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은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이 남긴 말입니다. 물론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모차르트 오페라의 원작자인 프랑스 작가 보마르셰(Beaumarchais)의 3부작 연극 중 하나인 <피가로의 결혼>을 두고 한 말인데요. <피가로의 결혼>은 당시 귀족 중심의 신분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파리에서 무대에 오르자 루이 16세는 그 위험성에 놀라 상연을 금지시켰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세비야의 이발사>의 후편입니다.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는 사랑하는 사이로 로지나의 후견인인 바르톨로가 로지나를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자 이발사인 피가로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속편인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그토록 애틋했던 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의 사랑에 크게 금이 가 있습니다. 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는 물론 여러 등장인물들이 치정에 얽혀 서로 속고 속이는 '사랑과 전쟁'이 펼쳐집니다. 전편에서 이발사였던 피가로는 백작의 결혼을 도운 공으로 속편에서는 백작의 시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피가로는 백작부인의 하녀인 수잔나와 결혼을 약속했는데 백작이 수잔나에게 흑심을 품자 이에 분개한 피가로와 수잔나, 백작부인이 공모해 백작을 망신 준다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런 내용으로 보면 백작이 비도덕적이기는 하지만 희극적 요소가 강한 풍자극으로 체제에 반기를 든 정치적 이야기는 아닌 듯 한데 사실은 치정극 속에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피가로는 "백작! 당신은 절대로 수잔나를 얻을 수 없어! 당신은 신분, 재산, 지위, 품위, 그런 것들을 다 가졌다고 우쭐대지만 그런 특권을 갖기 위해 스스로 한 일이 뭐가 있지? 세상에 태어나는 수고 말고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잖아! 나는 일국을 통치할 정도의 지혜를 짜내면서 평생을 살아왔어'라고 외칩니다. 무시무시한 말이지요. 천한 신분의 하인이 귀족을 조롱하는 것을 넘어 귀족과 자신을 비교해 누가 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인가 하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는 이 위험한 연극을 오페라로 만들겠다고 나섰습니다.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거창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의 전편인 <세비야의 이발사>(1816년 롯시니의 작품이 아닌 1782년 파이지엘로의 작품)가 오페라로 만들어져 흥행에 크게 성공하는 것을 보고 그 후편인 <피가로의 결혼>도 크게 성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겠다고 나서자 아니나 다를까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정치색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불온한 작품으로 낙인찍혀 있던 터라 모차르트가 살고 있던 빈에서는 상연금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페라로 만든다 해도 상연 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지요. 하지만 모차르트와 대본작가 다 폰테는 빈의 황제인 요제프 2세를 설득했습니다. 요제프 2세는 상연을 허가했습니다. 요제프 2세가 오페라의 상연을 허가했던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계몽군주였던 요제프 2세는 음악, 건축, 문학 등 빈의 문화예술이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영향 하에 있다고 보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자국의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민족의식을 갖기 시작한 요제프 2세는 궁전의 정원은 프랑스인에게, 음악은 이탈리아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궁정에 가득찬 이탈리아인 음악가들에게 시달림 당하는 자국 출신 음악가 모차르트를 그렇게 아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만들겠다고 하자 그것이 <피가로의 결혼>이었지만 정치색을 배제한다는 조건으로 상연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그것도 이탈리아어로 된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빈 궁전을 장악한 이탈리아인 음악가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제프 2세의 후원을 받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에 대해 크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이탈리아 오페라에 도전한다고 하자 빈 궁정을 모차르트에게 빼앗길지 모른다고 우려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황제에게 우르르 몰려가 <피가로의 결혼>의 정치색을 문제삼아 이런 불온한 연극을 오페라로 만들려는 모차르트의 사상이 의심된다며 이른바 색깔공세를 펼쳤습니다. 그게 통하지 않자 이탈리아 오페라는 이탈리아인들이 써야지 이탈리아어 강세도 모르는 촌뜨기 모차르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어떻게 하든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상연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이 대목을 모차르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차르트를 시기해 늘 감시하던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집에 숨어들어 악보를 살펴보는데 이때 보게 되는 곡이 바로 <피가로의 결혼>입니다. 오선지에 흐르는 선율에 감탄한 살리에르는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궁전에 모차르트가 불온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소문을 내고 황제를 압박합니다. 황제는 모차르트를 불러 왜 이런 작품을 만드느냐고 추궁하는데 이때 모차르트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나는 정치를 싫어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이 작품에는 정치적 요소가 하나도 없습니다. 부부가 서로 싸우고 다투는 사랑이야기로 단지 코미디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2막을 보세요. 부부가 2중창으로 싸웁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녀가 끼어들어 3중창이 됩니다. 다시 시종이 끼어들어 4중창이 되고, 정원사가 끼어들어 5중창이 되고, 이렇게 하나둘 끼어들면서 스무명이 한꺼번에 노래합니다. 연극에서는 스무명이 떠들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오페라에서는 완벽한 하모니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얼마나 재밌겠어요?" 오직 음악적 구성에만 흠뻑 취해서 얼마나 재밌는 오페라가 될지 기대되지 않느냐고 설득합니다.
황제는 리허설을 허락했습니다. 반대파들은 리허설에서 모차르트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리아와 음악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입니다(쇼생크 탈출에서 교도소 마당에 울리던 이중창(3막의 <편지 2중창>)을 생각해 보세요). 리허설에 참가했던 가수들과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브라보! 위대한 모차르트"를 외치며 크게 환호했던 것입니다. 결국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 5월 1일 빈의 부르크극장에서 모차르트의 지휘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인에 의해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작곡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빈 궁정의 이탈리아 지지파들이 객석 일부를 장악하고 앉아 공연 내내 야유를 퍼부어댔습니다. 공연장은 모차르트 지지자와 반대파들이 한쪽에서는 환호성을, 한쪽에서는 야유를 퍼부으며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지속되는 동안 야유는 점점 줄어들고 환호성은 커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끝내 이 작품은 빈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몇 차례 공연을 더 했는데 이탈리아 지지자들의 방해도 심했지만 3시간이 훌쩍 넘는 공연시간도 문제가 됐고, 11명이 되는 등장인물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퇴장하면서 복선에 복선을 거듭하기 때문에 줄거리를 사전에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꽃을 피운 곳은 체코의 프라하였습니다. 프라하는 빈과 달리 모차르트의 이탈리어 오페라에 대해 거부감도 없었고 또 정치색도 약했기 때문입니다. 프라하 사람들은 <피가로의 결혼>을 여자들이나 밝히는 귀족들의 성적 타락이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풍자, 못된 귀족을 골탕먹이는 하층계급들의 통쾌한 복수 같은 재미있는 희극적 코미디로 받아들였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이 프라하에서 인기를 크게 끌면서 모차르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열렸습니다.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에게 새 오페라를 의뢰하였고 모차르트는 프라하로 건너가 유럽 최고의 난봉꾼이자 바람둥이였던 돈 후앙에 관한 이야기인 <돈 죠반니>를 발표했습니다. <돈 죠반니>도 프라하에서 대성공을 거둡니다.
모차르트가 살던 시절, 유럽 오페라는 이탈리아 출신 음악가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배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놓고 배타와 배제로 유럽의 궁정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배타와 배제가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