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 감독의 <연평해전>은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연평도 근해에서 남북 해군 간에 벌어진 해전을 영상으로 옮겨 놓았다. 참수리 357호의 정장 ‘윤영하 대위(김무열)’와 조타장 ‘한상국 하사(진구)’, 그리고 의무병 ‘박동혁 상병(이현우)’이 주요 등장인물들이며, 이들은 그 해전에서 전우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이다. 그들은 예정된 참혹한 사건을 앞두고 차곡차곡 전우애를 다져간다.
마침내 연평해전 장면을 비교적 장시간에 걸쳐 정교하게 보여준다. 초점은 북한군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전우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에 맞춰져있다. 압도적인 사건 앞에서 잠시 넋을 잃었던 박동혁 상병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서 부상당한 전우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한편, 조타실에서는 한상국 하사가 치명적인 부상에도 불구하고 배의 키를 놓지 않고 북한군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수전증이 있는 그는 배의 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오른손을 키에 결박시킨다. 죽음에 임박한 윤영하 대위는 그에게 전우들을 꼭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이와 같은 그들의 용감한 행동들은 군인으로서 국가/민족을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며 정들었던 전우들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남북분단이라는 대립적 상황은 이미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 된지 오래다. 한민족에게는 ‘제2의 자연’과도 같은 일상이다. 따라서 도발의 주체인 북한을 비난하면서 그들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그 피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 된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는 더 이상 남북 분단의 대립을 소재로 한 여타의 전쟁영화에서 볼 수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 즉 형제이면서 적이라는 ‘분열된 자아’가 유도하는 페이소스는 찾아볼 수 없다.
영화에는 북한군의 NLL 침범과 선제공격에 대한 뚜렷한 의중이 제시되어 있거나 이를 파헤치려는 노력하지도 않는다. 북한군의 막무가내 식 도발은 예상하기 힘든 자연재해와 닮아 있다. 자연재해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견고한 대비책이 필요하듯이 북한군과의 국지전으로부터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강경대응이 아니라 해군 지휘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재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전쟁영화’보다는 오히려 ‘재난영화’의 플롯 구조를 띤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는 북한과 남한의 해묵은 이념 대립에 대한 문제제기로까지 서사를 전개시키지도 않는다. 북한을 향해 진지하게 책임을 묻거나 반공 정서를 고양시키지도 않는다. 심지어 북한의 존재감은 결말에 이르러 서사 속에서 사라진다.
해전이 일단락되면서 영화는 곧바로 영결식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영화는 그들을 추모하는 전우들의 모습만을 보여 줄 뿐, 그들의 영정 사진은 보여주지 않는다. 잠시 후, 당시에 촬영한 실제 영결식 화면이 삽입되고 그제야 우리는 전사자들의 영정과 마주한다. 물론 그 전사자들의 얼굴은 배우들의 것이 아니라 실제 인물들의 그것이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봤던 해상에서의 총격전이 진짜로 벌어진 사건임을 재차 환기시킨다. 감독은 그 총격전이 여타의 전쟁영화에서처럼 쾌감을 주는 과잉된 스펙터클로 소비되고 마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하여 앞서 배우들이 연기했던 장면들은 다큐멘터리의 기나긴 ‘재연’ 장면처럼, 그 실제 영결식 화면의 거친 입자 속으로 수렴된다.
에필로그에서는 상상적 ‘재연’을 통해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것은 연평해전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펼쳐졌을,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을 응원하는 그들의 안온한 일상이다. 이로써 영화의 지향점은 명확해진다. 그것은 (매우 근원적인 해결책인) 남북통일에 대한 거창한 염원이 아니라, 북한의 도발을 예의주시하며 전우들과 함께 나누는 소소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