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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 | 연재 [20대의 편지]
나의 베껴쓰기의 역사
김민정(2015-09-15 12:33:26)

뜨끔. 가슴속 무언가가 찌릿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괜히 주변 눈치를 보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의 단편소설 「전설」이 일본 문학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우국」의 한 구절을 표절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의혹이 제기되고 며칠이 지난 지금은 작가의 입장 발표와 출판사의 사과문 소동, 네티즌들의 증거 확보를 거쳐 의혹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지켜보며 내가 느끼는 이 따끔함은 뭘까? 왜 이러지? 질끈 눈을 감아본다. 그 느낌을 외면하고 싶어서. 그런데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이번엔 다시 슬며시 눈을 떠본다. 희미한 기억들이 점점 선명하게 하나씩 눈앞에 펼쳐진다. 용기를 내 마주 보기 시작한다. 이 따가운 느낌의 정체를. 그리고 고백해보려 한다. 부끄러운 내 베껴 쓰기의 역사를.

장면1. 수능 시험을 마친 후 이것만 참으면 끝이라고 매일 나를 다독이며 논술을 준비하던 열아홉의 겨울. 논술학원에서 제일 먼저 한 건 합격자들의 글을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비슷하지 않게 느껴지도록 재구성하는 연습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좋은 문장을 따로 골라 적어두는 것. 학원 선생님은 늘 강조했다. “시험에서 비슷한 주제가 나오면 이 문장들을 기억했다가 인용하세요.” 뜨끔. 인용이라. 결국 표절 아닌가? 이게 논술의 취지에 맞는 걸까? 에이, 웬 오버야. 일단 합격부터 해야지, 남들도 다 이렇게 할 텐데 뭐. 따가운 그 느낌은 일단 대학에 붙고 보자는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장면2. 대학 생활의 반은 과제 제출이었다. 마감 기한에 조바심 내며 글을 쓰는 것은 정말 고통이었다. 심할 때는 단 한 줄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2학년 때, 문학에 관한 교양수업을 듣게 되었고, 소설 한 권을 읽고 비평을 쓰는 과제가 주어졌다. 새벽까지 과제를 붙잡고 있던 나는 내가 쓰고 있던 글의 나머지 한 단락을 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작가와 작품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쓴 리뷰를 검색했다. 그리고 좋아 보이는 것들을 골라 나머지를 채웠다. 결과는 A+. 뜨끔. 나는 이 점수를 받을 자격이 있나?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 정직하게 말씀드리고 성적을 다시 받을까? 에이, 뭐 어때. 학점은 잘 받는 게 좋잖아. 점수를 포기하고 양심을 지킨다고 내가 얻을 게 있겠어? 그렇게 부끄러운 A+는 나에게 남았다.

몇 번의 베껴 쓰기가 나에게 진정한 부끄러움을 깨닫게 한 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직접 부딪치면서부터였다. 내 결과물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할 때, 내가 땀 흘려 이뤄낸 것을 남이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을 때, 남의 것을 탐내고 노력 없이 취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뜨끔’한 느낌을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애써 가리며 지나왔던 과거를 이제야 진심으로 반성하게 되었다.

많은 20대들이 창작의 고통 앞에서 유혹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리포트나 자소서를 쓸 때 Ctrl+c, Ctrl+v를 무수히 반복하며, 남의 것을 짜깁기하고 베껴 쓸지 모른다. 생각하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혹은 양심 따위 잠시 모른 척하더라도 잘했다고 인정받고 싶어서. 하지만 그렇게 쓴 것이 진짜 나의 것일까? 그럴 바엔 차라리 실패하자. 실패의 기억은 오래가지 않는다. 성공을 위한 씨앗이라 위안 삼을 수도 있지만 부끄러운 기억은 오래 남는다. 이 정도는 괜찮아, 누가 알겠어 라며 유혹의 손을 잡는 순간, 그때 생긴 마음의 송곳이 언젠가 자신을 따끔하게 찌를 것이다.

성시경이 고백은 변비 같은 거랬다. 고민 끝에 오래 묵혔던 진심을 꺼내는 고백이야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다. 글도 마찬가지다. 나의 생각을 수없이 곱씹고 발전시켜, 나올 듯 안 나올 듯, 고통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나온 글. 그런 글만이 읽는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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