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3 | [문화저널]
동학농민혁명, 그 역사를 바로 찾자
탐학과 수탈, 개인의 부 축적 위해 농민들 폭압
고부봉기, 그 가렴주구의 주역들
김은정 전북일보 기자, 편집위원(2003-09-19 09:38:42)
역사는 사람살이의 흔적이다. 결국 역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삶의 기록인 셈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통해 떠오른 인물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1백년도 채 안된 그 역사의 인물들의 올바른 행적을 밝혀내는 일은 오늘의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로 짐지워져 있다. 얼룩진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 페이지마다에서 그 수많은 인물들은 복원의 날을 고대하고 있다.
진정으로 민족을 위해 일했던 일문들 뒤에는 어김없이 민족의 역사를 팔아먹은 또 다른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역사에서는 때로 이들의 음양 역할이 뒤바뀌어진 채「음」의 인물들이 버젓이 역사를 짊어져 온 인물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는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자신의 영화에만 눈이 어두웠던 인물들이 오히려 세세손손 안녕을 누리고, 진정으로 민족을 위해 일했던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바로 그 어두움을 벗겨내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역사의 참 모습을 찾는 일일 수 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있게 한 바탕은 당시 조선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있지만 보다 구체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그러한 구조적 모순을 악용한 지방 관리들의 탐학에 있었다. 민중들의 고통과 가난은 외면하고 오히려 그 고난을 가중시켰던 이들 관리들의 탐학과 수탈은 농민혁명의 들불을 지피는 단단한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장을 연 고부봉기를 야기시킨 탐학무도한 관리들이 있었으니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호남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 고부안핵사 이용태(李容泰),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등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도 대부분의 지방 관리들이 농민들을 수탈하고 고통을 가중시켜 들고 마침내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서게 한 장본인들이었지만 고부와 관련된 이들 오적(?)들은 명명백백하게 농민혁명을 있게 한 탐학의 주역들이었다.
이들 가렴주구의 주역들은 어쩜 사람들인가. 왜 이들은 하필 고부땅에서 탐학과 수탈을 서슴지 않았으며 고부땅의 농민들은 한결같이 이들 지방관리의 탐욕을 채우는 대상으로 희생당해야 했는가.
재산 축적에 혈안, 조병갑
각 지역에서 집회가 일어나는 중에서도 봉건정부에 빌붙어 오히려 구조적인 모순을 악용해 자신들의 재산을 축적하는데 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지방 관리들은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는 그만두고 조세부담을 가중시키며 농민들을 수탈하는 행위를 일삼았다.
당시 고부는 비옥산 평야지대인 전라도 일대의 고을 중에서도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 동진강과 정읍천, 고부천 등이 흘러 비옥해진 고부평야, 이평(베들)평야, 백산평야, 팔왕평야 등은 쌀의 보고였으며 서해안까지 끼고 있어 풍부한 해산물까지 얻을 수 있는 천혜의 땅이었다. 따라서 탐학한 관리들에게는 수탈하기에 더없이 좋은 고을이었고 게다가 수탈한 곡식을 일본으로 팔아넘길 수 있는 줄포항까지 갖추고 있어 여러 가지로 눈독을 들일 수 있는 곳이었던 셈이다. 이때쯤 고부군수로 부임해온 이가 조병갑이었다. 태인 현감을 지낸 조규정(趙奎渟)의 아들이며 영의정을 지낸 조두정(趙斗渟 1796-1870)의 서질인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오기 전부터 탐관으로 소문이 났던 부패한 관리였다. 본관은 양주(楊洲)이며 1893년에 좌의정에 있었던 조병세(趙秉世)와 1892년 충청관찰사로 있을 때 동학교도의 공주취회를 일으키게 한 조병식(趙秉式)과는 같은 집안으로 같은 항렬인 그는 1871년 영해 이필제난의 주모자인 이필제를 체포, 문초할 당시 의금부 도사직에 있었다.
그는 고부군수로 부임한 직후부터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강제 사역으로 쌓은 새보로 다시 수세 징수
기왕에 있던 만석보 밑에 새로운 보를 쌓으면서 농민들을 강제 노역 시켰는가 하면 그 보를 쌓기 위해 남의 산에 있는 수백 년 묵은 나무를 마구 베어다 사용했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보의 수세를 농민들에게 다시 거두어 들였으니 그 수세만도 7백 섬에 이르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태인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며 군민들에게 1천여 냥을 거두어 들였고 1983년 흉년이 들자 농민들에게 강제로 징수하였는데 조금 살만한 농민들을 잡아들여 허무맹랑한 갖가지 죄목을 붙여 2만여 냥의 재목을 빼앗았다. 그의 탐학행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해졌다. 이런 일도 있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면 세금을 받지 않겠다고 농민들을 꼬여 놓고는 정작 피땀 흘려 개간한 땅에 농사를 지어 추수때가 되면 강제로 세금을 징수해갔다. 대동미를 거두어 들일 때는 1결에 정백미(情白米) 열 여섯 말에 해당하는 세를 받아두었다가 정작 정부에 올려보낼때는 나쁜 쌀을 사서 바치고는 거기에서 남은 돈으로 자신의 부를 채웠다. 1983년 말, 온갖 수탈행위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조병갑의 탐학을 더 이상 견디다 못해 전봉준을 앞세워 억울한 사정을 진정하였으나 묵살 당하자 다음해 2월 고부봉기를 일으켜 고부관아를 장악했던 것이다.
고부 부임이전부터 탐학의 주역, 음직으로 관직에 나와 고부민란의 도화선이 된 탐학의 주역인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하기 이전부터 여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수령을 역임하는 동안 온갖 탐학을 저질러 탐관오리로 소문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충청도가 고향인 그의 생년월일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관직에 들어선 이후의 주요 행적만을 더듬어 볼 수 있는데 이상한 것은 국조방목(國朝方目)에 그의 과거합격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가 관직에 들어선 것을 보면 음직, 이를 테면 매관매직이나 다른 불법한 수단으로 관직에 나온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조병갑은 재부임 하루만인 1월 10일 고부봉기가 일어나자 버선발로 도망나와 숨어 있다가 전주 감영으로 달아났다. 2월 15일 왕명에 따라 체포당한 그는 그러나 3월초 다시 안핵사 이용태와 함께 고부에 다시 부임했으니 그의 아비하고도 끈질긴 치부의 면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3월 21일 무장에서 동학농민군의 전면 봉기가 일어나자 4월 20일 조병갑은 그제서야 의금부에 압송 구금됐고 5월 고금도에 정배 당했다. 1985년 체포된 동학농민군 문초과정에서 대질심문하도록 고금도에서 압상하라는 명을 받고 나와 있다가 그해 7월 고부민란 관련 죄인들과 함께 석방조치가 내려졌다.
우리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가렴주구와 탐관오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힐만한 조병갑은 그러나 이후 그러한 죄상에도 불구하고 3년만인 1898년 1월 법부 민사국장에 임명됐다하니 뒤틀린 우리 역사의 면면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주는 예가 아니겠는가. 일제시대에 득세했던 친일파의 대부분이 애국자로 변신하여 세세손손 안녕하고 있는 것처럼.
구조적 모순 악용, 수탈과 탐학
비옥한 옥토와 풍부한 해산물까지 거두어들일 수 있고 항구까지 끼고 있어 수탈을 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古阜는 봉건정부에 빌붙어 사는 지방 관리들에게 물욕을 챙겨낼 수 있는 희망(?)의 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적 인물로 꼽히는 탐관오리 조병갑에 이어지는 탐학의 주역들은 바로 이 희망의 땅에 발붙이게 된 끈을 최대한 악용하여 수탈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만 눈이 어두워 있었다. 지방 관리들의 탐학은 비단 고부지역에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고부를 중심으로 한 지방 관직에 있었던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개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탈에 혈안이 되어 갖은 방법으로 농민들을 괴롭혔으며 그 결과로 대부분의 지방관리들이 얼마 되지 않아 갑부가 되었다. 이런 까닭에 서울에서는“자식을 낳아서 호남에 가서 벼슬하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고 노래하는 동요까지 만들어 세상을 꼬집기도 했다.
고부민란과 관련된 탐관오리들은 조병갑 외에도 많았다. 호남균전사 김창석, 전운사 조필영, 고부안핵사 이용태, 전라감사 김문현은 악랄한 가렴주구의 주역들로서, 조병갑과 함께 그 비중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자랑스러운(?) 고부봉기의 <오적>이었다.
수염 뽑고 상투 매달아 고혈 짜낸 조필영
지방의 세미를 서울로 실어오는 일을 맡아보던 전운서의 으뜸벼슬인 전운사로 있었던 조필영은 교묘한 방법으로 농민들의 혈세를 짜냈다. 세금위에 세금을 더하여 해마다 백만 꾸러미씩의 돈을 바치게 했던 그는 불과 3년 사이에 갑자기 갑부가 되었다하니 그 탐학의 실상을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그의 수탈의 행위는 참으로 악랄했다. 그는 조세로 거둔 곡식을 호남의 각항구로부터 서울로 실어 나를 때 여러 가지 불법조항을 만들어 과외세금을 징수하면서 농민들을 괴롭혔고 이에 불응하는 농민들을 붙잡아 고문하면서 수염을 뽑거나 상투를 매다는 악형을 감행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줄포항구에는 일본 상인들이 모여들어 쌀을 헐값으로 사들여 마구 일본으로 날랐는데 몇 년째 가뭄으로 쌀을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판국에 일본으로 실려 가기를 기다리는 쌀이 객주의 창고에서 넘쳐나고 있었다하니 당시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조필영은 언제 어디 태생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1883년(고종 20년) 김제군수로 있으면서 전 장흥부사 尹구의 비행에 대하여 사정관이 되었고 그 뒤 대구판관으로서 각종 일을 잘 처리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886년 이후 총무관으로서 호남전운사가 되었던 그는 당시 직원을 이용, 수세미에 대한 불법 수탈을 자행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한 원인을 제공했고 그 죄로 정배 당했다. 1895년 고부봉기 관련 죄인이 석방될 때 함께 풀려난 그는 1902년 정이품에서 종이품으로 승품되었으며 1904년 6월 內藏阮卿에 임명됐다.
‘난을 키운’균전사 김창석
밖으로는 균전이라는 명령을 빙자하여 몰래 집안처럼 나라에 사사로움을 행사하고 나라의 토지를 희롱하여 백지에 세금을 거둔, 난을 키운 균전사 김창석 또한 자기 직분을 최대한 악용한 탐관 오리였다.
균전사는 백성의 부담을 공평하게 할 목적으로 실정을 살피고 혹은 토지의 등급을 다시 사정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하는 임시직이었다. 그러나 균전사로 내려온 김창석은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이곳 고부에 발을 붙이자마자 실정을 살피고 농민들의 부담을 공평하게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수탈하는 방안을 찾는데만 마음을 쓰고 있었다. 당시 호남지방은 여러 해 동안 가뭄이 지속되면서 수확이 형편 없었던 데다가 특히 1983년 호남의 대부분 지역이 큰 가뭄으로 한해 농사를 망쳐버리게 되자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농사를 짓고 살 수 없다고 판단한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일이 많아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농민들을 달래 붙들어두기 위해 균전사를 파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창석은 농민들에게 몇 년 동안 면세해주겠다고 약속, 묵은 땅을 개간하도록 해놓고는 농민들이 피땀 흘려 일궈놓은 땅에서 추수때가 되면 당장 그해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였고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그 이듬해부터 땅을 묵혀 농사를 짓지 않았는데도 전년과 똑같이 세금을 챙겨 받았다. 본관이 김해 김씨인 김창석은 1846년생으로 1878년 별시 공과로 등과했다. 1890년 균전관으로 임명받은 그는 1892년 10월 균전사로 승진, 기만적인 정세(停稅)로 농민들을 수탈했다.
안핵 직분 이용한 이용태
안핵사는 당시 지방에 사고가 생겼을 때 안찰핵실하기 위해 왕명으로 파견하는 임시직이었다. 고부봉기를 즈음해 고부 안핵사로 임명된 이용태 역시 탐관오리의 대열에 용감하게(?) 합류했다. 김문현의 장계가 올라오자 조정에서는 조병갑의 후임으로 박원명을 임명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민란을 조사 보고하도록 하는 한편 읍폐의 교정을 강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농민들의 위용이 두려워 처음에는 고부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농민군이 해산하자 역졸 8백여 명을 이끌고 슬그머니 고부에 들어섰다. 이때부터 이용태의 만행은 시작됐다. 간곡한 설득과 회유로 농민군을 진정시키려 했던 신임군수 박원명을 꾸짖고 협박했으며 오히려 조병갑을 정당화하고 농민군을 역적죄로 내몰아 잡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봉기 주모자와 참가자를 색출 한다는 명분으로 그는 고부 온 마을을 뒤집어 놓았고 그의 역졸들의 행각은 극에 달했다. 이용태가 동학도라 일컬어 농민군들을 가리지 않고 잡아들이고 그들의 처자를 대신 묶어 구타하는 등 살육을 자행하는데는 그것을 구실로 돈을 울거내는데 뜻이 있었다. 그가 행한 탐학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농민군들은 울분을 터뜨려 투쟁의 불을 지폈다.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은 결국 그때까지만 해도 고부민란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던 손화중과 김개남이 새로운 의지로 뜻을 합쳐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 됐다.
1854년생인 이용태는 1885년 별시병과에 등과, 규장각 직객과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참찬관을 지냈다. 1891년 참의 내무부사로 임용돼 장흥부사로 있던 그는 고부 안핵사시절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질러 1894년 4월 파면 당했으며 경상도 금산군에 유배됐다.
그러나 이용태 역시 고부 관련 죄인이 석방될 때 풀려나 복직, 1899년 중구원 의관에 임명됐고 궁내부 특진관, 특명전권공사, 의정부 참찬 등 화려한 직책을 거쳐 1904년에는 내무대신에 올랐다. 그는 1907년 7월 을사 5적사건에 1천 7백 원을 지원하는 등 관련되어 10년형을 받았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병탄되자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