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음악'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프랑스의 근대음악가 에릭 사티(Éric Alfred Leslie Satie(Erik Satie), 1866.5.17~1925.7.1)입니다. 에릭 사티라는 이름이 낯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음악을 들으면 누구나 아하! 하실텐데요. <짐노페디(Gymnopedies)>, <쥬뜨부(Je Te Veux)> 때문입니다.
<짐노페디>는 느리고 비통하게 연주되지만 차분하면서도 깊게 울리는 그 신비로운 음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쥬뜨부>는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곡으로 피아노곡으로도 널리 연주되지만 일본의 카운터 테너 요시카주 메라(Yoshikazu Mera)의 노래로 유명하지요. 두 곡 모두 드라마나 광고음악으로 매우 자주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곡입니다.
에릭 사티는 매우 가난하게, 그리고 드라마틱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가난했던 것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스스로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칩거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파리 근교의 빈민가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27년간 은둔하며 홀로 지냈는데 일체의 방문자도 허용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외부인의 시선조차 싫어 창문마저 가린 채 꼭꼭 숨어 지냈습니다. 사티가 죽은 후에야 아파트가 개방되었는데 몇 년 묵은 쓰레기가 실내 곳곳에 그대로 방치된 채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얼마나 가난하게 생활했는지 평생 '무슈 르 포브르(가난뱅이 씨)'라고 불렸는데 생활은 프랑스의 예술가들이 모여든 몽마르뜨의 카바레(검은고양이) 등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꾸렸습니다.
사티는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작곡활동을 해 때로는 주옥같이 아름다운 곡을, 때로는 음악계와 평단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일반 대중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전문적인 예술가(드뷔시,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디아길레프 등) 사이에서는 숭배자가 생겨날 정도로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티의 음악은 기존의 모든 음악적 형식의 지배를 거부하며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정신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그가 파리음악원에서 퇴교당한 이유도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감당할 수 없어서가 이유였을 정도니까요). 그의 작품은 확실히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티가 평생 단 한명의 여자였던 수잔 발라동과 헤어진 이후 극도의 비탄에 빠져 작곡한 <짜증(Vexations)>이라는 작품은 악보는 단 세 줄로 이루어진 한 장에 불과하지만 이 짧은 악구를 840번이나 반복하도록 요구해 이 작품을 연주하는 데만 18시간이나 걸렸답니다. 작품의 제목 그대로 연주하는 이나 듣는 이나 정말 짜증스러웠겠지요. 이 작품을 전위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는 존 케이지가 19시간 가량 연주했지만 결국 완주하지 못하고 종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존 케이지는 후에 정반대로 무대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4분 33초>라는 작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소개되었죠). 두 작품이 뭔가 맥락이 닿아있는 듯 느껴지네요. 그래서 일반 청중들에게는 혹평을 받았지만 근대를 넘어 현대 예술세계로 진화하던 예술가들에게는 극찬을 받은 것이지요.
하지만 사티가 실험적이고 기괴한 전위음악만 작곡한 것은 아닙니다, 신비롭고 감미로운 음악도 작곡했지요(하지만 이 작품들이 사후에 유명해졌다는 안타까움은 있지만요). <짐노페디>가 그런 곡입니다. <짐노페디>는 사티가 카페에서 작곡한 곡 중 하나인데 까페에서 피아노 연주로 생활비를 벌던 사티는 손님들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잔잔한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비슷한 몇 곡을 더 작곡하면서 가구가 항상 그 자리에 놓여 있지만 그 누구의 삶에도 방해가 되지 않듯이 음악 역시 드러나지 않고 대화나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가구처럼 있을 수 있다는 뜻에서 '가구음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또 '가구음악'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책을 발간해 '가구음악'을 중요한 음악적 장르로 해석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가구음악'이 오늘날 ‘배경음악(BGM:Backgrouns Music)의 시초가 됩니다(그래서 그런걸까요, 기가 막히게도 사티가 '가구음악'이라고 생각했던 <짐노페디>는 오늘날 침대가구로 유명한 시몬스 침대의 광고음악으로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릭 사티의 에피소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과의 연애사입니다. 수잔 발라동은 19세기 후반 유럽미술사를 설명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청소부, 직공, 곡예사 등 온갖 궂은 일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르누아르, 로트렉, 드가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의 모델이자 그들 모두의 연인이 된 여자, 그리고 모델 활동 중에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워 프랑스 최초의 여류 화가가 되어 유명 화가의 반열에 오르고, 사생아였던 자신의 운명과 닮은 사생아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그 아들을 다시 몽마르트를 대표하는 화가(모리스 위트릴로)로 키워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티는 1893년, 27세가 되던 해에 그림 공부를 하던 발라동이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했고 이내 연인이 되어 동거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침대에서 정사를 나누던 사티는 맞은 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사티는 수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이 어려워 졌습니다. 사티는 일곱 살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그 어머니를 너무도 그리워했습니다. 그런데 발라동이 어머니와 무척 닮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발라동에게 그렇게 끌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침대에 알몸으로 있는 발라동의 모습에 어머니가 오버랩 되면서 그만 정사가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동거한 지 얼마 안되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사티는 비록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는 없었지만 발라동을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았습니다.
사티가 죽은 후 그의 아파트를 찾은 이들은 방문 위에 그림 두 개가 나란히 걸려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발라동이 그린 사티의 초상화였고, 다른 하나는 사티가 서툰 솜씨로 그린 수잔의 초상화였습니다. 그리고 발라동과 헤어진 이후부터 30여년간 사티가 발라동에게 쓴 편지, 그러나 발송하지는 않은 편지 한 다발과 뒷면에 ‘사랑스러운 수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는, 사티, 발라동, 그리고 발라동의 아들,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사티는 발라동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편지뭉치와 사진을 전달받은 발라동은 사티의 편지는 뜯어보지도 않았고, 사진은 본인과 아들만 남기고 사티는 잘라버렸다고 하네요. 참 매정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발라동은 되돌릴 수 없는 사티와의 추억을 다시 꺼내드는 일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에릭 사티는 스스로를 "너무 늙은 세상에 너무 젊은 나이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티가 유럽이 19세기 말 낡은 질서에서 20세기의 새로운 질서로 이행되는 시기에 주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예술계는 새로운 사조가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유럽예술계를 지배한 낭만주의와 그에 뒤이은 인상주의적 경향에 대항해 다양한 새로운 실험들(다다이즘,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신고전주의 등)이 전개되는 시기였던 것입니다. 천재적 감성을 가진 사티는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실험을 주저없이 자유롭게 펼쳐나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대중들은 익숙한 것이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경험하게 되는 낯선 것들에 대한 두려움, 거부감 때문에 사티의 성과를 비난하거나 무시하였습니다. 심하게는 그를 음악 사기꾼 정도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슷한 성향을 가진 예술가들에게서만 찬사를 받고 오랫동안 그 존재를 기억되었을 뿐 일반 대중들의 기억에서는 점차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천재를 다시 세상에 불러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프랑스의 영화감독, 루이 말(Louis Malle, 1932~1995)이었습니다. 그는 사티가 죽은 지 38년이 지난 해인 1963년 <도깨비불, Le Feu Follet>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늘 오늘은 꼭 자살하겠다’고 되내이는 주인공의 암울하고도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배경음악으로 <짐노페디>를 사용하였습니다. <짐노페디>의 선율에 반한 프랑스인들은 다시 사티를 예술계로 불러 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덕에 우리는 자칫하면 영원히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천재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