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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 | 연재 [20대의 편지]
쓸모 있어야만 하나요?
어고은(2015-08-17 15:39:32)

“쓸모없는 인간.” 어릴 적부터 언니에게서 줄기차게 들은 말 중 하나다. 언니가 자기 대신 보낸 엄마 심부름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혹은 언니가 신신당부한 가요 프로그램 녹화를 깜빡하고 놀이터에서 놀았을 때 등 셀 수 없을 만큼 ‘쓸모없는 인간’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언니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왕왕 퀴즈로 낸 뒤 “그것도 모르냐”며 비아냥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쓸모없고 무식하기까지’ 한 사람이 됐다. 어리다고 해서 ‘쓸모없다’란 말이 주는 모욕감의 정도가 덜하진 않았다. 그 말을 듣는 게 끔찍이도 싫었지만 작은 반항의 마음조차 품지 못했다. ‘4살 터울’이란 위계의 힘이 작용했던 건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언니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탓인지는 모르겠다.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택한 길은 저항이아닌 나와의 투쟁이었다. 투쟁의 방법은 책 읽기였다. 무식을 벗어던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쓸모를 찾는 데 유용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읽은 책이 하나둘 쌓이고머리도 더 굵어지자 ‘인간은 쓸모 있어야만 가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형태가 만들어지기 전에 ‘쓰임새’가 미리 정해져 있는 사물과 달리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스스로 ‘본질’을형성해 간다고. 언니가 언어폭력을 내뱉던 순간 나는 나의‘쓸모’를 형성해가는 과정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쓸모’가 언니가 생각하는 ‘쓸모 있다’의 기준과는 다른 모습의쓸모였을 수는 있겠지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언니의 인정은 내게 더 이상 중요치 않은 것이 됐다. 쓸모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실존’만으로도 나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된 셈이다.

하지만 언니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달콤한 자기 만족을 누릴 새도 없이 대학 졸업 이후 나는 다른 차원의 ‘인정 투쟁’을 맞이해야 했다. 수십, 수백 명의 인사 담당자에게 내쓸모를 인정받아야 ‘대학 이후의 삶’도 가능한 탓이다. ‘인정 투쟁’은 인사 담당자뿐만 아니라 같은 처지에 놓인 취업준비생을 향하기도 하는데,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자신의 쓸모를 증명받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토익 800대는 어렵나요?” “비(非)상경계면 대기업은 포기해야 하나요?” 등 자신의 스펙을 놓고 취업이가능한지 아닌지를 불특정 다수의 취업준비생들에게 물어보는 식이다. 스펙에만 한정된 건 아니다. 자신의 얼굴 혹은 전신 사진을 게시판에 올리기도 한다. 이른바 ‘얼평(얼굴평가)’ ‘몸평(몸매평가)’ 글이다. 그 글 밑엔 5점 만점에몇 점 등 댓글의 향연이 펼쳐진다. 개인의 능력으로 여겨지는 스펙뿐만 아니라 외모 또한 주요 평가 대상이 되니‘외모도 경쟁력’이란 말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스스로의 가치를 타인의 평가에 기대려는 청춘의 모습이 씁쓸하다가도 나 또한 취업시장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일원인데누가 누구를 안쓰럽게 여기는 건지, 자기기만도 정도껏 해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란 이름의 ‘쓸모 증명서’가 꽉 차지 않으면 마치 사회생활을 시작할 조건조차 갖추지 못한것인 양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마당에, 상대방과 나 사이의 끊임없는 저울질은 역설적이게도 위로가 된다. 인정을 갈구하는 커뮤니티 글들 또한 점점 상향 평준화돼가는 스펙 경쟁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자위의 방편일 터다. 불안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보다 근본적인위로는 ‘넌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란 말임에도, 무책임한허언에 지나지 않는 걸 알기에 선뜻 위로를 건네지 못하는상황이니 사르트르의 말이라도 빌려야겠다.“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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