역 콘텐츠 발굴 분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2016년부터 3년간 진행한 영도 깡깡이예술마을 조성사업과 같은 지역사업을 통해 지자체, 공공기관, 기업, 국내외 예술가 및 문화단체, 지역주민과 협업하고 있습니다.



- 다양한 활동과 다양한 경험들, 그중에는 실패의 경험도 있을 듯한데,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느끼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실패라는 표현보다는 지속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경험들이 생각납니다. 앞서 말씀드린 지역문화지 〈안녕 광안리〉는 무가지로 발간되던 계간지였는데, 5년간 줄곧 발행되다 2016년 12월 20호를 마지막으로 잠정 휴간하게 되었습니다. 공공기관의 지원금부터 기업과 개인의 후원, 네이버 연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해서 5년간 이어왔지만 주요 구성원들이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설립에 참여하면서 여러 사정으로 휴간을 결정했습니다.
이후 수영동, 영도 등을 배경으로 지역 사업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 잡지를 만들고, 그곳의 사람들이 잡지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일들을 하며 이어오고 있긴 하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개인적인 아쉬움 때문인지 어떠한 분야든 오랜 세월 변함없이 한 가지에 애정을 쏟고 충실하게 집중하는 사람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감내한 시간들의 소중함과 가치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 그간 이뤄낸 변화와 활동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2019 신나는 예술여행 사업 지원을 받아 지난 8월 영도에서 〈부산 남항 바닷길 축제〉를 진행했습니다. 공연, 전시, 마켓, 여행,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이번 축제는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단체,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개별 단체들의 특성과 전문성이 담긴 콘텐츠를 영도의 독특한 자원과 함께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지역에서 발견하고 만들어온 결과물들, 그리고 협업을 통해 쌓아온 네트워크의 기반이 있었기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 지역에서 많은 기획자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실제론 수도권에서 유행한 아이디어가 지역에서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이 지역다운 색을 띠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수도권 '지역'을 포함한 모든 지역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활동들이 벌어지고 있기에 더 이상 수도권과 지역을 구분하는 시각은 유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공공기금, 투자 등 대규모 재원의 흐름에 따라 그 속에서 일종의 성공사례로 여겨지는 아이템과 콘텐츠의 형식이 재생산되는 것은 공공적인 사업이든 비즈니스 영역에서든 불가피한 현상인 것 같습니다. 특히 공공의 기금으로 진행되는 사업의 경우, 공공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형식적, 내용적으로 가다듬어 사업을 매뉴얼화하고, 관리하는 작업이 필수적이겠지만 지나칠 경우,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사업하게 될 위험도 있겠지요. 결국은 사업에 대한 시각과 접근 방식, 과정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 실장님이 생각하는, 그리고 실천하고 있는 건강한 문화 생태계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문화 생태계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개념화시켜 정의하기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태계의 상황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실천은 때로는 새로운 협업이 될 수도 있고,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될 수도 있고, 제가 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들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문화 생태계가 자생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보조금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본들이 투입되는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중심을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에 대한 집중과 선택,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 태도를 통해 만들어진 정체성으로 새로운 사업 분야를 개척하고, 최소한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환경과 상황의 변화에 따른 대응과 전략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지향점이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만드는 것, 그것이 결국 자생력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기획자를 비롯한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에 대한 낮은 대우와 임금, 최근 불거진 기획안 도용 사건 등 아직도 산재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요?
문화예술 분야 전반의 업무에 대한 이해나 사람이 직접 하는 일에 대한 가치 인식이 부족해서 문화기획과 관련된 업무를 단순히 행사를 대행하거나 기획서를 쓰거나 아니면 디자인을 하는 일로 일반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이해와 인식이 점점 변화하고, 환경들이 개선되고 있다고 느끼기도 하는데, 외부의 불합리한 문제들은 외면하지 말고 부딪히되, 스스로의 가치를 키워나가는 다양한 노력을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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