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이야기 '도리화 귀경가세'>
나는 이주민이다. 20여 년 동안 서울에 살다 고창으로 내려와 고창농악의 맥을 잇고 있는 이주민 굿쟁이다. 사람과 굿이 좋아 고창 땅에 자리를 잡은 지 얼추 20년이 됐다. 이주민의 시선으로 볼 때 고창은 갖고 있는 유산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2012년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고, 고인돌 등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유형유산도 많다. 복분자, 장어 등 먹거리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고창하면 특별히 떠오르는 문화콘텐츠는 없다. 판소리를 여섯 바탕으로 정리한 동리 신재효, 여성 최초의 명창 진채선, 20세기 최고의 여성 명창이라 불리는 김소희 모두 고창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를 비롯한 고창농악보존회 식구들에게 고창의 대표 브랜드 공연을 기획하는 일은 이곳의 무형유산을 잇는 예인으로서의 과업이었다.
한옥상설공연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게 됐다. 우리는 고창의 자랑인 농악을 중심으로 신재효와 진채선의 사랑 이야기를 무대화하기로 했다. 고창을 판소리의 성지로 만든 이들의 가슴 절절한 이야기가 관객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특히 고창 주민에게는 지역의 역사가 깃든 이야기를 농악으로 접하는 새로움을 주고,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이곳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무형의 문화예술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고창농악과 지역 예술가들의 앙상블>
'도리화 귀경가세'는 고창의 예인들이 몸과 머리를 맞대어 제작한 작품이다.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이한 고창농악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국악예술단'고창'이 연주를, 고창에 터를 잡은 배우 이충하씨와 정수인씨가 각각 신재효와 진채선 역을 맡았다.
이외에도 이름난 마당극 연출자이자 고창농악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남기성 선생님을 연출로 모시고, 전통공연계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는 서후석 음악 감독과 고창출신 춤꾼인 서정숙 안무를 수장으로 앉혀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보존회 입장에서 우리 식구가 아닌 사람들과 협력한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그동안 보존회가 무대에 올렸던 작품은 주로 농악 중심의 공연이었고, 제작에서부터 연출, 출연까지 모두 보존회 식구들 중심으로만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변화를 주고 싶었다. 보존회 내부에선 "단체가 성장하기 위해선 다른 주체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처음엔 조심스러웠다. 좋은 공연을 올리기 위해선 각 주체들끼리의 진정한 소통이 필요한데 이는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5개월 남짓. 절대 길지 않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모두 '전통 예술의 길'을 걷는 예인이라는 것, 대부분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소통은 잘 이뤄졌다. 그 결과 지금까지의 공연에서 구성원들 간의 '케미'는 상당하다. 확인하고 싶다면 매주 토요일 7시 반에 고창읍성 내 도예체험관으로 오시라.
<'그리움'에 집중하는 과정>
우리의 콘셉트는 '버라이어티 감성농악'이다. 농악을 중심으로 춤과 극, 기악 등이 한 무대에 어우러진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흔히 농악은 오직 흥겨움을 전달하는 장르로 알려져 있는데, 이뿐 아니라 다양한 감성도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버라이어티 감성농악'이라는 단어는 생경하지만 결국 관객을 감동 시켜 좋은 무대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기존의 여느 공연과 비슷하다.
좋은 무대란 연희자가 관객 한 명 한 명과 소통할 수 있는 무대를 말한다. 소통이 되기 위해선 감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감동을 받는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보존회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모든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답은 '그리움'이었다. 진채선이 신재효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 신재효가 진채선을 아끼고 기다리는 마음은 모두 그리움으로 귀결된다. 이에 대해 제작진 간의 이견은 없었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해본 경험이 한 번씩은 있었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큰 판을 위해… '먹·놀·자 프로젝트'>
'도리화 귀경가세'는 고창농악 차원에선 큰 판을 벌이는 것이다. 5개월 동안 이어지는 장기적인 판이기 때문에 대중성을 갖춰야만 했다. 만약 이 판이 서울에서 벌어졌다면 충분히 '입소문'만으로도 흥행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도리화 귀경가세'는 서울과는 3시간,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광주광역시에서는 40분이나 떨어진 곳에서 열린다. 기존의 상설공연이 크게 흥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충성도가 높은 관객층은 보존회를 사랑하는 고창 주민들과 전국 각지에 흩어진 고창농악 전수생뿐이었다.
장기 공연을 위해선 '새로운 관객'을 발굴해야만 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고창의 '먹·놀·자 프로젝트'가 완성됐다. '먹·놀·자 프로젝트'는 고창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은 물론, 고창에 살면서도 제대로 지역을 둘러보지 못한 고창 주민을 위해 만들어졌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고창을 찾은 여행객과 고창 주민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어 공연 관람과 관광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고창에는 볼거리, 먹을거리 등 자연 유산, 유형 유산이 풍부하다. 문제는 일일이 제휴를 맺는 과정이었다. 흔히 "전라도는 모든 식당이 맛집"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창에서도 유효한 명제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현지인들에게 입소문이 난 식당을 섭외했다. 멀리서 온 관광객을 위해 관광지와 숙박업소와도 제휴를 맺었다.
홍보팀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18곳의 음식점, 관광지, 숙박업소와 먹·놀·자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게 됐다. "홍보와 관객 유치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공연의 수준을 높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외부의 압박을 받기도 했다. 물론 공연의 수준은 최상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연출과 출연진들의 몫이다. 나의 역할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이 공연을 보러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 펼쳐진 2회의 공연에서 우리는 합격점을 받았다. 첫 회에는 마련된 객석보다 100여 명의 관객이 더 오셔서 진땀을 빼기도 했다. 현재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의 여파로 공연이 2회 연기됐지만 오는 27일 재개된다. 곧 여름휴가 시즌이다. 판소리의 성지 고창에서 먹·놀·자 프로젝트와 함께 '도리화 귀경가세'를 관람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