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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증여라는 이름의 소비에 중독되다
김경태(2015-09-15 12:42:39)

 

 

<종이 달>(2014)의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은 그동안 일상 속 인물들의 내밀하고 세속적인 욕망을 탐구하는데 있어 범상치 않은 솜씨를 보여 왔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주목해야할 지점은, 민낯을 들어내며 모두 까발려진 욕망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인물들을 감싸 안는 따뜻한 손길이다. 감독은 거리를 둔 채 그들을 냉철하게 관찰하지만 끝내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 편에 선다. 설사 그들의 욕망이 위반적일지라도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보다는 그들을 대신해 변명을 해주면서 연민을 품게 한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 속에는 선과 악이 없으며 욕망하는 인간 군상만 있을 뿐이다. 하물며 <종이 달>은 평범한 주부에서 거액을 횡령하는 은행원이 되는 ‘리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그녀에게 그가 저지른 죄의 값을 묻지도 않는다.

 

학창 시절, 리카는 학교에서 어느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일대일 결연을 맺어서 진행하는 기부에 참여한다. 자신의 돈을 받은 한 아이의 감사편지와 환하게 웃는 사진을 받으면서 비로소 ‘받는 것보다 더 큰 주는 것의 기쁨’을 느낀다. 그 증여의 희열에 도취된 그녀는, 시간이 지나 반 아이들이 거의 기부를 하지 않는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지갑에서 거금을 훔치면서까지 기부를 계속한다. 그녀의 기부는 종교적 교리나 도덕적 양심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선행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오로지 자신의 돈을 받은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주는 기쁨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 기부는 증여의 외양을 한 소비에 불과하다. 그녀는 돈을 주고 물건을 사듯, 돈을 주고 타인의 행복한 미소를 사며 소비의 쾌락을 느낀다. 그녀는 증여라는 이름의 소비에 중독된 것이다.

 

이제 막 계약직 직원이 된 리코는 금융상품을 팔기 위해 방문한 VIP 고객의 집에서 그 손자인 ‘코타’를 만난다. 그들 관계의 시작은 육체적 쾌락이었지만,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없는 코타의 형편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육체적 쾌락을 뛰어넘는 예의 그 증여의 쾌락에 다시금 빠져든다. 코타의 행복을 위해 그녀는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대고 그 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25년 차의 꼼꼼하고 충실한 동료 직원 ‘스미’에 의해 그 사실이 발각된다.

 

영화 초반부터 리코와 스미는 대립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돈이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즉 돈의 유통에 대해 궁금해 하며 경제잡지를 보는 스미와 달리, 리코는 내 지갑의 돈이든 고객이 맡긴 은행의 돈이든 그것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구별할 필요가 없다. 스미에게 돈이 견고한 실상이라면 리코에게 돈은 소비하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허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리코는 소비/증여를 통해 은행 금고 속에 죽어 있는 돈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코타의 할아버지가 리카가 추천하는 금융상품에 가입한 이유는, 다른 은행원들은 이자를 받으면 다시 저축하라는 조언을 했지만 그녀만은 이자를 받아서 즐기라고 했기 때문이다. 돈이 돈을 낳는 자본의 증식에 무관심한 그녀는 소비지상주의의 화신과도 같다. 구매 행위를 통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돈의 출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돈에 대한 이런 태도는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의 생리에 대치될 뿐만 아니라 그녀의 횡령이 결국 은행의 맹점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리코가 자신의 모든 범죄 행위가 드러난 후에 느끼게 된 비참함에 대해 말하자 스미는 정말 비참하냐고 반문한다. 스미는 자신으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그런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해버렸기 때문에 리코가 비참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단, 그 일탈은 여기가 끝이며 이젠 책임질 순서이다. 그러나 리카의 질주는 여기에서 멈출 수 없다. 은행 회의실에 갇혀 있던 리카가 창을 깨고 도주하려고 하자 스미가 그녀를 붙잡는다. 리카는 스미를 돌아보며 “같이 갈래요?”라는 제안을 한다. 사회적 규율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가는 스미는 현실적 제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소비/증여의 삶을 살고 있는 리카에게 분노와 선망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리카가 던지는 그 달콤한 유혹의 말은 본명 스미에게 위협적이다. 스미는 그녀를 놓아주고 현실에 안주한다. 물론 그 유혹은 지출의 욕망을 적절히 억누르면서 적금을 붓고 투자를 하는 관객들을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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