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계의 올림픽이라면 흔히 3대 콩쿠르를 꼽습니다. 폴란드의 쇼팽콩쿠르,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그리고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그것입니다. 이중 쇼팽 콩쿠르는 피아노부문만 개최하지만 나머지 두 콩쿠르는 기악, 성악, 작곡부문까지 개최하여 클래식의 종합선수권대회 같습니다.
특이한 점은 폴란드, 벨기에, 러시아, 세 나라 모두 유럽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는 아니었습니다(벨기에 출신의 유명 음악인으로는 <생명의 양식>으로 유명한 세자르 프랑크 정도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을 유럽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가장 영예로운 콩쿠르가 변방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채롭습니다. 세 나라 중 러시아는 문학, 음악, 연극, 발레 등 유럽 예술계에서 중요한 한 몫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실 듯 합니다. 하지만 유럽 예술사에서 러시아가 발언권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문화예술적 측면에서 변변한 업적이 없었습니다. 영토가 넓은 데서 오는 이질적인 문화, 불안정한 정치상황,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 등으로 다양한 문화적 감수성이 상호 교류하며 풍부하게 문화예술을 발전시켜 온 서유럽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으로도 동토의 땅이었습니다. 러시아 귀족들은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영입한 음악가들이 들려주는 서유럽의 음악에 심취하며 문화적 식민지 상태로 지냈습니다.
이런 러시아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변화를 이끌어 낸 인물이 미하일 글린카(Mikhail Ivanovich Glinka, 1804~1857)입니다. 바흐가 유럽 고전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듯 글린카는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글린카가 활동한 19세기 초 유럽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열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계몽주의, 근대사회, 산업혁명 등 정치경제적으로 극심한 역동기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옹의 등장은 유럽 전역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러시아에도 역사의 소용돌이는 찾아왔습니다. 1812년 유럽 최강의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한 것이지요. 러시아 군대는 나폴레옹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고 모스크바까지 내주는 등 고전했지만 결국 1813년 1월 나폴레옹 군대를 전멸시키며 러시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경험은 러시아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유럽사회에서 러시아의 국가적 발언권이 커진 것은 물론 강력한 외부의 적을 단결된 힘으로 몰아낸 러시아 국민들에게도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강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미하일 글린카는 이런 시대적 배경 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1804년 러시아의 스몰렌스크(나폴레옹 전쟁 때 격전지 중 하나입니다)에서 부유한 지주였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족한 것 없는 집안의 엄친아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소년기에 음악 애호가인 부유한 삼촌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에는 작은 관현악단이 있었습니다. 음악애호가답게 집에서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서유럽 유명 음악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회가 자주 열렸고 글린카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을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달리 오케스트라가 핀란드 출신 작곡가의 곡을 연주했는데 이전에 들었던 서유럽 작곡가와는 다른 음악적 색채에 깜짝 놀랐고, 이때에 받은 감동으로 그는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3세에 삼촌 집을 벗어나 러시아 최대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기서 운명과도 같은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존 필드(John Field, 1782~1837)였습니다. 존 필드는 쇼팽보다 먼저 피아노를 위한 야상곡을 작곡하여 쇼팽의 야상곡에 영감을 준 인물입니다. 존 필드는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이들이 필수적으로 거쳐가는 소나티네로 유명한 클레멘티의 제자로 파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클레멘티에게 혹사당한 나머지 1803년 일찍 독립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왔습니다. 글린카는 존 필드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큰 영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음악가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외무성 관리가 되도록 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외무성 관리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작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썼지만 작곡에 전념하지 않고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마치 취미생활처럼 작곡을 했기 때문에 대곡보다는 소품이 많았습니다(그런데 이 시기 러시아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곡가들은 거의 음악을 부업삼아 하던 작곡가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러시아 국민음악 5인조입니다).
글린카는 1830년 오페라를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36년 17세기를 배경으로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반 수사닌이라는 농부의 일대기를 그린 러시아 최초의 국민 오페라 〈이반 수사닌(Ivan Susanin), 또는 황제에게 바친 목숨〉을 발표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 오페라의 성공으로 글린카는 궁정악장에 취임했고, 서유럽 음악적 전통이나 기법에 따라 작품을 만들던 방식을 벗어나 슬라브 민족 고유의 음악어법을 바탕으로 슬라브 민족정신을 담은 음악을 써내려 갔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러시아의 문화적 풍토는 프랑스 문화예술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섞어서 말하는 것을 우아하다고 여겼으며, 궁전에서는 물론 자기 집에서조차 프랑스식 생활양식을 따라 하는 것을 우월한 문화적 표현으로 여겼을 정도였으니까요(모차르트가 빈 궁정에서 이탈리아 음악가들에게 받았던 차별과 비슷합니다).
이런 문화예술적 풍토 하에서 글린카는 회심의 역작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를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러시아 민담과 전설을 이용한 러시아 최고의 국민작가 푸시킨의 환상적인 서사시를 오페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키예프 대공의 딸 루드밀라에게는 루슬란을 비롯해 세 명의 구혼자가 있는데, 루드밀라가 난쟁이 제르노모르에게 납치당하자 키예프 대공이 루드밀라를 구해 오는 사람과 결혼을 약속했고 루슬란 왕자가 다른 구혼자들과 마녀의 방해를 물리치고 루드밀라를 구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글린카의 두 번째 오페라인 〈루슬란과 루드밀라〉는 러시아인은 러시아적인 오페라를 봐야한다는 일념으로 만든 작품으로 러시아의 이야기를 러시아적 음악어법으로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환상적인 이야기답게 오페라는 신비롭고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습니다(지금도 이 오페라는 러시아외 다른 지역에서는 많이 공연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오페라의 <서곡>만큼은 독립된 곡으로 자주 공연되고 있습니다). 글린카의 기대와 달리 이 오페라가 참패하자 그는 매우 우울해 했습니다. 결국 러시아 궁정을 떠나 파리로 향했습니다. 그가 파리로 떠난 것은 파리에 베를리오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베를리오즈는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1830년 <환상교향곡> 등 강렬하고도 극적이며 개성넘치는 표현력으로 음악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베를리오즈를 만나 <루슬란과 루드밀라>의 몇 부분을 들려 주었는데 베를리오즈로부터는 극찬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용기를 얻은 글린카는 러시아인으로서의 독창적인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서 고대의 선법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던 중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1857년 53세의 나이로 베를린에서 독감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글린카의 음악적 시도는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서유럽 음악의 식민지와도 같던 러시아 음악이 갑자기 독립을 선언한 것과 같았으니까요. 그는 최초로 국민음악이라는 음악계의 전통을 만들며 러시아 음악이 세계인의 음악으로 서는 계기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 국민악파, 그리고 차이코프스키로 이어져 우리가 아는 러시아적 색채의 음악이 그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음악을 창조하는 것은 국민이며, 작곡가는 그것을 편곡할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 말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