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매년 누군가가 죽고 있다.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깊은 내상을 안긴다. 용산 참사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세월호, 그리고 메르스까지... 이러한 죽음에 사람들은 책임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상반기를 강타한 메르스는 바이러스성 감염질병이다. 메르스 감염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바이러스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메르스 감염과 확산의 책임을 현직 대통령에게 돌릴까? 메르스와 같은 감염질병이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생물학적 인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환경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쥐와 바퀴벌레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경쟁하며 살아간다.
정의와 관용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웬델 베리-
의료 인류학자이자 의사인 폴 파머가 에이즈를 통해 구조적 불평등을 고발한 책 ‘권력의 병리학’의 첫머리에 인용한 글이다. 감염질병은 웬델 베리의 이같은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임을 폴 파머는 ‘권력의 병리학’을 통해 이야기 한다. 에이즈의 온상으로 알려진 아이티의 상황이 사실은 자본의 탐욕과 이로 인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것임을 폴 파머는 주장한다. 감염병을 단순한 의학적 질병이 아닌 인문학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염병과 인문학’은 대중이 이러한 관련성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감염병의 철학적 의미(정과리), 전염병 역사(여인석), 감염병을 다룬 문학(서홍관, 최은경, 김수이, 박형서, 이병훈, 이동신), 감염병과 예술(이주은), 그리고 감염병과 문화(소영현, 남웅, 지제근)이다. 각 장의 저자는 감염병을 다루는 의사만이 아니다. 국문학자와 같은 사회적으로 인문학자로 구분되는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감염병을 인문학의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라고 여겨진다.
‘감염병과 인문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이다.
첫째, 의사만이 감염병의 전문가는 아니란 것이다. 13명의 저자들은 모두가 의사는 아니다. 국문학자, 문화관련 종사자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망라되어 있다. 감염병의 사회문화적 관련성을 의사외의 다양한 분야에서 철학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감염병’의 본질이다. 정과리는 감염병을 “병이 났다”는 사실에 “병이 옮겨졌다”는 사실을 보태서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는 감염병을 집단적 수준에서 고려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정과리는 주장한다(p.14). 정과리의 감염병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메르스의 확산을 개인이나 병원에 돌리는 무책임한 이들의 행동과 인식이 무지한 것임을 보여준다.
셋째, 감염병과 자본과의 상관관계이다. 저자 중 한명인 이일학은 천연두를 중심으로 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제기 한다.
“인류는 천연두 바이러스를 박멸했다. 하지만 또 다른 감염병의 통제에는 실패한다. 십이지장충, 황열, 딸기종, 말라리아, 그리고 소아마비 등이 그것이다. 인간이 협력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2003년 인도 카르나타가 주에서 소아마비가 발생했을 때 3만 7천명의 의사와 2천대의 차량, 1만 8천개의 아이스박스 동원, 그리고 의료진이 모든 집을 개별 방문하여 420만 명에게 백신을 접종한다. 우리 사회는 감염병에 이만큼의 자원을 쓸 만큼 여유로울까?”
천연두를 박멸할 수 있었던 조건이 더 이상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본의 이익에 부합되는지에 따라 이들 감염병을 통제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수익이 안 되는 질병에 더 이상 기업과 학계가 투자 하지 않아 희귀병 환자들의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 영화 ‘로젠조 오일’과 같은 질병이 늘었다. 메르스가 창궐해도 백신이 부재인 현재 상황은 자본과 감염병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넷째, 감염병이 사회적 편견을 지닌 사회적 질병임을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13개의 장 중 상당 부분을 문학과 감염병과의 관련성을 추적하고 있다. 문학은 질병을 매개로 인간사회를 표현해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러시아에서 프랑스군의 패퇴가 전투 전날의 나폴레옹 콧물감기 때문으로 분석하는 것은 거대한 민중의 힘을 무시하는 것이라 이야기 한다. 러시아 민중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질병을 이용한 것이다. ‘감염병’은 동시대 사람들의 역사 및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한 인식을 분석하기 위해 문학이 이용하기 좋은 소재이다. 이 책에서 감염병과 문학과의 상관성을 언급한 것을 이러한 의도 때문으로 풀이된다. ‘감염병과 인문학’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질병에 대한 관점을 풀어내고 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로 집약된다. 감염병은 단순한 의학적 질병이 아닌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지표라는 것이다. 조선 말기 콜레라, 스페인 독감, 인디언과 중남미 원주민의 인구를 10분의 1로 줄여버린 제국주의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를 비롯한 질병, 그리고 사회구조적 모순이 증폭되어 에이즈의 온상이라는 굴레를 덮어 쓴 아이티 등이 사례에서 이러한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책의 13명의 전문가들은 이를 강조하고 있다. ‘감염병과 인문학’은 감염질병이 가진 인문학적 의미를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한 노력이 돋보인다. 다만 짧은 지면에 문화, 예술, 문학, 철학적 의미를 모두 담으려다 보니 각 주제의 저자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준비한 연구 성과를 충분히 서술하지 못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에이즈, 결핵, 문학, 예술 등 감염병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에 대한 보다 세밀하고 심층적인 연구가 보충된 저자들의 뒤이은 저작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