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한 거 맞니?' 어휴,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은지의 성적을 보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삼켰다. 나는 2년째 은지의 과외를 맡아서 하고 있다. 은지는 중3 때 나와 처음 과외를 시작했다. 공부를 안 하던 애가 하기 시작해서 그런지 처음엔 성적이 쭉쭉 올랐다. 덩달아 내 과외비도 10만원이나 인상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허나 성적 인플레이션은 단지 '과외 버프'일 뿐이었는지, 고등학교에 올라간 후부터 은지의 성적이 영 신통치가 않다. 사실 나는 얘 엄마도 아니고 담임도 아닌지라 성적을 갖고 잔소리를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주절주절 충고를 했다. 수능이 말이지… 대학이… 사회가… 어쩌고저쩌고. 윗사람으로서 나름 훌륭한 조언 이었다 만족하며 '나란 녀석, 언제 이렇게 멋진 어른이 됐지?' 생각했다. 하지만 은지 눈엔 내가 그다지 멋진 어른이 아니었나 보다.
"그런 말은 이제 그만 들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잘못 들었나? 물론 우린 비즈니스 관계이긴 하나 나름 애정해서 해준 충고였는데….
그날 과외 내내 난 은지에게 좀 꽁해 있었다. 과외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은지의 말을 곱씹어 봤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이. 제. 그. 만'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너무 많이들은 소리라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뜻 같았다. 나 말고도 은지에게 충고를 해줄 사람은 많았다. 거기에 철없는 언니로만 여겼던 나까지 똑같은 소리를 했으니. 은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충고에 대한 염증 같은 걸 가졌던 때가 있다. 충고는 입에 쓴 약과 같지만 때로는 약보다 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칭찬까진 아니더라도, 괜찮다. 수고했다. 다음엔 더 잘할 거다, 라는 따뜻한 밥 같은 말이 절실할 때가 있었다.
약은 병을 치료해주지만 나를 살찌우고 살게 하는 것은 결국 밥이었다. 특히 무언가를 막 시작해서 용기가 필요할 때, 이 사람한테 들은 소리를 저 사람한테 또 들어야 할 때, 나도 다 알고 있는 얘기일 때, 이미 나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충고는 그다지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명절에 집에 안 내려가는 백수처럼 충고 비슷한 것을 들을 만한 자리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하지만 요즘처럼 충고가 '소통'의 이름으로 나타나면 피하기도 쉽지 않다. 소통을 하자며 다가와서, 나는 말할 테니 너는 듣거라, 라는 식의 참신한 소통 방식을 구사한다. 무어라 반박이라도 하면 '충고가 아니라 소통을 하고자 하는 건데 왜 화를 내고 그러니'라는 표정을 짓는다. 결정적 한 방으로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스킬을 시전하면 나는 "네, 알겠습니다" 하며 끄덕거릴 수밖에 없다. 충고의 선한 동기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충고 근절 캠페인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충고라는 건 아주 조심스럽고 사려 깊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다. 이 사람에게 충고가 정말 필요한 시기인가, 잘 참고 있는 걸 괜히 들추는 건 아닌가, 꼭 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충고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가벼운 인사 정도의 말이 아니다. 충고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다. 지금 내게 할 기막힌 충고가 떠올랐는가? 그렇다면 좀 더 신중히 생각해봐라. 진짜 나를 위한 충고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