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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 | 연재 [수요포럼]
건강한 생활문화예술의 힘
(2015-08-17 15:16:14)

 

 

사람들이 일궈낸 공간, 문화바람
인천이라는 도시가 문화적으로 척박하다는 느낌을 못 받았는데 예전부터 ‘문화 불모지’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인천 공무원조차도 서울이 가까워서, 공연 볼 사람은 서울로 간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인천은 감정노동을 많이 해야 하는 지역이다. 대부분의 인천사람들은 경쟁적이고 날카롭다. 감정이 피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천에 있다가 대전이나 전주 같은 지역에 내려오면 상대적으로 훨씬 인정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을 신청하면서 문화바람의 구조가 되게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왜 그러냐면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고 기획해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풍’부터 ‘놀이터’, 문화로가게 등 각각 하나씩 인큐베이팅 된 것이다. 소풍은 극장이다. 놀이터는 밴드 동아리 연습실이다. 문화로가게는 작가와 시민을 이어주는 매칭 프로그램이다. 보통 행사나 공연 관련 섭외를 할 때 기획사를 연결하는데, 문화로가게가 그 중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이 모든 사업들이 미리 계획돼서 생겨난 게 아니다. 다 필요성을 느껴서 만든 구조다. 이 사업과 공간들을 묶어줄 수 있는 명칭이 필요해서 ‘문화바람’이라 명명했다. 문화바람 대표를 따로 뽑은 적이 없다. 저도 명함에 문화바람 ‘대변인’이라고 적어 놨다. 여기 꽃 그림이 있다. 우리가 ‘꽃’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이 있다. 첫 번째는 ‘아름답다’다. 꽃이 언제부터 아름다웠을까. 구석기 시대에도, 신석기 시대에도 꽃이 아름다웠을까? 제가 아름다움에 대해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고 있는 설은, 구석기 시대 때 막 수렵을 시작할 무렵에는 꽃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꽃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토끼를 잡으러 막 쫓아가는데, 토끼가 꽃밭에 들어가면 수렵하는 사람 입장에서 되게 짜증났을 거다. 또 설득력 있는 자료가 있다. 선사시대 벽화를 보면 꽃을 그린 벽화가 없다. 꽃 한 송이를 벽에 하나쯤은 그릴법한데 안 그렸다. 신석기 시대로 넘어오고, 정착생활을 하고 농경생활을 하면서부터 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마 반복되는 패턴이 발견됐을 것이다. 꽃이 펴야 열매가 열리는구나. 꽃은 생명이고, 꽃이 펴야 우리 가족이 식량을 먹을 수 있고, 풍요롭다. 꽃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앞서 이야기한 꽃의 예처럼, 문화예술은 무조건 아름다운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모더니즘 이후 문화 패러다임이 있는데 그 전에도 그랬냐는 것이다. 물론 좀 달랐다. 예술대학이 생기고, 예술학과라고 하는 특정과가 생기고,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 짓기 위해 비평문화가 생겼다. 그러한 방식이 형성되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문화예술은 ‘무조건’ 다 해야 되기 때문에 시민도 배우고 아무나 다 배우고 그냥 받아들이지 않나. 꽃처럼, 봤을 때 그냥 아름다워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가 발생했다. 그런 점에서 문화가 가지는 의미가 어떤 의미냐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바람이 있기까지
2005년도 문화바람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 8년 정도는 ‘찌질하게’ 지냈다. 건물 지하에서 월 5만원씩 내고, 한 20-30명씩 모여서 동아리도 만들고, 날씨 좋으면 천 두르고 야외영화도 상영하고, 주최·주관을 어디에서 하는지 관심도 없는 사람들 천 명 정도 와서 놀고 가고 그랬다. 인천은 250만 광역시다. 제가 있던 단체는 너무 작아서 정책제안을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정리를 하고, 문화수용자 운동, 문화소비자 운동라고 이름을 지었다.
인천의 지역 작가들한테 물어보면 인천 시민들은 문화 활동을 위한 작품 구입이나 공연을 안 본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시민들한테 들어보면 인천에는 볼 게 없고, 할 게 없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부딪혔다. 그러다보니 적극적인 문화수용자가 많으면 공연도 보고 작품도 사지 않을 것이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눈썰미가 올라가면 문화산업적인 측면도 좋은 방향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시민의 문화적 감수성은 대학을 나온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었다. 시민들의 커뮤니티 안에서 생겨난다. 8년 동안 생활문화예술동아리 활동을 통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소통, 남을 배려하는 것, 협동하는 것,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기타 동아리 활동을 통해 목숨 걸 일이 없다. 그냥 기타의 선율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느낀다는 것. 그거면 충분한 것이다. 사람들이 생활문화예술에 대해 얘기하면 꽃꽂이 얘기하는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때마다 제가 설명한 것은 생활 체육은 생활 속에서 이뤄지고 있었는데 생활 예술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생활체육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닌가. 생활예술도 마찬가지다. 좋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프로스포츠의 프로선수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일이 얼마 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제가 생각한 논리에 따르면, 88년을 기점으로 스포츠에 대해 국가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슬로건을 기획재정부에서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생활체육활동 장려를 위해 막 지원했다. 동네마다 테니스장이 생기고, 족구장이 생기고, 그러고 나니까 사람들이 스포츠에 대한 감각이 생긴 것이다.
귀명창이 명창을 만든다는 말 들어보셨을 거다. 귀명창이 없으면 명창은 그냥 농사짓는 할아버지다. 노래하는 할아버지, 그걸 누가 봤을까. 사람들이 보기 시작했다. 관객이 생긴 것이다.사람이 모이는 것을 기업이 보고, 자본이 보게 됐다. 기업이 야구 구단을 사거나 축구 구단을 운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클럽이나 구단 이름이 지리산, 설악산 같이 자연물을 본 따 만든 이름이 없다. 다 기업의 이름이다. 기업이 하는 거다. 기업의 자금이 들어가는 거니까 훈련을 더 세련되게 하게 될 것이다. 기량이 더 늘어나고 관객도 더 재미를 느낀다. 전 이걸 생태계로 보는 것이다. 문화생태계도 그러한 방식이어야겠다. 우리 지역의 예술가 이름, 지역의 연출가 이름 아는 사람이 솔직히 별로 없다.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관심을 가지게 하려면, 생활예술을 활성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순서인 것 같고 토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8년 동안 어떤 동아리를 만들 것인지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회원을 심하게 많이 늘려보자’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회원을 늘리면, 의회나 행정에서 우리들의 얘기 들으러 오지 않을까라는 이런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문화바람 회원의 성격을 무엇으로 규정할까 고민했고, 적극적인 멤버십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단순히 회비만 내고 내가 이 곳에서 뭘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닌,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문화바람 신청서의 내용이다. ‘우리 만원씩 모아서 양질의 공연을 공짜로 봅시다.’ 이 내용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실제로 250만 인천시민이 공연 하나 보기 위해 서울 혜화동에 다녀오면 반나절의 시간이 날아가고 10만원이 우습게 깨진다. 이렇게 공연을 즐기는 문화바람 회원들이 늘더니 생활문화예술 동아리는 저절로 계속 늘어났다.
나중에는 문화바람 회원이 들어오는 것보다 동아리로 유입되는 파이가 더 커졌다. 그래서 동아리 연습실을 구하게 됐다. 복지재단의 법인 건물이었는데, 월세 80만원에 보증금은 1000만원이었다. 카페트를 깔고, 방음장비 설치까지 다 해놓고 이 곳에서 300명 정도의 회원들이 참여를 했다. 초창기 동아리의 대표들이 월300만원의 CMS 금액이 들어오면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회의를 문화바람 상근자와 함께 결정하곤 했다. 그게 어떤 의민지 나중에서야 알았다. 동아리 공간의 이용자에게 공간에 대한 주인의식을 강요할 때, 주인의 권력은 권한을 줘야 주인의식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적극적인 문화수용자가 되려면
시민이 적극적인 문화수용자가 되면, 작가들의 경우 다품종 소량생산의 문화상품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비판적인 선택으로 문화산업의 질과 방향을 견인할 수 있다. 또한 시민의 문화적 감수성은 생활예술동아리의 활동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이렇듯 생활예술동아리 활동은 스스로 소통할 수 있는 힘과 자기 표현, 배려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소풍’이라는 공간은 극장이다. 40명만 들어와도 만석이 된다. 억지로 앉으면 90명까지 앉을 수 있다. 공간이 좋은 게, 아마추어라고 해서 아무데서나 공연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조명도 있고 관객도 있음 공연하는 사람의 자존감이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또 다른 아이덴티티가 생긴다.
예를 들어, 어떤 할아버지가 천덕꾸러기였다. 할머니가 매일 술만 먹는다고 구박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가족들이 와서 할아버지 공연하는 것을 보고 ‘가수’라고 부르는 거다. 할아버지 얼마나 기분 좋겠는가.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정식으로 권위 있게 공연을 해야 되는 걸 그 때 느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자신이 속한 동아리 앞에서 공연하는 것인데도 ‘무대에 섰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떨림을 준다. 무대 뒤 1.5미터 되는 대기실에 우황청심환 소주 맥주가 다 준비돼있다. 연습했던, 그 한 곡 부르는 게 떨려서 무대에 오른다. 그런데 그 무대를 평생 못 잊는 것이다. 무대 위에 오른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생활예술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무대에 서기까지의 시간이 보통 3년 정도 걸린다. 준비한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연습 공간, 지도교사, 그리고 프로그램이 있어야 된다. 안정적인 연습공간이 있어야 모임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다. 동아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일단 해방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연습 공간 안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2007년도에는 회원들 간의 교류의 시간을 갖게 됐다. 각자 자신들의 동아리 활동만 열심히 하다 보니, 자신이 속한 동아리 회원 말고 남의 동아리 사람을 만나볼 기회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신입회원 스무 명 정도가 되면 모아서 교육을 했다. 문화바람에는 ‘이러이러한 동아리가 있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인천의 문화가 바뀔 수 있다’는 내용이 교육의 골자였다. 이 그림은 ‘10년 후 문화바람’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한 조가 발표한 그림이다. 말도 안 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동아리 활동에서는 뒷풀이가 중요하니까 1층에는 술집, 2층에 사무실이 조그마하게 있고, 나머지 3,4층은 다 동아리 방이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공간 ‘소풍’에서 한 50미터 떨어지면 건물이 하나있다. 이 곳 앞마당에는 차를 열여섯대 정도 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동아리 연습이 끝나고 뒷풀이를 하던 도중에 그 건물주에게 전화를 해서 월세 가격을 물었다. 돌아온 답은 보증금 1억5천에 월세 950만원.
‘우리 회원이 많은데 다 같이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으면 건물 임대를 할 수 있지 않겠어?’라는 자신감에 찼다. 왜 자신만만했냐면, 문화바람의 극장 ‘소풍’, 연습실 ‘놀이터’를 그렇게 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집단 착각에 빠졌다. ‘나’ 혼자서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마음먹으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저금통을 샀다. 1000개의 저금통 박스를 주문한 것이다. 1000명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저금통을 회원들한테 나눠주고 지인들한테 나눠주고 각자 이름을 다 쓰게 했다. 그렇게 두 달간 모금했다. 그러던 중 마침, 문화재단에서 생활문화예술동아리를 위한 공간을 지원하겠다는 사업공고가 떴고, 응모해 선정이 됐던 것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문화바람 건물은 이전에 산후조리원 건물이었다. 두 평정도 되는 조그만 방에 화장실이 방마다 있는 것이다. 화장실 바닥, 타일이 다 도자기여서 깨부수는데 상당히 힘들었다. 그걸 깨서 마대자루에 담는다. 가지고 내려오면,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업에 종사하는 회원이 실어간다. 회원들 모두가 문화바람 공간을 조성하는 일에 참여했다. 시간이 정 안되는 사람은 식사시간 때 햄버거 같은 배달음식을 시켜줬다. 십시일반 모여 즐겁게 만들었다. 건물 공사가 다 끝나고 이사를 하면서 아까 말씀드렸던 그 그림을 발견했다. 보는 순간 소름이 확 돋았다. 2011년 9월에 완성이 된 문화바람 건물은, 1층 휴게시설을 겸한 술집, 2층이 사무실 ,3,4층이 동아리 연습실로 구성되었다. 그 그림이랑 다른 것은 옥상에 파라솔만 없다는 것. 그때 정말 간절히 원하고 바라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감적 소통과 생활 예술
생활예술은 생활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전문예술은 트렌드에 되게 민감하다. 생활예술은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예술의 기능이 다르다. 거기에 여러분 같은 매개자가 만나면 동아리가 생기기도 한다.
1974년도에 미국에서 케익 믹스라는 걸 만들었다. 주부들의 일손을 줄이겠다는 확신하는 믿음으로 만들었는데 출고하자마자 만들었는데 안 팔렸다. 통제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통제의 환상이란 권한이 없는 뭔가에 대해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다. 그러던 중, 이미 만들어진 케익 믹스에서 되레 한 두가지를 뺐다. 그리고 자기가 케익 믹스 만드는 일에 개입했을 때, 가령 계란을 하나 푼다던지 식용유를 더 붓는다는 식으로 선택권한이 생겼더니 그 때부터 엄청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문화바람은 이렇게 모여서 동아리 축제를 기획한다. 무엇을 기획 하냐면, 축제의도와 장소, 날짜, 기획/연출, 운영, 정리, 뒤풀이 그리고 나서 동아리마다 두 명씩 스텝을 한다. 축제 전 스텝들이 모여서 워크숍을 했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축제 스텝을 난생 처음 해본다. 일단 축제 전에 준비 시뮬레이션을 한다. 의자 배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람 안내, 출연진 부스 관리 등 일을 분배한다. 일단 해보고 나서 자세하게 짠다. 심지어 의자 운전하는 트럭은 누가 할 것인지 까지 아주 디테일하게 짠다.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촬영을 한다든지, 다른 임무들이 공평하게 주어진다. 이렇게 ‘끼가번쩍 축제’를 두시부터 아홉시까지 한다. 중간 중간 빠져나가는 사람을 막기 위해서 맨 마지막에 대 합창 코너가 있다. 문화바람 식구들이 다 모여서 한다. 아침이슬 같은 노래를 부르는 데 이 모습이 장관이다. 행사를 이렇게 마치고, 뒷풀이까지 다 해줘야 정식적인 행사가 끝난다. 축제의 꽃은 무대에 서는 출연진이 아니라 스텝이다. 이 사람들이 스스로 기획해서 나가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스텝 뒤풀이 장소도 따로 만들고, 미리 세팅을 다 해놓는다. 스텝들이 행사 정리를 마치고 다 모이면 서로 칭찬도 해주면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든다. 생활에서 예술이 아름다운 이유는 금융이나 의료, 돌봄, 교육, 구직활동을 생활예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생활예술은 문화적으로 매개할 수 있는 역할이다.
어떤 사업을 하거나 무언가 추진을 할 때, 왜 하는지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처음에 세운다. 그러던 중 제안한 것이 마을 활성화 콘셉트로 하고, 축제위원 홍보, 축제하는 날 서비스를 부탁드렸다. 본래 식사비용으로 400만원은 있어야 된다. 작년에는 4000원 짜리 티켓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주변에 식당 주인들에게는 축제 끝나면 돈으로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행사 당일 날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음식 하나를 먹으러 가서 두 개씩 준다던지, 4000원 짜린데 6000원짜리 음식을 내어주는 등 근처 상가 상인들의 인정을 마음껏 펼쳤다. 그들의 이유는 명료했다. 식당주인으로서, 손님으로서 서로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것.
축제에서의 상은 멋쟁이상 명품상 등수 개념 안 나게 수평적으로 명칭을 지었다. 그리고 상품에 대한 것은 동네 정육점에 내려가 상의했다. 그랬더니 정육점에서는 한우국거리 1등급 한 근, 도자기 공장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하는 따님이 내놓은 찻잔 두 세트, 식당 5만원 회식권, 순대국집 5만원 회식권, 문화바람쌀롱 회식권 등 다양한 상품을 십시일반으로 모아 내놓을 수 있었다.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별 다른 욕심이 없다. 부담스러운 사심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반응이 있다. 소통의 문제가 아니다. 생활 예술을 매개로해서 만나면 평등, 신뢰, 익숙함, 소통이 된다. 완주의 사례에서 참고한 건데, 첫 사업은 규모가 작더라도 반드시 성공해야한다. 작은 성공(Small Success)이 쌓여야 한다. 1차적으로 저런 게 주차장을 만들어볼까. 동원이 필요하잖아요. 공동작업장의 참여주민은 동이 활동으로 안전하고 익숙한 관계에서 공감적인 소통관계를 만든다. 마을 경제 공동체는 마을 내 소비와 생산의 순환구조 만들어간다. 1년 동안 마을의 추억이 주제가 되어 함께 마을 축제를 만든다. 시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문화예술 공도체가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윤이 아닌 인간적인 공감대에서 먼저 출벌해 경제공동체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극복해야 하는 과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란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다. 이 현상 때문에 지역의 공간 유지를 하는 데 있어 제일 허덕인다. 서울의 혜화동도 그렇고 어딜 가나 문제가 다 크다. 문화바람의 상근자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 이제는 활동을 통해 직원들이 100만원 이상의 수입을 버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제가 속한 ‘문화바람’이라는 시민문화예술공동체가 절대 바람직한 모델은 아니다. 행정의 지속가능성과 문화바람이 균형을 잘 맞춰나가야 되고 여러 가지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지원받지 않는 단체 스스로의 자생력도 생기고, 오너쉽이 생겨난다. 집값이 올라가서 사람들이 떠나는 이런 일이 사라질 수 있다. 행정이 시민을 볼 때 신뢰하지 않는다. 시민도 행정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시민이다.
씨앗에는 자양분이 있다. 자양분으로 인해 싹이 트고, 꽃이 된다. 한 송이의 꽃이 피기까지 온도, 습도가 각각다 다르다. 최적의 습도를 만들어주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줄 것이다. 시민이 씨앗이면 각자의 사람들이 가진 자양분을 통해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문화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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