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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5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기억해야만 할, 단 하나의 순간
장수상회
김경태(영화평론가) (2015-05-07 11:09:44)

괴팍한 성격의 노인 ‘성칠(박근형)’은 혼자 살면서 ‘장수마트’의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 마트의 사장이자 재개발 위원장인 ‘장수(조진웅)’는 마을의 재개발을 유일하게 반대하는 성칠을 구워삶기 위해 노력하지만 성칠의 고집은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미인계를 생각해낸다. 때마침 성칠의 앞집에 ‘금님(윤여정)’이 가족과 함께 이사를 오고, 그녀는 자신을 도둑으로 오인했던 성칠에게 사과의 의미로 식사 대접을 요구한다. 이를 계기를 성칠은 조금씩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사실 성칠과 금님은 부부이고 장수는 그의 아들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성칠은 자신의 가족들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채 자신은 원래부터 혼자였다고 믿는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그의 가족들은 마치 남인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다.

비록 치매가 사랑의 기억들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지만, 사랑은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마음만은 어찌할 수 없다. 성칠은 망각으로 인해 그의 첫사랑이자 가장 오래된 사랑을 새로운 사랑으로 마주한다. 아니, 오히려 그 망각 덕분에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그 시절의 감정을 지금 여기에서 그대로 복원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강제규 감독이 전작 <은행나무 침내>(1996)에서 보여줬던 천년의 세월을 거스르는 운명적 사랑의 판타지가 치매의 낭만화를 통해 재현되는 듯이 보인다. 반면에, 그런 성칠을 곁에서 지키는 금님은 자신의 아픈 몸을 축내면서까지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세계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라는 격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이처럼 눈물샘을 자극하는 기억과 사랑의 관계성에 대한 성찰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성칠의 치매가 보여주는 선별적인 망각 때문이다. 성칠은 가족의 존재, 그러니까 그와 친밀하게 얽혀있는 사적인 관계에 대한 기억들을 잊었을 뿐, 그가 과거 해병대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해병대 기수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퉁명스러운 성칠이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대하는 이 역시 해병대 출신의 최씨 노인이다. 그가 출근길에 늘 마주치는 최씨는 늘 군복을 입고 있으며 자신보다 높은 기수의 성칠에게 깍듯하게 거수경례를 하고, 그런 그에게 성칠은 빵과 우유 같은 간식을 사준다.

성칠은 우리나라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번영의 근간이 되었던 근현대의 굵직한 사건에 동참했다는 기억만은 상실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신이 일궈놓은 터전을 뒤엎는 재개발에 반대한다. 그러니까 북극의 빙하가 녹아 살 곳을 잃어가는 북극곰이 불쌍해서 환경보호에 앞장서는 그의 손녀딸이 주장할 수 있는 개발 반대의 목소리와의 결이 다르다. 이렇게 그는 사적인 기억을 지워내고 공식적인 역사와 연계된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으며, 바로 그 기억만을 가지고 때문에 심술궂은 노인이 되어버렸다. 뒤늦게 자신에게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성칠은 마침내 그토록 반대하던 재개발에 수긍하며 인감도장을 장수에게 건넨다. 재개발은 가족들이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시대상을 반영해 조금 확대 해석해 보자. 이 영화를 과거의 영광스러운 기억에 침잠한 채 가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을 집단적으로 망각하고 마음을 닫아버린 이들에 대한 슬픈 우화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장수상회>는 결말을 위해 영화가 처음 시작되었던 지점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고등학생인 성칠과 금님이 수줍게 통성명을 하는 장면이다. 누군가 과거의 기억 하나를 꼭 붙잡아야 한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공식적인 역사의 중대차한 현장이 아니라 바로 첫사랑의 설렘으로 가득했던 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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