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책을 펼쳤을 때 그에 관한 세 개의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 셋 다 피상적이라는 면에서, 나는 확실히 정운영에 관한 한 백지에 가까운 인식의 소유자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 새삼스런 자각이 나를 당혹케 했다. 그의 사후 10년을 맞아 기획한 글 모음집이 나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정운영이라는 이름에 따라오는 내 첫 번째 기억은 그의 외모다. 1990년대 중후반쯤이었던 걸로 생각되는 데, 당시 즐겨보던 월간지 <말>에서 그의 심층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국사회의 진보 성향 경제학자이자 칼럼니스트로 정운영이라는 사람을 소개한 지면에서 내가 압도된 건 그의 길쭉한 키였다. 이건 순전히 키 작은 사람의 콤플렉스일 수도 있는데, 여하튼 명문대 학벌에 유럽 유학파 출신이고 대학교수인데다가 멋진 글로 필명을 날리며 사회의 양심과 정의 편에 서 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키까지 길쭉하다니! 나이 젊은 것 빼고는 어느 하나 나을 것 없는 내 자신에게 한없이 난쟁이 콤플렉스를 자극해대는 그의 전신사진만 기억에 남고, 그의 인터뷰 내용은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탈색되고 말았다. 그게 내 정운영에 대한 첫 기억이다.
그래서였을까. 정운영 선집 <시선>을 펼치며, 앞 페이지를 장식한 조정래의 추도문을 건너뛰었다. 사실상 그의 글과의 첫 대면인데, 감정 섞인 헌사의 후광으로 인해 냉정한 판단이 흐려질까 우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 이번 책을 기획한 사람들에겐 좀 야박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글쓴이를 위한 최고의 '예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냉정함이 좀 지나쳐서 였을까? 책의 절반 분량을 읽어 나가는 데도 글에 영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 2부에 해당하는 <저 낮은 경제학>은 경제학자로서의 그의 전문성이 돋보이는 글이지만,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소화하기에는 벅찬 내용과 용어가 적지 않다. 더군다나 '노동의 종말'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언사가 벼락처럼 쏟아진 지 이미 십 수 년 된 상황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설파했던 마르크스 그리고 사회주의에의 이 짙은 그리움은 어찌하란 말인가. 글이 쓰여진 때가 사회주의 붕괴 직후이니 시간의 맥락으로 따지자면야 그 회한이 십분 이해되면서도, 굳이 그 토로를 지금 2015년에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는 맥이 풀리고 말았다.
자, 이쯤 되면 과감하게 책을 덮어야 하는 게 아닐까?
솔직히 말하자면 고민이 많았다. 서평을 약속했으니 책을 다 읽고 글을 써야하는데, 더 이상 그의 글을 읽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읽고 싶은 책은 쌓여있고, 직장일로 바쁜 시간 쪼개가며 책을 읽는 실정인데 내키지 않는 글까지 이렇게 억지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침대 옆 탁자에 던져두었던 책을 다시 펼쳐든 건 이틀 쯤 뒤였다. 약속 이행(서평)에 대한 의무감이 자극한 바도 없지 않지만 그보단 사실상 오기가 큰 동기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 오기 발동에는 정운영에 관한 어떤 기억이 개입되어 있다. 그걸 편의상 정운영에 관한 내 두 번째 기억이라고 정리해 두자. 그리고 그 기억은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내 귓가를 자극한다.
"요즘 정운영 씨 칼럼집 사서 읽고 있는데, 진짜 재밌어!!"
대학시절 책 좀 읽는다고 소문난 나에게 그다지 친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한 학과 선배가 던진 무심한 도발이었다. 물론, 대학시절인 9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래??' 그 때 오기가 발동했다. 남들이 읽는 책은 무조건 읽는다, 남들이 읽지 않은 책도 무조건 읽는다, 여하튼 닥치는 대로 읽는다, 가 생활신조였던 당시의 나에게 아직 내 손길이 닿지 않은 책을 누군가가 필살기처럼 꺼내들었으니 나에겐 도발로 느껴질 밖에.
그렇게 마음먹은 책을, 그런데 읽지 않았다. 당시 즐겨 읽던 무크지 <인물과사상>에 정운영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꽤 날카로운 비판과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아니, 그랬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당시 <인물과사상>은 나에게 독서 지침서나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에 문득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래서 정운영의 글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이틀 정도 묵혀두었던 책을 다시 펼쳐들게 된 사연에 정운영에 관한 이 두 번째 기억이 개입되어 있다니, 무슨 말이냐고? 사정은 이렇다. 그러니까 책을 묵혀두었던 이틀 동안, 그의 글을 좋아했던 한 선배의 말과, 그의 글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비판에 쉽게 투항했던 나의 판단이 어지럽게 펼쳐지면서, 어쩌면 나는 이미 선입견을 가지고 이 책을 접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 선입견의 뿌리를 찾기 위해 서재 어딘가에 파묻힌 <인물과사상>을 찾아보았지만, 어디 두었는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엔 그런 노력마저 포기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차피 그 비판 또한 치열했던 한 시대의 맥락일 뿐이며, 좀 더 현실적인 진보를 주창했던 강준만 교수가 진보학자 정운영에게 내민 연대의 손짓이었을 터인데.
마음 다 잡고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자는 오기는 그렇게 발동했다. 그리고 다시 들게 된 정운영 선집 <시선>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술술 읽혔다. 글쟁이로서의 그의 진면목이 슬슬 엿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좀 알겠다. 정운영이라는 사람의 심성이 참 여리다는 것을. 세상의 좋은 스펙 보듬고 일신영달의 길로 그 긴 다리 쭉 내밀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정의'와 '신념'이라는 음지 속으로 조심스레 몸 웅크리고 들어간 까닭을. 대학교수라는 그 좋은 타이틀 잘 끌어안고 복지부동했어도 되었을 텐데 굳이 '학내 민주화'에 목소리 보태 해직교수가 된 이유를. 그의 현학 취미마저 어쩌면 자신의 여린 심성의 속살을 보여주기 민망해 감춘 일종의 분첩이었음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 그리고 지금은 하 수상한 시절!
이제 본격적으로, 정운영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