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의 편지> 약 봉투에 새겨진 나의 이십대 찬가(讚歌)
만으로는 28살, 한국 나이로는 29살에 접어든 올해의 나는 그야말로 ‘역병’처럼 아팠다.
새해 첫 날부터 병원 응급실 신세를 지는 것도 모라자서 결국 입원까지 강행했으니 말이다.
문득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나눈 얘기가 스쳐갔다.
‘우리 이제 아홉수야. 아홉수라 그래~’.
그런 말들을 미신이고 입방정으로만 치부하던 내게 내려진 벌 마냥 나는 스물 아홉해의 시작을 참으로 아프게 시작했다.
원래 병치레가 거의 없는 삶을 살아왔고 그것이 내 유일한 자랑거리였던지라 이번 신년 맞이 병원행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돌발상황’ 이었다.
제대로 된 치료는 연이은 휴일 때문에 받아보지도 못하고 응급실의 링거로만 연명하던 나는 급기야 ‘입원치료’ 라는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집에서 오매불망 나만 기다리는, 어느덧 7년째 나의 ‘난로’를 자청해주는 멍멍이와 밥솥 버튼 하나 작동 하지 못해 전화로 밥 어떻게 하냐며 물어보는 신랑이 떠올랐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더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회사였다.
남들보다 늦은 출발이라 여겼던 스물 일곱 살에 힘들게 들어간 회사.
다니는 내내 적성과 소질에 대해 고민을 이어가게 만든 곳.
‘이정도도 못하면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니 그만 두는 것도 생각해 보라’는 모진 수모에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다닌 곳.
언제든 기회만 되면 ‘휴먼 굴림체’로 날 굴려먹던 이놈의 회사에 사표를 던지겠노라 외쳤던 것과는 극히 모순적이게도 그렇게도 회사가 걱정됐다.
이어진 직속상사와의 전화통화, 그리고 국장님과의 전화.
걱정 말고 입원 해 치료 잘 받으라는 인사가 새삼 뜬금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농노처럼 일 해온 대가를 이렇게라도 보상 받는구나 싶어 보이지도 않을 전화기 너머에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회사가 추천해 준 병원에서 입원 수속을 받은 나는 39도를 넘실대는 열과의 사투를 이겨내기 위해 입원실 침대에 털썩 누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게 왠 떡이냐!’
입사한 이래(비록 2년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난 단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었다.
오랜 백수 시절을 청산하게 해준 직장생활이었기에 ‘못해도 중간은 가자’라는 실용적인 생각으로 가장 일찍 와서 적당히 늦게 가는 성실함을 보였다.
회사가 극심한 경영 위기를 맞이했을 때도, 월급 그거 몇 푼 되지 않는 돈 몇 달씩 못 받았어도, 그래도 망부석처럼 버텼다. 선배들의 ‘고맙다’라는 인사 한마디가 그렇게도 달콤해서 지금 내 인생이 잘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게 인생이라는데 난 방향도 속도도 살피지 않은 무모한 일상을 살아왔노라 깨달았다.
몸이 허하고 축이 나서 동력기관이 오작동을 하고서야 비로소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하지 않는가. 아홉수를 맞아 병원에서 수 십 만원을 써가며 골골대는 내게 주는 하늘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선물 받은 휴식 시간 동안 나는 생각의 끝과 끝을 달릴 수 있었다.
난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 즐거운지, 난 잘 하고 있는 게 맞는지, 내가 계속 이 일을 했을때 과연 성장 가능성은 있는지.
그리고 이제 이십대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이 때, 난 과연 청춘을 제대로 활용했는지 말이다.
많은 답안지들이 오고 가며 도망과 잔류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했다.
그러다보니 퇴원 짐을 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쉬는 동안 답을 구했냐고 묻는다면 구하기도 했고 구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는 구했다. 일단 가보자는 것.
열렬히 아팠던 20대 마지막 열병에 대한 예의랄까.
양 손 가득 받은 약 봉투엔 아직도 내가 스물 일곱이라고 적혀있었다.
스물 일곱이나, 스물 아홉이나, 어짜피 아직은 푸르른 ‘청춘’이다.
그래도 확실히 스물 일곱이라 불러주니 감사할 지경이다. 그 감사함을 연료 삼아 까짓거 마지막 20대, 지치지 말고 직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