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사실 잘 어울리지 않는다. 흔히 숲은 ‘자연’을, 자본주의는 ‘개발’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목에 두 단어가 나란히 있는 것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산촌[里山]자본주의’라는 것을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 ‘산촌자본주의’는 방치되는 산림(山林)자원 등을 다시 활용해 에너지를 자급자족하는 ‘지역공동체’를 재건하자는 주장이다. 다만 정면으로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는 방식의 대안 제시이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가격경쟁력에 밀려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목재를 연료로 활용해 에너지 자급을 이루자는 게 첫 번째 주장이다. 이 밖에 농사짓기를 포기한 ‘경작포기농지’의 활용방안에 대한 내용도 있다. 두 번째는 인구가 감소한데다가 노령화되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을 재조직해 ‘자본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내용이다. 세 번째로 공동체는 폐쇄적이지 않고 오히려 정보화된 세계 속에서 서로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교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중요한 점은 ‘자본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런 일본의 대안 찾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급속한 노령화 등, 그들이 겪고 있는 현재의 문제들이 우리가 겪을 미래일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생각해볼 점이 있다.
사실 자본주의와 ‘문명화’의 대안 찾기는 오래되었다. 특히 산업화로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현상으로 망가져가는 공동체를 복원하자는 이야기는 유명한 고전인 『오래된 미래』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라는 책은, 『오래된 미래』의 일본식 적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차이가 있다면 『오래된 미래』에서 등장하는 라다크가 당시엔 아직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인도의 오지였다면, 이 책에서 등장하는 일본의 산촌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한 일본에서 산업화와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된 지역이라는 점이다.
작은 차이이지만, 이는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라다크에 대한 최근의 여행기를 보면, 이제 라다크는 여느 관광지처럼 개발이 진행되어, 그때의 공동체 문화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반면 일본은 자본주의의 기준에서 ‘가치 없다’고 내팽개쳐진 지역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다. 즉, 이미 한번 자본주의를 제대로 겪어본 사람들이 추진하는 대안적 지역공동체이기 때문에, 라다크처럼 자본주의가 침투한다고 공동체가 망가질 것 같지는 않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자본주의 국가 일본에서 왜 이런 대안 찾기가 시작되었을까? 우선 부동산 버블의 붕괴 이후,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급격한 노령화 등이 근본적인 배경일 것이다. 여기에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해일로 인한 피해, 그중에서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가장 직접적일 듯하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이 사고는 원전의 위험성을 직접 느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도시속의 삶이 전기 같은 에너지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즉,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도시는 빛도 물도 구할 수 없는 ‘사막’같은 곳이 되어 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 자연재해로 인해 파괴되고 정전으로 어두워진 도시에서, 자본주의 문명과 도시의 일상이 얼마나 망가지기 쉬운지를 직접 느낀 것이 원인일 것이다.
문제는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산촌자본주의’라는 것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아마 그냥 이 책만 읽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같이 읽은 책이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라 좀 비판적으로 읽게 되었다.
『21세기 자본』은 흔히 수학과 모델을 활용해 추상적으로 연구하는 다른 경제학 서적들과 다른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한 책이다. 즉, 18세기부터 21세기 초까지 소득과 자본에 대한 여러 나라의 통계를 분석해 현대 자본주의에서 보이는 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려 했다. 이에 비하면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는 자본주의가 가지는 문제의 핵심에는 다가서지 못하고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의 대책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첫 번째로 에너지 자급이 가능한 공동체는 인구가 적은 산간지역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역설적이게도 ‘산촌자본주의’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공동체가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공동체의 유지가 어렵다는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산림자원은 재생가능한 자원이기는 해도, 재생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공동체가 많아지고 커질수록 목재가 부족해지면, 산은 민둥산이 되고 더 이상 에너지를 자급할 수 없게 된다.
두 번째로 이런 대안 모색이 대지진과 해일 등의 비상사태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문명이 붕괴된 상황을 겪은 뒤에 나온 것 치고는 너무 낙관적이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 문명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면, ‘산촌자본주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선 목재로 에너지 자급이 가능하다고 해도, 산간지역은 경작지가 적어 식량 자급은 어려울 가능성이 많다. 게다가 의약품 등 현대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상품들의 공급이 끊기는 것도 위험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대책은 언급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의 산촌자본주의만 언급하였다.
세 번째로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는 듯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동체의 삶이 그럴듯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보상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때문에 ‘화폐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도, 막상 이를 즐겁게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적인 예로, 우리 일상에서 ‘화폐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일’의 단적인 예가 바로 육아일 텐데, 의외로 이 일에 대한 성취감이나 만족감이 높지 않다는 점은 낮은 출산율이 대변하고 있다.
결국 ‘산촌자본주의’는 자원고갈과 에너지 문제 등 일본을 비롯해 현대 자본주의 국가가 겪는 많은 문제들은 해결하기에는 너무 작은 대안이다. 하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가치는 크다. 이 책의 가치는 그런 태도와 노력에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