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의 질병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베토벤의 귓병일 것입니다. 소리 예술을 하는 음악가가 청력을 상실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그것을 이겨내고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을 만들어 냈으니 처절한 운명과 싸워 이긴 놀라운 인간 승리의 기록이라 할 만합니다. 위대한 음악가들도 사람이니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 때로는 시대에 따라 유행했던 질병에, 또는 열악한 의료수준 탓에 작은 병을 크게 키운 경우도 많았습니다.
청력 상실을 딛고 일어선 베토벤 일화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베토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다른 질병이었습니다. 베토벤은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면서 삶을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을 들키고 싶지 않아 괴팍하게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감탄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후원자가 되었고 그 덕에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런데 미혼인 베토벤에게는 아들처럼 키우던 조카가 있었습니다. 카를이라는 조카인데 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의 송사를 거쳐 동생의 아내에게서 양육권을 빼앗아 올만큼 끔찍하게 사랑했습니다. 그런 카를이 1826년 대학시험을 준비하다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베토벤과 어린 조카는 의견충돌이 심했는데 조카가 충동적으로 일을 벌인 것입니다. 베토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카는 다행히 회복되었지만 둘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이 일로 베토벤은 크게 상심했으며 이것이 건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심신이 쇠약해진 베토벤은 그 해 여름 또 다른 동생의 집에서 휴양을 마치고 거처인 빈으로 돌아오다 결핵에 걸리고 맙니다. 그는 병상에 눕게 되었고 다음 해인 1827년 3월에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나머지 간경변증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음악가로서 청력을 잃게 되는 것은 청천벽력일 겁니다. 베토벤은 20여년에 걸쳐 서서히 청력을 잃어 갔지만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청력을 잃게 된다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잘 알려진 음악가 중 청력을 잃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말입니다. 동유럽 관광을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체코의 프라하입니다. 가이드들이 프라하를 가로지르며 도도히 흘러가는 몰다우 강을 바라보면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사람이 교향시 <나의 조국>을 작곡한 스메타나(1824~1884)입니다. 스메타나가 만 50세로 음악적으로 만개했던 1874년, 스메타나는 자꾸 귀에서 이상한 소리, 환청이 들린다고 호소했는데 6개월 만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스메타나가 갑자기 청력을 잃은 이유로 가장 유력한 것이 바로 매독이었습니다. 18세기 말, 19세 초에 유럽에 창궐하던 매독은 진행성 마비를 불러오는 데 많은 음악사가들은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된 이유도, 슈베르트가 요절한 원인도, 파가니니의 죽음의 원인도 모두 이 매독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갑자기 청력을 상실한 스메타나는 모든 공식적인 음악적 지위에서 사임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베토벤처럼 불굴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청력을 완전히 잃은 상황에서 그의 음악 이력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을 작곡해냈으니 말입니다. 그 작품이 바로 5년에 걸쳐 완성한 교향시 <나의 조국>입니다. 기억과 상상의 소리를 엮어 체코인들이 영원히 자랑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스메타나는 청력을 잃은 후 정신착란,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가 1884년 5월 프라하의 정신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청력 대신 시력을 잃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음악가도 있습니다.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린 바흐와 헨델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1685년 같은 해,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는데 마치 도플갱어처럼 죽음에 이르는 길도 닮아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말년에 시력을 잃었는데 그 이유가 같았습니다. 두 사람 다 백내장을 앓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음악사가들은 아마 당뇨로 인한 백내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두 사람 다 식탐이 대단해서 엄청난 대식가인데다 살도 많이 쪘었거든요. 하지만 그들이 결정적으로 완전히 시력을 잃은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먼저 백내장에 걸린 사람은 바흐였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악보를 그려대던 바흐는 눈이 어두워지자 매우 불편해 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큰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유명한 안과의사를 소개받았습니다. 존 테일러(John Taylor, 1703-1772)라는 영국 사람으로 당시 영국 왕실의 첫 공식 안과의사인데다 백내장 수술의 권위자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바흐는 기쁜 마음에 이 사람에게 초청해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기대가 컸지만 한 번의 수술로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한 번 더, 모두 두 번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테일러의 수술법이 좀 이상했습니다. 그의 수술법은 발와술이라고 하는데 얇은 꼬챙이를 눈 속에 집어넣고 백내장을 긁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수술을 받은 바흐는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고 오히려 수술 중 세균감염으로 3개월 만에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테일러는 아버지도 의사였고 본인도 정식으로 외과수술을 배운 의사로 눈병을 수술로 치료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실력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돌팔이이며 사기꾼에 가까웠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는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수술로 치료했는데 가는 곳마다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온갖 거짓말로 자신이 병을 고쳤다고 속이며 영업에 몰두했는데 심지어는 바흐의 눈도 고쳤다고 홍보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테일러 역시 말년에 실명을 하고 말았답니다.
헨델 역시 바흐와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헨델은 다른 의사 두 사람에게서 수술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자 테일러를 초청해서 세 번째 수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헨델 역시 수술 후 거의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헨델은 바흐처럼 바로 사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수술 후 7년을 더 살았으니까요. 바흐나 헨델 두 사람 모두 실명을 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작곡을 놓치는 않았습니다. 바흐는 워낙 수술 후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짧아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헨델은 달랐습니다. 그는 거의 실명한 상태에서도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거나 지휘하기도 하고 또 자신의 작품들을 새로 고치는 일을 해냈으니까요.
그런가하면 집안에서 내려오는 유전적 질환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음악가도 있습니다. 바로 멘델스존풍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데 일류였던 낭만파 음악가 멘델스존(1809~1847)입니다. 멘델스존은 38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타고날 때부터 그리 건강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엄친아처럼 자랐고 음악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넘치게 받으며 자랐습니다. 일찍부터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질을 보였지만 연습 도중 갑자기 찾아 온 왼손 마비를 잘 대처하지 못해 피아니스트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멘델스존은 30대 초반에 유럽 여러 곳에 연주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타고난 체력이 약했던 탓에 연주여행의 피로가 과로로 누적되어 건강이 크게 나빠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47년 4살 위 누나 파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맙니다. 멘델스존과 파니의 우애는 참으로 남달랐습니다.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의지했던 탓에 멘델스존의 상실감과 슬픔은 매우 컸고 더불어 건강도 급속하게 나빠졌습니다. 파니가 떠난 지 6개월도 안된 어느 날 마침내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뇌졸중이 일어났습니다. 멘델스존 가문은 선천적인 뇌동맥류에 의한 뇌졸중 질환을 갖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뇌졸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파니도 같은 병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멘델스존 역시 같은 병이 발병한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멘델스존은 발병 후 한 달도 안 되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음악사가들은 멘델스존이 죽기 전날 밤 병문안을 온 동생이 남긴 기록,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머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는 등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였고,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며, 북을 치는 흉내를 내는 등 괴이한 행동들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선천적인 뇌동맥류에 의한 고혈압성 뇌졸중에 의한 것으로 이것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병은 어떤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합니다. 하지만 병을 이겨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지요. 비록 병을 이겨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악의 순간에서도 존엄함을 잃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을 해간 그들이기에 존경받게 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