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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3 | [문화칼럼]
문화유적은 바로 우리의 뿌리
최완규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2003-09-16 16:42:25)
지난해 여름 남미의 마야와 잉카유적을 답사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 곳을 여행하기 전에는 국내의 매체를 통하여 알 수 있었던 페루의 혼잡한 정국의 대한 약간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페루 정국의 방향에 대한 관심보다는 일본계인 후지모리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페루 국민들의 의식구조에 대해 의아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경제가 파탄에 빠져 살아가기가 궁핍하더라도 자가들의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그들에게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동양인을 선출했을까 하는 점에서 그들은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도 없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나의 의문은 수도인 리마에서 우리는 20여년 전에나 입었던 누더기 훈련복을 연상시키는 복장을 하고 관공서건물에 배치된 군인들과 무질서한 교통질서 그리고 거리의 걸인등에서 그러면 그렇지 하고 스스로 답변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남미제국을 한때 호령했던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방문하면서 나의 선입견적 사고를 비웃기라도 하듯 쿠스코 곳곳에서 그들의 영광 어린 숨결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먼저 2개의 깃발이 게양되어 있어 안내인한테 이유를 물으니 하나는 잉카기이고 하나는 페루국기라는 것이다. 건물외부의 벽면에 스페인군대에 항거하야 싸우는 인디오들의 장엄한 벽화 등 상징적인 곳을 제외하더라도 당시의 석조건물과 석재로 포장된 도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서 당시의 건축술을 찬탄하기에 앞서 전통의 보존이라는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는 나의 편견과 단견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나의 머리를 쭈뼛하리만큼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은 술집에서였다. 그 술집은 인디오의 전통적인 흙벽돌집이었는데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허술한 농가의 창고를 연상하리만큼 외양과 내부는 허름하였다. 술집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나라에서 들을 수 있는 록음악이나 재즈음악이 아닌 그들만의 전통악기로 전통음악을 대학생 또래의 집단이 진지하게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네 대학생들이 풍물패를 조직하여 교내의 행사에 주로 활용하는 것과 비교해 보려고 애써보았다. 분명 우리 대학생들의 의도적(?) 전통찾기의 풍물패와 술집 무대에서 현대적 감각의 서양음악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 매우고있는 점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의 정신적 기둥이랄 수 잇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경제적 여유와 더불어 점점 두터워 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이란 단서를 붙이고 싶은 것은 왜일가. 이는 내가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식솔을 거느리는 소위 땅꾼이라서 남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자만심일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의 경제력만큼 대칭한 점수를 주기는 꺼려진다. 먼저 정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전정책에서 보면 내년이 광복5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민족정기의 고양을 통해 민족의 재도약을 이루고자 일제 통치의 기념비적 존재인 옛 총독부건물인 현 국립중앙박물관을 헐고 이전하는 것이 요지이다. 민족정기의 고양, 민족의 재도약, 일제 식민지 잔재의 일소 등 모두 하등의 반대할 이유 없이 두손을 들어 환영할 일들인 것이다. 조그만 가정도 이사하려면 전셋집이든 사글셋집을 구하고 이사짐을 꾸리는 것이 일상인데 집안의 가보격인 유물은 어쩌란 말인가. 현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의 철거문제, 시비와 관련 없이 이사갈 곳을 먼저 완벽하게 갖추어야 한다고 문화유산을 담보로 공부하는 여러 단테나 개인들이 이름을 남기고자 서명한 것은 아닐텐데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갈 길을 가고 있는 모양이다. 적어도 문화정책은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나 목적이 될 수 없음인데 혹시 어느 유물이 훼손되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더라도 컴퓨터 등 자연과학이 발달되어 부활시킬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의 결과일는지... 나는 문화재 지표조사시에 느끼는 엉뚱한 감정이지만 나와 같이 가끔 조상님들의 덕분에 먹고사는 야속한 사람들의 도굴이라는 발자욱을 발견하고는 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일진데 하면서 관대해 지고 싶지만 도둑질했으면 집은 부수지 말아야 하는데 집까지 부수면서 유물을 꺼내 간 것을 보고는 홍수에 집떠내려보내고 망연자실한 아낙네 심정이 되곤 한다. 6년 전 옥구 장상리에 있는 백제시대 고분을 발굴할 때의 일이다. 토지사용 승낙서를 받기 위해 토지주의 서울에 있는 집을 방문하였는데 토지주를 노인정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발굴 목적을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드리니 나를 토지 사기단쯤으로 인식하고 완강히 토지사용을 거부하는 토지주 할아버지는 어느대 내가 왜 백주에 생면부지의 당신에게 당하랴하는 경계의 눈빛이 역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3일간의 끈질긴 읍소 끝에 대서소에 가서 형사, 민사상의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토지사용 승낙서에 인장을 받을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발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관계 공무원들의 도식적이고 무관심과 그러한 것은 당신들이니 하는 것이지 왜 자꾸 귀찮게 구느냐 하는 식의 어려움 아닌 어려움은 그런대로 감당할 수 있었지만 선각자이신 도굴범들의 행위는 참으로 성질 급한 나의 입을 그냥 놔주질 않았다. 6호분 조사시 겉으로는 전혀 도굴의 흔적이 없어 그래도 한건 하는가 싶어 간단한 제수물품을 다시 준비하여 정성껏 2배4배를 올렸건만 유구가 노출되면서 그들의 양심을 기대한 것이 애당초 잘못이 아니라 나의 욕심이 지나치면 죄를 잉태하지 하는 난데없는 예수교 신자가 되어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작년 이리 부송동 청동시대의 주거유적 발견 때의 일이다. 발견당시 주거지의 절반이 잘려나간 상태였는데 유적은 이곳에 있었다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작업의 양을 반으로 줄려주려고 그렇게 파괴했는지는 그 마음 헤아리기 어렵다. 그렇지만 현재의 아파트 단지 조성구역에서 2천년전의 주거지가 발견되었으니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 후 관계당국에 조사를 요청하니 부족한 예산 때문에 조사가 어려웠지만 다행히 언론매체의 홍보덕분으로 조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보존대책은 관계기관에서 연구 중이라 하니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주변에서 보면 공단부지조성, 택지개발, 도로건설 등 살기 편하도록 하는 사업에 고춧가루를 뿌려 방해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성능 좋은 중장비 덕택에 문화유적의 파괴가 이루어지는 것에는 절대로 방관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가진 직업 탓일까. 문화유적이란 다른 공산품과는 달리 시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번 파괴되면 영원히 재생불가 한 것이므로 발굴자들도 조사작업 중에는 여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발굴현장에서 무엇 때문에 그것을 힘들게 캐느냐는 물음을 받곤 할 때 당신 아버지 할아버지의 물건이라면 소중하겠지요. 마찬가지로 국가와 민족에 있어서도 가계와 같이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잊어버린 바로 그것을 착고 있다고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이런 물음의 사람은 그래도 관심이 있다고 생각되어 감사하게 생각되지만 공사 중에 문화유적이 발견됨으로써 발굴조사다 보존이다 하여 공사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으로 여겨 밤중이나 남의 눈을 피해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경우도 있다하니, 후손이나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주겠다는 것인가. 눈앞의 작은 이익인 몇 푼의 돈보다 소중한 정신의 뿌리를 없애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화유적은 바로 우리의 뿌리요, 현실적으로는 바로 내 자식 손자의 산 교육장임을 깨달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페루가 우리보다 경제력이 우수한 것은 결코 아니나 쿠스코의 주민들이 지니고 잇는 전통문화의 주체자로서 긍지와 자부는 어려운 경제여건과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싶다. 최근 일련의 개방화 물결과 더불어 어느 때보다도 우리 것 우리의 문화 등의 소중함을 재인식 해야만이 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작게는 지방화가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우리고장의 문화와 전통을 아끼고 사랑할 때 경제력과 함께 균형 있고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 질 것으로 굳게 믿는다. 최완규 / 원광대학교 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일했다, 고고미술사학과에 재직하면서 익산 정상리 옹포리 발굴과 군산 띠섬 등을 발굴했다. 발굴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유적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가장 아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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