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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 | 연재 [클래식 뒷담화]
베토벤의 오페라, 못 쓴걸까? 안 쓴걸까?
문윤걸(2015-08-17 15:43:19)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베토벤,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오페라는 단 한편만 남겼습니다. 베토벤은 오페라에 관심이 없었을까요? 아니면 기악, 성악, 합창, 춤 등이 어우러지는 무대음악은 자신이 없었을까요? 당시 오페라는 보통의 작곡가들도 수없이 만들어댔는데 설마 베토벤 같은 대단한 작곡가가 오페라를 어려워 했을 리 없을 테니 오페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요?


베토벤이 오페라를 하나만 남긴 걸 보면 오페라에 큰 흥미가 없었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토벤이 오페라를 작곡하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모차르트와 관련이 있습니다. 모차르트를 꼬드겨 오페라를 작곡하게 하고 이를 극장에 올려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시카네더(Emanuel Schikaneder)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카네더는 자신이 직접 모차르트 오페라에 출연하기도 하는 등(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친구로 등장했던 인물로 자신이 <마술피리>의 파파게노로 분장한 공연 포스터가 남아 있습니다) 모차르트 오페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는데 모차르트가 그만 일찍 세상을 떠나자 모차르트를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시카네데르는 베토벤을 제2의 모차르트로 만들려고 점찍었고 빈으로 데려와 숙식을 제공하며 오페라 대본 하나를 건넸습니다. 이 오페라가 완성되었더라면 베토벤의 첫 오페라가 되었겠지요. 하지만 베토벤은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2개의 아리아만 작곡한 채 지지부진하다 이 작품은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이 오페라 작곡을 멈춘 건 아니었습니다. 시카네더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여러 대본을 고르고 골라 결국 오페라를 완성했는데 <피델리오 Fidelio>라는 작품이었습니다. 비록 베토벤은 단 한편의 오페라만 남겼지만 오페라 <피델리오>에는 베토벤이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가 음악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어 이 한편만으로도 충분하다 할만 합니다.


베토벤은 1804년에 <피델리오> 작곡을 시작하였는데 <피델리오>는 혁명기에 놓인 당시 유럽의 상황과 맞닿아 있습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전후하여 유럽에는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피델리오>는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출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프랑스대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는데 <피델리오>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메시지를 전하려 했지 싶습니다.


<피델리오>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 배경은 교도소입니다. 교도소의 지하감옥에 플로레스탄이라는 혁명가가 억울하게 갇혀 있습니다. 플로레스탄의 아내인 레오노레는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서 남자로 변장을 하고 피델리오라는 이름으로 교도소의 보조간수로 위장 취업해 있습니다. 어느 날 교도소에 플로레스탄의 친구인 법무대신이 시찰하러 온다고 하자 교도소장은 플로레스탄을 처형하기로 합니다. 플로레스탄을 죽이려 하는 순간 피델리오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며 남편을 구하려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법무대신이 도착하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플로레스탄은 석방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남편을 구출하려 애쓴 아내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된다는 내용의 오페라입니다.


이런 내용의 오페라를 <구출극, 구출 오페라>라고 합니다. <구출극>과 <구출 오페라>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크게 인기를 모았습니다. 혁명가나 애국지사들이 감옥에 갇히고 이들을 구출해내는 영웅 같은 시민들의 이야기는 갑갑한 현실에 대한 통쾌한 반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프랑스 혁명기에 프랑스의 뚜르(Tours) 지방에서는 유명한 정치단체인 자코벵당의 한 회원이 감옥에 갇히자 그의 아내가 남자로 변장하여 남편을 구출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실화는 “Leonore, ou L’amour conjugal (레오노레 혹은 결혼한 사랑)이라는 연극으로 공연되고 있었는데 베토벤은 이 이야기에 크게 흥미를 느꼈습니다. 베토벤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민중들의 투쟁과 삶을 지지하고 있었고, 프랑스대혁명의 상징인 자유, 평등, 박애정신에 깊이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델리오> 이야기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드라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베토벤은 처음 이 작품의 배경을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은 프랑스의 혁명열기가 유럽사회에 퍼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고 계몽주의와 반동정치 등 사회 전반적으로 정치적 혼란기에 있어 검열이 까다롭자 검열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해 배경을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지방으로 바꾸었을 정도로 이 작품에 애정을 가졌습니다.

베토벤이 이 작품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이작품을 10년 동안 4번을 고치고 또 고치고 하면서 결국 첫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최종본을 완성했고 이 작품에 <피델리오>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앞의 작품들과 혼동하지 말라는 말까지 남긴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작품을 수정할때마다 서곡을 새로 작곡해 이 작품은 4개의 서로 다른 서곡을 가지고 있습니다(서곡들만 따로 연주하기도 하는데 3개의 <레오노레 서곡>과 <피델리오 서곡> 1곡이 있습니다).

 

이처럼 오페라 한 곡을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만들었던 베토벤이 왜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을까요? 베토벤은 아주 까다롭고 또 진지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귀족에 이은 시민계급의 등장으로 최고의 오락거리로 통했던 오페라의 수요층이 폭
넓게 확산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시민들이 좋아할만한 재미나는 오페라를 만들면 돈도 꽤 모을 수 있었구요. 그런데 베토벤은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이상이나 신념을 드러내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많은 작곡가들이 시민들이 좋아할만한 재미나는 소재, 즉 통속적인 사랑이야기나 막장드라마 같
은 바람피우는 이야기, 마법이나 주술이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이야기 등을 가지고 오락적이고 유희적인 오페라를 양산하고 있었는데 베토벤은 이를 매우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는 특히 모차르트 이후 유행하던 자유분방하고 통속적인 희극 오페라인 오페라 부파(opera buffa)를 혐오하면서 이런
소재를 자주 이용했던 모차르트에 대해서도 “음악은 놀랍도록 천재적이지만 소재가 저속하고 부도덕하다. 어떻게 저런 오페라를 만들겠는가. 나는 저런 부도덕한 내용의 오페라를 결코 만들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토벤의 이러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통속적인 드라마를 좋아했습니다. 사실 시민들에게 오페라는 예술작품이라기 보다는 오락거리이며 소일거리였기 때문이지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 역시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구출오페라>가 대유행이었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오락거리라기에는 너무 무겁고 진지했기 때문일 겁니다. 더군다나 이 오페라가 초연된 1805년과 수정 후 재초연된 1806년 빈은 프랑스의 혁명군이 점령해 베토벤의 팬이었던 빈의 귀족들이 모두 피난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유명한 베토벤의 오페라라 해서 점령군 프랑스 장교들이 극장을 메웠
지만 춤과 발레가 등장해 볼거리가 많은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와는 달리 무겁고 진지한 연극같은 공연이 2시간이 넘게 지속되고 그나마 독일어로 극이 이루어진 탓에 반응은 최악이었습니다. 베토벤으로서는 큰 굴욕을 맛본 셈이지요 (그래서 승부욕이 발동했을까요. 이 작품을 대폭 수정해서
프랑스 점령군이 물러나고 빈의 귀족과 시민들이 돌아오자 다시 공연을 올렸고 비로소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후 베토벤은 오페라를 한편 더 만들기 위해서 고전문학 작품들을 살피는 등 대본을 물색했습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을 향한 인간의 투쟁, 계몽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하
여 운명에 저항하는 삶의 소중함 같은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담아낼만한 작품을 찾지 못했습니다(베토벤이 오페라로 만들어볼까 했던 작품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인데 작곡에 착수하지는 못한 채 사망했습니다).

 

이처럼 베토벤은 당시로서는 통속극 정도로 여겨졌던 오페라 한 작품을 만드는 데도 예술가로서의 이상을 실천하려 했습니다. 작품을 통해서 시대정신을 드러내려 했고, 우리 사회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말하려 했습니다. <피델리오>는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
니다. 동시에 서로에게 의리있고 충실한(Fidelio는 영어의 Fidelity(충실한)에서 온 뜻입니다) 부부(또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있는 오늘날까지 베토벤의 <피델리오>가 주는 메시지는 유효한 것 아닐까요. 베토벤은 서로에게 충실한 부부의 사랑
을 경험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은 끝내 미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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