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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 | [저널초점]
80년대 민중문화와 김남주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변혁에의 열망 김남주와 80년대 민족문학의 흐름
윤여탁 군산대 교수, 문학평론가(2003-09-23 10:04:57)
1. 70년대는 산업화를 지향하는 경제개발의 댓가로 자유와 평등과 같은 인권이 희생되는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 토대 위에서 ‘민중문학’은 성장하였고, 이후 80년대 민족 문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즉 암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보여주었던 70년대의 성과는, 당대는 물론 퇴행적인 역사를 반복했던 군사정권 아래서도, 문학이 현실을 형상화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래서 80년 초반의 우리 문학은 무소불위의 전권을 휘두르던 군사정권에 맞서 그 생존을 도모하던 민족을 형상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 글은 80년대의 바탕이 되는 70년대에 문단에 등단하여 전사(戰士)와 같은 삶을 살았던 시인을 통하여 80년대 민족문학의 성과와 의미를 점검하는 데에 받쳐질 것이다. 김남주! 꼭 만20년을 문학을 통하여 민족을 노래했던 시인 김남주! 그렇게 바라고 원하던 하나 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지난 2월13일 항쟁의 남도에 묻힌 김남주! 먼저 이 글은 지난 80년대 민족문학의 흐름을 이론과 창작의 측면에서 간단히 개괄하고, 이 속에서 불꽃과 같은 삶을 살았던 김남주 문학이 지니는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민족문학사에 꺼지지 않은 불길로 살아 있는 한 인간의 열정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2. 80년대의 우리 민족문학은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민중연대성의 기반을 튼튼히 하게 된다. 즉 민족과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군사독재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히게 됨으로써,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수립하게 된다. 이에 따라 민족문학은 현실의 여러 과제들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면 1980년 남도의 땅을 물들였던 광주 민주 항쟁에 대한 발 빠른 시적 형상화 작업이 진행된다. 이를 계기로 반민중적인 세력들의 후원자가 되었던 미국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된다. 아울러 분단된 조국이라는 인식도 반공 이데올로기의 벽을 뚫고 새롭게 세워지게 되었다. 특히 80년대 초반은 시의 시대였다. 시는 다른 장르에 비하여 몸 가벼운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고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비유, 암시 등으로 이런 현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5월시」「시와 경제」와 같은 동인 활동이 이런 대표적인 예이다. 이에 비하여 옥중의 김남주 시인은 적나라한 폭로와 풍자로 이 현실을 노래하는 ‘혁명시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담배종이에 못으로 눌러쓴 시! 철장 너머의 가혹한 현실에 대한 울분을 토로한 시! 이런 “땔나무꾼 장작 패듯 그렇게 우악스럽고 그렇게 사나”(「시의 요람시의 무덤」)운 시로 “조국은 하나다”(『조국은 하나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우리 민족문학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이 당시에 제기된다. 이런 논의의 전개는 80년대 초반의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려는 민족문학의 자구 노력과 이와 비슷한 시기 즉 198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변역 소개된 소위 원전을 통한 이론 정립 작업이 밑거름 되었다. 루카치를 비롯하여 동구나 소련(구러시아)의 문학 이론가들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됨은 물론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 사회주의 정통이론이나 미학론이 우리의 리얼리즘 논의에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1987년 6월 노동자 계급의 전선적 진출과 맞물리면서, 노동자 계급의 주체적 역량 성장의 문학적 형상화 노력들이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 구체적인 전개양상은, 소위 6월항쟁을 계기로 백낙청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민족문학론과 이를 비판하면서 제기된 김명인 등의 민중적 민족문학론, 조정환의 민주주의 민족문학론, 「노동해방문학」계열이나 노동자 문학예술 운동 연합의 노동 해방 문학론이나 노동 해방 문예론, 김형수, 백진기. 등 「녹두꽃」계열의 민족해방 문학론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론적 입각점에 따라 나름의 변별점을 보이면서 민족문학의 주체 논쟁을 전개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활발하게 창작되는 노동문학의 소개와 북한 문학의 소개를 통하여 어느 정도 창작적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박노해의 시와 방현석, 안재성 등의 소설에서 창작적 실천이 일정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이 논쟁도 어느 정도는 당대적 효용성을 지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쟁은 90년대에 들어 현실 사회주의 붕괴에 따른 변혁의 과정에 적절한 대응력을 보이지 못하고 말았다. 극단적으로는 이 논쟁의 각 부면에서 실천적 창작이 따라주지 못함에 따라 공허한 논쟁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 80년대 민족문학은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시를 중심으로 그 흐름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즉 ①광주 민중 항쟁의 시적 형상 창조 ②민중(노동자, 농민)적 형상을 형상화 한 시 ③민족분단을 극복한 통일 지향의 시④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변혁에의 열망을 표현한 시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 가닥들이 따로 떨어져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이들 제 흐름들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과 변화를 거쳤다. 또 앞의 세 가지 항목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 즉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변혁에의 열망을 표현한 시를 향하는 각기 다른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적 형상화의 변모 과정은 먼저 과주 민주 항쟁에 대한 고발을 노래한 시들로 나타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소설보다는 발이 빠른 시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어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들의 생존권과 사회 민주화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시나 소설들이 나오게 되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분단 문제를 새롭게 접근하는 통일 지향의 문학들도 독자들의 손에 들리게 된다. 이 중에서 전자는 민족문학의 주체 논쟁이나 6월항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의식 성장과 전선적인 진출에 촉발된 것이며, 후자는 광주를 통하여 새롭게 인식된 제국주의와 북한과의 인적․물적 교류가 그 활성화의 계기로 작용했다. 이를 중심으로 지난 10년간의 문학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면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민족문학의 모든 흐름을 온 몸으로 감싸 안은 사람이 바로 김남주이다. 김남주 시인은 1984년 시집「진혼가」를 간행한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가 땅에 묻힐 때까지 『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솔직히 말하자』『사상의 거처』『이 좋은 세상』등의 여섯 권의 시집과 『사랑의 무기』『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학살』『저 창살에 햇살이 1.2』등의 시선집과 많은 번역, 산문을 남겼다. 이 중에서 많은 글들이 삶의 대부분을 보낸 감옥에서 쓰인 것이다. 1973년 반유신 활동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979년에는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 사건으로 다시 철장 속에 묶인 몸이 된다. 그러다가 1988년에 만 9년 3개월 만에 가석방되어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나 밖에서나 민족과 민중들의 외침을 대신했다. 철창을 넘어 벽을 통하여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들은 시로 바뀌어,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졌다. 그는 “학살의 원흉이 지금 / 옥좌에 앉아 있다 / 학살에 치를 떨며 들고 일어선 시민들은 지금 / 죽어 잿더미에 쌓여 있거나 / 감옥에서 철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학살 3)고 고발하거나, “우리가 지켜야 할 땅이 / 남의 나라 군대의 발아래 있다면 / 어머니 차라리 나는 그 밑에 깔려 / 밟힐수록 팔팔하게 일어나는 보리밭이고 싶어요”(「조국」에서 분단 상황에 있는 족구의 운명과 시인 자신의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아마 우리가 살았던 폭악한 현실에 대한 이러한 솔직한 고백은 김남주가 아니고는 불가능했으리라. 80년대는 많은 민주화의 지도자 외에도 투사, 전사를 많이 배출한 시기이기도 하다. 김남주는 시인이면서 전사였다. 그리고 이런 과거의 김남주 덕분에 우리가 준비하는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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