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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3 | [문화저널]
속된 지역 이기주의로 매도 되어서는 안된다 백제부흥운동의 현장 주류성은 어디인가
천경선 부안문화기행반 사무국장(2003-09-19 09:48:08)
지난 199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전국에서 가장 후진적인 국립공원으로 그 오명(?)을 자랑하고 있지만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빼어난 경치와 경승지가 많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변산 팔경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월명암의 '서해낙조'에서부터 봉래구곡. 내소사, 개암사, 직소폭포 등 수많은 명승지를 거느리고 있는 서해의 진주 귀걸이 이곳 변산반도가 단순히 국립공원으로만 주목받고 있는 건 역사적 재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데서부터 출발된 겉치레 명성이다. 오늘 우리는 백제 최후 '항전의 넋'이 천년동안이나 중음천을 떠돌아 겹겹산으로 울창한 숲이 도고 냇물이 되어 흐르는 중음신의 망령에 눈이 멀어 감탄하고 감격하여 폐부 깊숙이 쌓여있던 오물들을 토해 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생거부안' '사후순창'이라 했던가. 이 글의 노정을 역사기행이라 먼저 말하자. 다만,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한 답답하고 지루한 노정이 아니라 장엄 화려하고 슬픔마저 깃든 계곡에서 우리는 역사의 올바른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일심을 갖고 고나심을 백제 부흥전쟁의 현장이 충남의 한산. 연시, 예산이 아니라 이곳 주류성과 백강(동진강)이라는데 두고 떠나면 재미가 더 할 것이다. 또한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식민사관'을 경계하면서 하는 여행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부안읍에서 차로 십분 쯤 왼쪽으로는 기름지고 광활한 벌판 '장패평'이 펼쳐지고 오른쪽 들녘 너머론 기상봉, 옥녀봉이 장엄하게 가려있는 사이를 곧게 내지른 2차선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개암사 입구 장군총이 나타난다. 장패평은 말 그대로 '장수들이 싸우다 패한 벌판'이란 뜻으로 주류성에 웅거한 백제 부흥군과 당나라 침략군이 접전을 벌여 당나라 군사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이 장패평의 끝이자 개암사로 들어가는 들머리에는 이 전설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장군총이 있다. 장군총을 선사시대의 남방식 지석묘로 보는 하계의 해석이 좀더 설득력이 있되 백제 부흥군과 싸움에서 패한 당군의 장수 28명의 주검을 백제군이 거둬 묻어 줬다는 인근 주민들의 전하는 말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닌 듯싶다. 주류성은 개암제를 지나 뒷길로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높이가 각각 40미터와 30미터쯤 되는 우람한 우금바위에서 시작해 남장대쪽으로 1천5백13미터 남장대에서 북장대를 거쳐 뒤돌아 오는 거리 2천4백13미터를 합해 모두 3천9백26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석성이다. 이곳이 7세기중엽 백제유민들이 신라의 침략군에 맞서 3년 동안이나 항거했던 곳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분연한 결의들이 모아졌던 곳이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의 10만군과 신라 김유신의 5만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공략한 후 의자왕이 피난한 웅진성마저 함락시키자 그 해 8월 2일 백제 민중들은 주권을 찾고자 백제부흥투쟁을 전개했다. 백제 서북지방의 주요한 성인 임존성(충남 예산)에는 항전이 시작된 지 10여일만에 3만여 명의 부대가 모여들었고 이곳 부안 주류성에는 백제의 장군이었던 복신과 승려 도침의 지휘아래 부흥군의 대오가 정비되어 3년간의 치열한 투쟁을 시작했다. 그 후 임존성과 주류성을 양대 근거지로 항전군의 기세가 높아지고 수십 개의 성이 이에 홍ㅇ. 금강 이북이 침략자의 압제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662년 5월 왜국에 가있던 왕자 풍이 돌아와 국왕이 될 무렵에는 부흥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세가 안정되고 국가의 틀이 잡혀 갈 무렵 지도부는 더러운 권력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동지인 복신과 도침이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여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는 비극이 빚어지고 부흥군의 사기가 떨어지자 침략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공략해 주류성과 임존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왜국의 지원군마저 백강(동진강)어귀에서 물리쳤다. 662년 9월로 삼년에 걸친 백제부흥전쟁은 끝이 나고 가담한 백성들은 무참하게 살육되었다. 국왕으로 떠받들었던 풍은 고구려로 도망쳐 목숨을 겨우 부지했다. 이상의 내용이 백제 부흥전재의 개요다. 다시 주류성 얘기다. 주류성은 겉보기에 메마르기 짝이 없는 옛 석성 가운데 하나 일 수 있으나 20만평에 이르는 성곽 안에 백제 이궁터가 있고 우물, 왕사지 등 많은 흔적들이 당시 민중들의 처절한 상흔들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 글의 논지인 주류성의 위치문제에 대해서는 학계의 합의가 아직 없다. 충남의 한산과 예산쪽이 주류성의 항전지라는 설과 이곳 부안설이 다투고 있는 상태다. 각 지방의 향토사 연구자들은 저마다 자기 고장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주류성 확정'경쟁을 하고 있는데 이를 속된 지역이기주의로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향토사학자들의 관점이 너무 주관적인데 있다면 이 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이기주의와 통하는 얘기가 된다. 이 전제를 통해서 1913년에 제기된 일본학자 쓰다와 사학자 이병도 씨의 주장이 단적으로 이 식민사관에 기초된 학설이라고 주장한다면 무리일까? 하여튼 백제부흥군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백산, 동진강, 개암사 등 경치가 수려하고 역사가 서려있는 이곳 부안의 제위상이 바로 잡아질 때 우리의 진주 귀걸이는 빛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천경선 / 62년 익산군 옹포 출생으로 언론사에 근무했다. 현재는 부안 문화역사기행반을 활동을 하며 변산을 비롯한 부안의 문화를 알리고 낙후된 향토문화를 끌어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백제부흥의 전적지를 밝히는 주류신성 복원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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