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4 | [저널초점]
80년대 민중문학과 김남주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치열했던 삶
김남주의 삶과 나
이강 광주 사단법인 시민생활환경회의 상임이사(2003-09-23 10:07:47)
그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억압과 착취가 없는 ‘아름다운 사회를 실현하지 못하고 간다’는 그의 시처럼 짧고 장중한 유언 -살아남은 우리들에게는 과제-을 남기고 그만 고인이 된 것이다. 나는 내 육신의 절반이 잘려 나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내 제일의 벗이자 동지이고, 35년의 분신인 김남주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어디 나뿐이랴, 그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망연자실 비통한 마음으로 흐느껴 울었으며, 천지도 온통 소복을 입고 애통해 했다.
1960년 위대한 학생 혁명이 일어나던 해 김남주와 나는 고향 해남중학교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때 우리들은 입학식이 한참 지난 뒤에야 보결생으로 들어가 정원 60명이 훨씬 초과한 학급 75명중에서 남주가 71번 내가 72번이었던 것 같다.
남주는 장학생으로 합격되지 않아 광주 진학을 포기 했다가 뒤늦게 해중에 들어왔고, 나는 처음부터 해중을 합격했으나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교감선생이 입학금을 문제를 처리 해주었으니 입학식날 학교에 가보라고 하여 가보았는데 입학금 입금이 안 되어 입학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야 부랴부랴 입학금을 내고 해중에 들어갔던 것이다. 늦게 입학한 탓으로 우리들은 중간고사 시험 성적이 매우 우수하게 나올 때까지는 열등생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다.
학교 다닌지 2-3일 만에 4.19혁명을 만나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까지의 ‘위대한 애국자 ’이승만‘이라는 주입식 교육 내용에 비추어 엄청난 충격과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던 것 같다.
다시 1년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학교는 휴교조치가 내리고 뭔가 세상이 뒤숭숭하다는 어른들의 불안감이 우리들에게까지도 약간은 혼란스럽게 감지되어 지기도 하였다.
김남주와 나와의 본격적인 교우관계는 하대성 세계사 선생님의 교육내용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분은 세계사 시간에 그리스 로마신화, 플르타크 영웅전,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 동양의 사기 열전을 비롯 그 시대마다의 대표적 고전들을 우리에게 중요한 대목을 꼭꼭 낭독해 주시고 때로는 원문을 칠판에 적어주기도 하면서 청순한 시골 소년들의 가슴속에 꿈과 이상주의의 불씨를 지펴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감격하고 흥분하기도 하면서 한 소절도 놓치지 않으려고 거의 다 외우다시피 하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선생을 통해서 역사 중에 드러난 대표적 시대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고 둘이서 서로 토론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때 남주는 당시 조대부고생 이었던 자기 형님의 책을 통해서 나보다 항상 앞서가고 영어와 한문에 발군의 실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을 빌리면 국민학교 입학 전에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을 마치게 된 것이 자신의 어학공부에 큰 발전이 되어주었다고 하였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통학을 해오던 남주는 나의 자취방에서 3개월간 같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생활에서 우리는 평생 동지의 길을 변함없이 함께 할 피붙이 이상의 특수하고도 돈독한 우정의 싹을 틔웠다고 볼 수 있다.
매일 아침에 학교에 가면 우리는 영어단어 5개, 숙어 5개, 수학공식 5개씩을 작은 메모지에 적어 가지고 갔다가 하교할 때 서로가 채점관 역할을 하는 등 공부경쟁을 치열하게 하면서도 우정은 갈수록 깊어 갔다. 그때 벌써 동아일보를 구독하면서 우리는 정치적 야성을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교할 때는 가게에서 사과 하나씩 우유 한 병씩을 사마시다가 돈이 모자랄 땐 사과하나를 쪼개고 우유 반병씩 나눠 마셨다. 남주가 후일 「사과 하나 쪼개어 나누어 먹는 사랑」이라고 노래한 시는 그 당시의 삶을 그린 것이다.
남주의 영어 실력은 단어 숙어 문장 외우기는 나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긴 문장의 독해나 전혀 새로운 내용의 해석에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내가 늘 탄복할 때마다 자기는 국민학교 입학 전 한문서당에서 천자문 공부 덕이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는 그 무렵 함석헌 옹의 동아일보 전면게제의 ‘대통령에게 바란다’ ‘국민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등등의 공개서안을 읽고 통쾌감 때문에 지칠 줄 모르고 토론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함께 광주 고등학교에 응시하여 나는 떨어지더라도 남주는 붙거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할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나만 붙고 어이없게도 남주는 떨어지게 되었다. 합격생과 불합격생이라는 두갈래 길로 접어든 우리들은 그런 객관 현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광주에서도 수업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남주는 재수생으로 지내는 동안 남주의 영어실력은 점차적으로 향상되어 학습용으로 요약된 영어 원서를 수월하게 독파하게 되었다. 남주는 재수생이고 나는 고등학생이라는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구경, 고서점, 독서, 함석헌 옹의 광주 강연회 같은 과외활동에서는 언제나 함께 붙어 다니고 함께 토론을 하면서 십년을 보냈다.
남주는 1964년 광주일고에 합격하였고 나의 동생인 개석 군도 그때 남주와 함께 광주일고 신입생이었는데 그들의 우정도 동기 동창생이면서도 그때 이래 평생 동안 나라는 사람을 매개로 하여 남주형과 개석 아우로 호칭되는 인연이 생겼다. 우리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전혀 다른 학교에 학년도 다르면서 자기 학교에서 전혀 새로운 긴밀한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둘이서만 만나면서 독서와 고담춘론으로 무수한 밤샘을 통해 서로의 지적 성숙을 확인하면서 학교 공부와는 전혀 별개의 낭만주의적, 도가 등의 이상주의에 무한 매료되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영웅전을 읽으며 그 영웅을 흉내 내고 성자를 읽으면 성자를 뽐내고 노장을 읽으면 노장을 따르고 문학작품의 주인공들에게 한없는 우정과 연민을 느끼기도 하면서 우리의 감수성 많은 상상력을 한없이 키워갔다.
남주가 광주일고 2학년 때 1965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광주에서는 내가 다니던 광주고등학교가 고교로는 한국 최초로 도청 앞 광장까지 진출하여 전남대생들과 합류, 한판 멋진 공방전을 친 적이 있었다.
남주가 다니던 광주일고는 1919년 항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요람지로써 전통과 명예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광주일고는 끝내 데모를 하지 않았으니 나와 남주가 날마다 만날 때마다 팽팽한 현장감으로 얼마나 자랑스럽게 흥분하였을지는 누구라도 상상이 가리라. 그러나 남주는 자기 학교가 꿈쩍도 않고 입시준비에만 몰두하는 꼬락서리에 크게 실망하여 마침에 여름방학동안 고민하다가 2학기 때부터 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학교선생이 몇 번 가정 방문 와서 다시 학교에 나오라고 하면 두말없이 “내일 학교에 나갈게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해 선생을 돌려보내고 그 다음날도 여전히 또 안가고 이런 일이 3차례 정도 되풀이되다가는 끝내 자퇴처리 되었다.
그러나 남주는 이때 자퇴를 결행하면서도 시골 부모님이 겪을 실망감과 자신에 대한 기대로부터 배신감이 줄 충격에 무척 고민하였다. 남주 평생에 그토록 심각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나까지도 고교졸업을 한 학기를 남기고 한동안 남주처럼 자퇴를 해 버릴까 흔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마지막 한학기라는 점 때문에 학교를 계속 다녔다.
학교를 자퇴한 남주는 검정고시를 준비하여 2학년 동기생들이 3학년으로 올라갈 때 남주는 대입 검정고시를 합격하여 나와 다시 동급생이 되었으며 둘이는 대학입시에 보기 좋게 낙방하여 낭만적인 재수생활로 들어갔다. 3년의 재수생시절 우리는 우리 인생을 거의 규정 지어버릴 정도의 지적, 사상적 내용에 몰두하였으며 남주는 ‘사상가’ 나는 ‘정치가’로의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때 읽은 독서의 양은 그때의 동년배나 몇 년 선배들 보다는 훨씬 우수했다고 볼 수 있으며 함께 대화할 학우가 없을 정도였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재수생 시절 우리가 새롭게 만난 환희작약 어쩔 줄 몰라 몰입했던 서양의 Aramohlsm사상과 우리나라의 다산 선생 동학농민혁명 단제 신채호 선생 비판서 이긴 하나 mayxism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입시 준비와는 전혀 딴 세계에 대한 꿈과 낭만적 이상주의로 우리를 내몰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전 과목 시험인 대학예비고사제도가 생겨 이젠 우리의 대학 길은 영영 멀어져 버렸다며 부모님께 대한 뼈아픈 죄책감과 미래에 대한 무대책, 그리고 군 입영 나이에 대한 불만 등으로 입시 일기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1968년 남주는 전남대 영문과, 나는 전남대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영문과에서 남주의 인간적 교우이면서 사상적 청중이라고 할 수 있는 여학생들에게 “내 친구 이 강이 제대하고 오면 너희들 하고는 만날 필요도 없다고” 어찌나 자주 입버릇처럼 자랑을 해 ‘이 강’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자인가 궁금했었다고 나의 제대 후 첫 대면에서 그들이 나에게 말하였다. 남주는 나의 군 생활동안 항상 그 두 여학생과 대화(정치, 문화, 철학 등)를 나누고 나와 지낸 생활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우탕탕탕! 유신이다. 시월유신이다. 계엄이다! 라는 박정희 유신단행이 우리에게 준 추억은 청천벽력이었다. 우리의 삶과 미래까지도, 꿈까지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는 절망이상이었다. 이런 때일수록 나약한 지식인이나 패배주의자가 되지 말고 ‘역사의 현장에서 선인의 용기를 배우자’고 하면서 남주와 나는 동학 농민혁명 전적지 순례를 무작정 떠났다. 그때 시월 중산 하오의 따가운 햇빛아래 황토제 농민혁명 기념 탑에 이르자 우리말고도 60-70세가 되어 보이는 두루마기 한복쟁이 할아버지들이 말없이 목례 참배하고 가는 숙연한 모습을 보았다. 나는 녹두장군의 봉기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결단코 그 본의가 다른데 있지 않고......”을 외우고 그 자리에서 동학 농민혁명의 후예로서 반 유신 독재타도 투쟁에 일어설 것을 결의하였다. 녹두장군 생사를 비롯 이틀간을 더 답사하면서 우리의 결의를 굳혔고 말없는 ‘민중의 소리’를 대변한다는 뜻에서 「함성(陷城)이라는 비밀 지하신문 제호까지 결정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우리는 남주의 영문과 여자친구 두 분을 만나 ‘나는 무덤을 팔려고 한다. 그 무덤 속으로 박정희가 묻힐지 아니면 우리가 묻힐지 모른다. 그런데 그 무덤을 팔 도구를 살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도와 달라’고 남주가 매우 추상적으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분은 즉석에서 끼고 있던 예쁜 반지를 한분은 현금 20,000원을 지갑에서 꺼내주셨다. 조심하라는 말까지 하면서... 우리의 「함성」지 “민중의 소리”는 이렇게 아릿다운 여성들의 애국심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전대와 조대 그리고 시내 5개 고교에 까지 「함성」지를 살포하고 남은 유인물을 우리는 두 여학생에게 맡기고 잠적하였다. 나중에 그것이 물증의 화근이 되어 그 들도 법정에 서게 되었고 법정에서 ‘고문’시비가 발생하여 당시 수사관들이 소환되고 그들이 “고문 안했다”는 오리발이 너무도 센 것에 기절하는 사태까지도 일어났다. 국가 보안법 혐의로 상소심에서 징역 2년에 3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를 받고 구속 10개월 만에 석방되기 1주일 전에야 처음으로 가족면회가 허용될 정도로 혹독한 탄압 속에 우리의 감옥살이 및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때 함석헌 옹께서 직접 방청을 오시기도 하였고 Amnesty(국제 사면 위원회)의 고문조사단이 왔다가 면회가 불허되기도 하였다. 법정투쟁 주범으로 구속된 박석부(현 국회의원)선배를 비롯 우리 14명 피고인은 모두 의연했으며 10여 차례 공판은 이듬해 봄 광주지역 민청학련 학생운동의 못자리적 역할도 되었다고 들었다.
대학생 시절에도 교련수업이나 군 입대를 거부했던데 서도 그의 한결같은 삶을 알 수 있다. 조직이나 집단이 아닌 자연인으로서도 국가 권력이나 제도의 권위를 부정해버렸던 것이다. 그의 삶은 자연인 김남주로든 조직의 전사나 시인으로든 영어의 생활을 하던 때나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있을 때나 그 이전이나 한결 같았다. 부당한 것이라면 혼자이든, 여럿이든 구애받지 않고 일도양단의 자세로 맞섰다. 어느 상황에 있건 시대 상황이 요구하는 것을 결행했을 뿐이다. 「함성」「고발」지 그리고 민중문화 연구소, 남만전등 조직적인 운동에서도 그는 조직이 원하고 민족 민중 해방을 앞당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칼로 주먹으로 시로 싸웠다. 그리고 시인으로서는 온갖 잣된 논리 사상 주의를 타파하고 해방을 노래했다. 펜으로는 피사헌정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고인의 투쟁정신과 사상, 실천의 뒤에는 항상 인간적인 고뇌와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따스한 정이 넘치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꿈을 짓밟히는 현실에서 그는 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혁명을 노래했던 것이다. 일개 개인으로 국가권력에 도전했다가 부서지면서,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하며 자조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다스리고 일관된 삶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그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세상에서 서정적인 시를 써보고 싶었으리라. 오직 혁명적 정서 이외에는 다른 시상을 갖기 어려웠던 척박한 70-80년대를 살아오면서 딱 한편이라도 아름다운 서정시를 노래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김남주는 우리에게 너무 큰 과제를 남기고 떠났다.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라’는 고인을 사랑하는 길은 우리 모두 이 길을 함께 가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