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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 | 연재 [읽고 싶은 이 책]
죽은 령(靈)과 살아 남는 자의 고통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국문과 교수)(2015-04-01 13:25:21)

□ 전북문화저널 서평 : 정도상의 장편 『마음오를 꽃』(자음과 모음, 2014)

청소년의 자살: 죽은 령(靈)과 살아 남는 자의 고통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은 어떠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인식될까? 온갖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뒤엉킨 기성세대와 거리를 둔, 그리하여 사회의 탁류에 훼손되지 않은 정갈한 영혼과 건강한 육체를 지닌 존재로서 인식될까? 게다가 타락한 사회를 향하여 거침없이 그 특유의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날 선 비판을 퍼붓는 사회적 반항아로서 인식될까? 아니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그들의 치기어린 행동을 기성세대의 온갖 제도들로 길들여져야 하는 존재로서 인식될까?
정도상의 장편소설 『마음오를 꽃』은 이와 같은 일련의 물음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최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 양적으로 급팽창을 하였으나, 정작 청소년의 삶과 현실을 다루는 문학 중 그들의 문제적 쟁점을 비껴감으로써 청소년을 문학시장의 소비자로서 자족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볼 때 정도상의 『마음오를 꽃』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마음오를 꽃』은 청소년의 자살과 관련하여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의 자살만큼 심각한 사회적 현안이 없는바, 정도상은 이 문제를 작중 인물 규(남학생)와 나래(여학생)를 중심으로 심도 있게 탐구한다. 그들의 자살 원인은 서로 다르다. 규는 또래의 친구들보다 훨씬 조숙하다보니 “모든 고통과 고뇌에서 벗어나 구원받”(28쪽)기 위해 “생을 리셋하는 상상”(12쪽)을 하게 되고, 마침내 전철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그런가 하면, 나래는 학교의 일진애뿐만 아니라 평범한 학생들마저 그를 집단으로 소외시키는 고통과 일진애의 참을 수 없는 학교 폭력을 견디다못해 학교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사실, 규와 나래를 죽음으로 이끈 원인은 그들 또래의 청소년에게 매우 절실한 삶의 쟁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규에게 십대의 삶과 현실은 미정형의 잠재적 미래의 가치를 지닌 것이되, 규의 시선에서 그 미래의 가치를 꿈꿔야 할 한국사회는 위선과 위악으로 점철된 타락하고 암울한 사회 자체로 비춰졌는지 모를 일이다. 기성세대에 의해 악무한으로 치닫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규가 꿈꾸는 세계의 도래는 요원한 것으로 인식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때문에 규는 지금, 이곳의 삶과 현실을 초월하고 싶은 욕망, 즉 규의 도발적 생각을 빌리자면 “생의 초기화를 꿈꾸었다.”(15쪽)
이렇듯이 규의 죽음이 규 나름대로의 실존적 절박함의 문제를 초월하기 위한 자기결단이었다면, 나래의 죽음은 항간 십대 청소년에게 노골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학교 폭력(및 왕따)로 인해 인간 이하의 치욕스런 모멸감으로 생을 져버린 타살이나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범죄에 기인한다.
정도상의 『마음오를 꽃』은 십대 청소년의 이러한 자살과 관련한 문제를 제주도의 설화 <원천강>, <서천꽃밭>, <바리데기>의 얼개를 창조적으로 활용한 서사와, 죽음에 대해 심오한 통찰을 보이는 『티벳 사자의 서』를 소화한 서사를 통해 매우 흥미롭게 탐구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우리가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규와 나래의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규와 나래의 자살 원인은 서로 다르지만 “이승과 저승 사이의 중음이라는 곳”(41쪽)에서 각자 심판의 과정을 밟는데, “자살은 생명 모독죄와 생명 포기죄”로서 “최악의 죄이기 때문에 냉정하고 가혹하게 심판을 받”(41쪽)는다. 규와 나래는 자살로써 그들을 에워싼 문제로부터 벗어나 어떤 해결책을 찾든지, 아예 삶의 현실을 외면하려고 하였으나, “자살의 카르마는 카르마 중에서도 가장 악독”(34쪽)한 것이라는 준엄한 진실을 심판의 과정에서 거듭 마주한다. 비록 이승으로부터 생명은 소멸하였지만, 중음의 심판의 세계에서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남신들의 징벌은 이승의 고통보다 더욱 심한 고통과 끔찍한 광기어린 징벌을 피해갈 수 없다. 말 그대로 그들은 이미 죽은 자 곧 령(靈)이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못이겨 또 다시 죽을 수도 없으므로 지금껏 상상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에 속수무책일 뿐이다. 자살한 자에게 죽음은 생의 고통과 절연된 것이 아니라 더 극심한 또 다른 악무한의 고통의 세계로 그들을 감금한다. 이 사후 세계의 끔찍하고 섬찟한 지옥도의 실감을 정도상은 마치 그 세계를 경험한 것인 양 능수능란하게 재현한다.
그런데 이 심판의 세계에서 겪는 자살자의 고통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살아 남은 자들이 떠맡아야 할 상처를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규와 나래는 바리의 도움을 받아 각자의 가족이 그들이 죽은 이후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본다. 그들이 목격한 가족의 모습은 불행 그 자체였다. 규의 동생 수는 심각한 공황장애를 앓고 있으며, 나래의 부모는 이혼을 하였고, 그 밖의 가족들도 몰락하고 붕괴되는 가족의 삶의 터전 앞에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식구들 모두 각자의 상처 앞에서 허둥지둥했을 뿐 서로를 돌볼 겨를이 거의 없었다. 각자의 상처 앞에 웅크리고 앉아 집이 폐허로 변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었다.”(209쪽)
이처럼 살아 남은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죽은 령은 “어쩌다가, 어쩌다가……”(94쪽)는 신음 아래 그들의 자살을 후회해본들 이미 이 모든 폐허와 슬픔과 고통을 복원하거나 치유할 수 없는 일이다. “가족들을 살아 있는 지옥으로 밀어 넣은 죄”(224쪽)는 그 어떠한 것으로도 대속(代贖)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정도상의 『마음오를 꽃』은 한국사회의 십대 청소년이 무엇 때문에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져버리는지를 얘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떠난 이승에서 살아 남은 가족들이 짊어지는 상처와 고통을 동시에 주목한다. 정도상의 소설은 청소년의 자살 자체를 막무가내로 사회적 일탈로 간주하는 것을 넘어서서 무엇 때문에 그들의 귀중한 생명이 소멸의 길을 밟게 되는지, 그로 인해 그들이 직면한 쟁점들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 ‧ 실존적 고통을 가족들에게 안겨주고, 심지어 죽은 령에게도 이승과 또 다른 더욱 큰 상처와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을 소설적 진실로 타전한다. 그러고보니, 한국사회와 십대 청소년 사이에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일 때 비로소 소통이 되는 것이다.”(157쪽)는 소설적 전언을 아무리 자주 되새김질해도 식상하지 않으리라. 그렇다. “대화의 왜곡과 소통의 부재”(158쪽)가 우리의 청소년을 중음의 심판의 세계로 더 이상 데려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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