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4 | [문화저널]
백제기행
나에게로 떠난 여행 '고부들판의 역사맞이'
제36회 백제기행과 함께
이현배 옹기장이(2003-09-23 10:21:51)
잎차 두 대접 마시며 써내는 기행문
솔직히 백제기행 같은 점잖은 모임에서는 노래 같은 걸 시키지 않을 줄 알았다. 전날 숙소에서 뒷풀이가 있었는데 여지없이 순서가 돌아왔고 겨우 모면했다. 옹기일을 하는 관계로 '산소 같은 남자'로 거창하게 소개되었음에도 노래를 하고 나면 '탄소 같은 남자'가 될게 뻔한 일이라 발뺌을 한 것이다.
'도둑피하다 강도 만난다'고 돌아오는 길에 또 노래하는 순서가 생겼다. 더 큰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을 졸이며 멀미 기운을 느끼고 있는데 박선배께서 불쑥 기행문을 쓰라 한다. '글재주가 없어서....'하며 말끝을 흐리는데 언뜻 본 표정이 단호했다. 내 변명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노동 문학회에 있었던 전력을 박선배께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백제기행을 알게 된 것은 노동문학회에서 알게 된 김용만 선배의 권유에서 였다. 그리고 김용만 선배와 박선배와는 친구인 것이다. 그리하여 꼼짝 못하고 붙들렸고 겨우 '원고지 쓰는 법을 모르니 그냥 백지에다 쓸께요'라고 양해를 구할 수 있었다.
고백컨대 내가 문학회에 참여했던 것은 환자가 병원을 찾듯 글쓰기를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노래도 그렇다. 팔십육 년도에 적벽가 기능보유자 한승호 선생님께 공부한 적이 있었다. 의사가 환자를 포기할 때 심정은 오죽하랴. 이 사람은 소리선생님께서 포기한 사람이다.
대학 때는 황순원의 작품세계를 써오라는 리포트를 중학교 참고서를 보고 옮겨 적어 F학점을 받은 정도이다. 나는 지금 마감 날을 하루 남기고 기행문을 붙들고 있다. 어렵다. 포기하고 싶다. 그저께 만들어 놓은 단지 손잡이도 달아야 한다. 어제 저녁에는 잠 안 오는 약으로 잎차를 두 대접 마셨다. 아내가 옆에서 보기가 안타까운지 전화를 걸어 못쓰겠다 말하라 권유한다. 전화기를 몇 번 들었다 놨다 하다가 다시 기행문을 붙들었다.
쇠울타리 갑옷 입은 문화재의 망칙함
우리는 우진 문화공간 앞에서 두시 삼십분에 출발했다. 우리는 서로 인사하고 이진영 선생의 동학 농민혁명에 관한 강의를 들으며 선운사로 갔다. 36회 백제기행 일정에 선운사가 들어있어 참 좋았다. 친구가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는 좋더라하지. 아내가 스케치 여행 때 들렀는데 참 좋더라 해서 꼭 가보고 싶었던 참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의 목적지는 선운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둘러 도솔암 마애석불을 향하다 잠깐 부도 밭에 들렀다. 이진영 선생은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까만 비석(짐작으로 탁본을 많이 떠서 그런 모양이다)을 가리킨다. 더듬더듬 읽어 보니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비'라고 쓰였다. 추사 김정희 글씨란다. 이제껏 국사 교과서에서 본 뭉퉁한 글씨가 추사글씨의 전부인줄 알았기에 생소했다.
선운사에서 천연기념물을 세 번 봤다. 입구 왼쪽의 '송악', 선운사 뒤를 병풍처럼 두른 '동백나무 숲' 그리고 진흥굴 앞의 '장사송'. 일행 중의 한분이 '다막솔'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일려주셨다. 더러 보이는 나무인데 굳이 천연기념물이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감투를 쓴 것처럼 오히려 망칙해 보였다.
도솔암 마애석불, 그것은 거울이었다.
도솔암 마애석불, 옛날에 그만한 규모로 제작하기가 보통일이 아니었을 텐데 무슨 동기, 어떤 의지로 제작했을까. 손에 자꾸 눈이 간다. 대단한 노동력이 느껴진다. 내 어머니 손 같아 보였다. 물론 내 손도 어머니 손을 닮았다. 둔 한 듯 뭉툭한 것이 추사체 같다.
내 옹기 선생님한테 부처님이 거만한 이유가 사람들이 부처님을 통해 결국 자신에게 절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몇 해 전에 용산역 근처에서 조소를 공부한 적이 있다. 하루는 처녀 선생께서 몸 파는 아가씨들이 빨간 조명의 쇼윈도를 지나가다 꼭 정육점 같다 한다. 나는 '아니에요, 저건 거울집이에요'했다. 그렇다. 도솔암 마애석불 그것은 거울이었다. 농민 혁명군들이 배꼽을 부수는 행위를 통해 변혁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고부들판의 역사맞이
차는 고부농민봉기 역사맞이굿이 열리고 있는 정읍으로 갔다. 정금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고부주지로 갔다. 이미 행사는 시작되어 한창이었다. 왜 그랬을까? 마당극을 보는데 자꾸 눈물이 나고, 관군이 혁명군을 참수할 때도 눈물이 나니 극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백제기행. 고부들판의 역사맞이. 그것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팔십 년대 구로동에 있는 나를 보았고 인공 때 산 속에 계신 아버지를 보았고 한말과 왜정 때의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이것을 어찌할까. 같은 돌부리에 걸려 삼대가 엎어졌다. 자꾸 눈물이 난다.
숙소에서 뒷풀이가 있었다. 한복을 곱게 입은 도립국악원들이 심청가 중에서 심봉사 눈Em는 대목과 가야금 병창, 그리고 성주풀이를 들려줬다. 늦은 시간에 우리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세 낭자들이 참으로 고맙다.
방배정을 마쳤는데도 서울서 온 사진작가 부부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문득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고만고만한 애가 셋이라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서 대표로 다녀 버릇을 한 것이다. 이번 백제기행에 꼽아보지는 않았지만 부부동반이 많았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옥의 티'였던 광명단 항아리
마당극 연출에 참여한 이가 자리를 함께 하여 끝 장면의 혼맞이에 대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혁명군들의 혼을 단지에다 담는 형상이었는데 그 단지가 보기 싫었다. 납이 주성분인 광명단 항아리를 사용하여 그 유해성은 제처 놓고라도 광택이 엄숙한 분위기를 해치는 '옥의 티'였다.
공기밥을 추가로 계산했다면 일행에게 미한한 일이다. 나는 두 그릇은 기본으로 먹었으니 말이다. 이번 일정에서 아쉽게 생각되는 점인데 지역 특성을 살린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 평야지대의 남다른 음식을 기대했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전봉준 장군의 고택으로 향했다. 차창 밖의 들은 넓고 그 색은 밝아 생기가 돈다. 옆자리에 앉은 이가 고창이 고향이라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방장산, 두승산도 그이(돌배라는 별명처럼 기억력이 엉망이다. 죄송스럽다.)덕에 알았다. 전봉준 장군의 고택에선 마당 밟기가 한창이었다. 초가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는데 담이 참 실하고 아름다웠다. 거푸 형식으로 양쪽에 찬을 대고 공이로 흙을 다져 쌓은 토담(판담)이었다. 부엌에 들어 가보니 어떤 영감님께서 학생들에게 질솥에 대해 설명하고 계셨다. 옛날에는 거의 질솥을 썼고 밥맛이 그렇게 좋았노라고. 그런데 시방은 없어졌다고 한다. '영감님 좋은 일 하시네요 제가 옹기 만드는 일을 하고 있거든요. 옛날식으로 만들어 꼭 선물해 드릴게요. 옛말을 찾아보세요' 했더니 반가워하신다. 아닌 게 아니라 부엌의 솥구성이 안 좋았다. 대게 한 집에 밥솥, 국솥, 가마솥이 걸리는데 밥솥으로 쓰는 세발솥은 없고 국솥만 나란히 두 개 걸려 있었다. 선반 위의 투가리도 광명단을 쓴 거였다. 이담에 방문하면 꼭 바꿔놓고 싶은 물건이다.
재현굿 아닌 농업문제 해결의 열림굿
말목장터(정읍군 이평면 사무소)판열음 굿에서 정읍군 농민회장님의 '일백년 전 갑오때나 문민정부라는 오늘이나 농민을 슬프게 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에 군수께서 '신한국 창조'를 얘기한다. 시공을 뛰어넘은 관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신조선'이 '신한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니 말이다. 이번 행사를 단순히 재현굿으로만 할 게 아니라 오늘의 농업문제 해결을 위한 열음굿을 함께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우리는 말목장터에서 기포하여 고부관아로 진격하였다. 전주 다음으로 컸다는 고부현은 지금은 없다. 고부관아 자리에는 국민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향교와 민가의 돌담 그리고 그 담넘어 보이는 장독대의 구성이 옛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넓은 고부들판이, 이제는 고부를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평 국민학교에서 단연 인기를 끈 이는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 역을 맡았던 김유봉씨였다. 나는 작년 여름에 서편제를 보고 아파했다. 내가 어깨가 아픈데 그것은 호텔서 초코렛 일을 하다 에어콘 때문에 얻은 냉동병이다. 이게 정도가 심하여 날궃이를 한다. 그럴 대면 꼭꼭 눌러준다. 아프면서도 시원하기 때문이다. 서편제가 그랬다. 극장문을 나서면서 일면 시원했지만 그건 아픔이었다. 김대중 선생께서 이제는 한을 극복하고 신명나는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가 아니었을까.
일상의 삶을 통한 철저한 실험
이 땅은 분명 멍들어 있다. 당나라군의 말발굽에, 일본군의 군화발에, 거기에 빌붙었던 이 나라의 지배계급에 의해, 오늘 그들은 달래려든다. 치료하려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에겐 치료할 능력이 없다. 기념행사로도 안 된다. 양식 있는 지식층에 의해서도 안 된다. 오직 이 땅의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농민혁명군의 피와 정신은 이 땅에 그리고 이 땅의 사람에게 스며있다. 이젠 감출 것도 미화시킬 것도 없다. 일상의 삶을 통해 철저하게 그 정선을 실천하므로 참 세상을 이루리라.
우리는 숨통을 막히게 했던 만석보를 터트리고 기행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