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그곳에서 자라다가 고등학생 시절에 임실필봉농악을 접하였다. 이후 필봉농악에 입문하여 올해로 13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풍물굿판에서 장구만 칠 줄 알았던 나는 세월이 지나면서 각종 시설물을 설치하기도 하고, 음향기계도 다룰 줄 알게 되었으며, 무대 의상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또한 작품을 기획할 때도 있고, 무대 조연출을 맡기도 하며, 심지어 연기자 되어 대사를 치기도 한다.
입문 연차가 늘어남과 동시에 공연 현장에서 복합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경험하였는데, 지금도 아찔하고, 생각만으로 어지럽기까지 하다.
첫 번째 기억은 필봉마을에서 이뤄지는 ‘필봉 정월대보름굿’ 공연 때의 일이다. 한 겨울에 야외에서 하다 보니 챙겨야 할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장작도 준비해야 하고, 눈이 오면 공연 마당에 흙도 깔아야 한다. 필봉마을 어귀부터 마을 안까지 쌓인 눈도 쓸어야 한다. 언젠가는 며칠씩 함박눈이 내렸는데....과장하자면 임실에서 서울까지 쌓인 눈을 치운 것 같은 적도 있다. 달집 지을 대나무도 베어야 하고, 이 천 여명의 삼시 세끼 준비도 해야 한다. ‘필봉 정월대보름굿’ 공연을 치르기 위해서는 한 달여 동안 적어도 50명 이상이 눈코 뜰 새 없이 준비를 한다.
언젠가 나는 정월대보름굿 공연에 공연자이면서 시설사업운영부장을 준비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그 해는 겨울 날씨의 매서움을 보여주는 듯 칼바람이 불어 쩍쩍 얼어붙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구경 오시는 분들 추위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바람막이 텐트를 치는데 이 일은 생각보다 많은 소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일하다가 그만 텐트를 고정시키는 안전핀 하나를 빠트려 버렸다. 마음속으로 걸렸으나 ‘뭐, 핀 하나 정도야...’라는 생각에 괜찮으려니 했다. 공연은 무사히 끝났고, 다음날이 되어 뒷정리를 하러 공연장으로 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안전핀 하나를 고정시키지 않았던 집 채 만한 텐트는 바람에 날려 뒤집어진 채로 멀찌감치 굴러가 있었다. 눈앞의 광경에 아연실색한 나는 만약 이것이 공연 중에나, 혹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날라 갔다면...아!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8월 중순이 되면 필봉문화촌에서 ‘필봉 마을굿축제’ 공연이 이뤄지는데, 이 공연 때는 농악을 중심으로 다양한 무형문화재 공연들을 볼 수 있으며 재능기 대회가 있어 각 종 동호인들이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 출연 인원만 1,000여명에 가깝다보니 구경 온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제공해야 할 음식의 양은 엄청나다. 필봉문화촌은 필봉산을 마주하고 앉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공간은 3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공연 때는 음식청이 2군데로 나뉘는데 양 쪽에서 모자라거나 필요한 것을 재빠르게 조달해 주는 일을 담당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느 한 해 내가 음향담당과 함께 그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공연 시작을 앞두고 음향 테스트를 하고 있는데, 윗 단 식당에서 밥과 찌개를 올려 주라는 지원 요청이 왔다. 공연을 앞두고 시간이 촉박했지만 차로 잠깐 다녀오면 된다는 생각에 필요 음식을 실고 급히 이동을 하는데 아뿔사! 탑 차 뒷문의 한 쪽 고리가 걸리지 않은 것이다. 식당으로 가기 위해서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가는데 차 뒷문은 열리고 음식은 미끄러져 내려오고...상상해 보라. 쏟아진 찌개는 맨 아래 단까지 벌겋게 흘러내리고, 냄비는 데굴데굴 굴러가고, 하얀 밥알은 뭉턱뭉턱 길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급히 자원 봉사단에 지원 요청하여 씻어내고, 주워 담아 수습은 하였으나, 당시 타들어 갔던 내 심정을 누가 알까 싶다. 마음이 급하면 일에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일들을 겪은 이후 나는 급할수록 느긋하게 일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 이야기는 소소한 사건이 아닌 다재다능해진 나의 능력에 대해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싶다. 필봉문화촌 한옥마당에서는 매주 토요일이면 ‘웰컴투 중벵이골-춤추는 상쇠’공연이 열린다. 이 공연은 4년째 지속되고 있으며 4월에 시작하여 10월까지 이뤄지는 상설공연이다. 이 공연은 다른 공연과 달리 농악을 바탕으로 한 연극중심의 공연으로 나는 여기서 조연출이며 음향을 담당하고 ‘봉필’이라는 제법 비중 있는(?) 배역까지 맡고 있다. 극중에 봉필이 고향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결심을 어머니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가겠다는 봉필과 만류하는 어머니의 대화는 눈물바람이다. 실컷 울고 난 다음의 장면은 마을에 경사가 나고 축하잔치가 벌어지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는 상쇠가 되어 꽹과리를 친다. 옷 갈아 입고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1분 30초 정도! 탈의실로 뛰어가면서 엉엉 울고, 옷 벗으면서 눈물 닦고, 더거리(상쇠복) 입고 꽹과리 들고 무대 위로 뛰어나오며 환하게 웃는다. 숨 쉴 틈도 없다. 전문 배우도 하기 힘든 장면을 풍물 판에서 장구만 치던 내가 나름 연기를 소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박수도 받고, 아주 가끔이지만 칭찬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음향기계를 철수하고, 소품을 정리하고 청소를 한다. 어디 나만 그러한가? 이 공연을 펼치기 위해 70살이 넘은 어머니 배우들은 공연시간 훨씬 전부터 오셔서 공연장 풀을 뽑고, 음식을 장만하고, 마루와 의자를 닦는 일을 맡아 한다. 40∼50대 보존회 형님들은 소품을 제작하고, 무대를 수리하거나 설치 등의 일을 맡는다. 30대의 우리들은 음향, 의상, 소품, 홍보, 진행, 스탭 등의 업무를 맡고 10대∼20대 젊은 후배들은 마당을 쓸고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며, 마지막 뒷정리를 담당한다.
하나의 공연이 완성되기까지에는 수십 명의 힘이 모여야 가능하다. 수십 가지의 능력들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공연 문화계 현실은 대부분 한 사람이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전문성 부족이라는 부정적 견해도 있겠다. 그러나, 남다른 애정을 갖고 하나 하나에 정성을 들이는 공연은 보는 이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장점도 있다. 마당 쓴 놈이 굿도 치는 거라고 하신 우리네 선배님 말씀처럼 손 때 묻은 공연은 나에게 다가오는 감동도 달랐다.
음향과 시설물 설치, 밥을 조달하고, 봉필 역을 10년간 더 하다보면 얼추 전문가 흉내라도 내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공연을 준비하는 현장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애정 있게 만들다 보면 오늘 보다는 좀 더 나은 공연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