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3 | [문화저널]
저널여정
학정은 날로 더해가고 원성은 그치지 않으니..
이평, 조소마을에서 무장까지
강영례 문화저널 간사(2003-09-19 09:39:35)
말목장터가 자리한 장터 삼거리 부근에서 전봉준 장군이 고부봉기때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고택이 위치한 조소마을까지는 차로 약 10여분. 새집처럼 오목하게 들어앉았다해서 이름 붙여진 이 마을은 갑오년 당시 전주다음으로 번성했던 고부군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현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그 옛날, 헤진 괴나리봇짐을 맨 농민군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전국 각지에서 드나들었을 이 야트막한 토담집. 그 안으로 들어서니 툇마루에 놓인 손때 묻은 방명록이 눈에 띄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담으로 둘러싸여져 있던 오른쪽에 너른 마당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 안에 위치하여 마을사람들이 항상 가까이서 전봉준 장군을 기억할 수 있는 이 고택은 1970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 누구나 찾아오면 쉬어갈 수 있는 정감이 드는 곳이다.
1894년 사발통문거사를 모의할 때(1월)와 무장에서 제1차 기포를 단행할 당시(3월) 전봉준 장군은 이곳에 거주하며 혁명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조병갑의 학정이 극에 달한 1894년 1월 11일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천여 명이 일제히 봉기하여 고부관아를 습격한 사건 이후 신임 고부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읍폐를 시정하겠다’는 회유와 설득으로 일단 농민군들을 해산시키기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뒤늦게 고부에 도착한 안핵사 이용태는 해산한 농민들 중 민란 주동자를 색출하고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빼앗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한다.
당시 불같이 일어난 농민군들이 달려간 고부관아는 지금 그 자리에 고부국민학교가 들어서 있다. 조소마을로 가는 삼거리에서 영원쪽으로 뻗은 국도를 타고 차로 20분을 달려가면 고부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길을 물어 복지회관이 있는 샛길로 100m쯤 가면 예전에 탐관오리들이 그렇게도 부임하기를 소원한 고부관아터를 쉬이 만날 수 있다.(현 정읍군 고부면 고부리) 또한 그곳은 고부봉기가 일어나기 전 해인 1893년 11월에 종래의 민란에선 볼 수 없는 치밀한 사전계획으로 사발통문을 모의, 현재 ‘동학혁명모의탑’이 세워져있는 신중리 주산마을과도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갑오년 고부관아는 관아자리 바로 옆 1403년 창건된 향교만이 그나마 옛 자취를 지닌 채 자리하여 이곳의 위치를 가늠하게 할 뿐 이곳이 갑오년 농민군들의 당시 상황을 가장 명확히 알 수 있는 지역임에도 주변에 안내문이나 유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무척 아쉬움을 남겼다. 또 인근의 남복리에 자리한 정자인 군자정은 고부봉기가 일어나기 전 농민군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지역으로 꽁무니를 뺀 조병갑이 기생을 끼고 놀이를 즐기곤 했다는 바로 그곳이다. 논 가까이, 농가 가까이에 자리한 이 정자에 올라보니 문득 갑오년 농민들의 그 당위적인 혁명의 한 자락이 느껴져 온다.
정주에서 흥덕을 지나 차로 30여분 정도 달리면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보존된 고창읍성이 있는 고장에 닿고 고창에서 무장까지는 차로 10분 거리다.
박원명의 회유에도 말목장터와 백산등지를 옮겨 다니며 끝까지 해산을 거부하던 전봉준과 그 휘하의 일부 농민들은 이용태의 만행이 진행되자 3월 13일경 무장으로 피신하게 된다.
고창에서 무장으로 가다보면 오지영이 『동학사』에서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라고 밝힌 현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한그루 소나무가 눈에 띈다. 마을 한중간에 있는 전봉준이 태어났다는 당촌 56번지는 지금 밭으로 변해있다.
전봉준은 무장에 당도하여 무장의 대접주인 손화중과 함께 농민군을 모아 봉건적 수탈과 폐정을 혁신하기 위해 새롭게 거사를 모의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1894년 3월 농민전쟁의 제1차 기병이 되는 무장기포이다.
무장에서 현 무장국민학교가 있는 당시의 무장관아의 정문인 진무루(鎭戊樓)를 거쳐 들어가면 복원되어 있는 무장객사가 오른편에 넓게 자리하고 왼편으론 시골스런 국민학교 운동장이다.
“학정은 날로 더해가고 원성은 그치지 않으니....팔도가 한 마음으로 수많은 인민이 뜻을 모아 이제 여기에 의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라”
이 글은 무장에서 동학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이 공동으로 발표한 여시뫼 창의문의 일부다. 지금도 객사 앞에 서면 동학농민혁명의 봉기를 알리는 창의문을 전국에 선포하는 전봉준 장군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