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5.3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욕망이 빚어낸 매혹적인 영화
김경태(2015-03-03 16:04:06)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90년대를 대표하는 슈퍼히어로 영화 버드맨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렸던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예순을 넘은 나이에 진정한 연기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브로드웨이의 연극무대에 남은 인생과 전 재산을 건다. 아울러 아버지로서 딸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버드맨>은 이처럼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특정 장르로 규정하기는 힘든 영화이다. 그것은 영화가 다양한 장르적 층위를 오가며 복합적으로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추동력은 고유한 리얼리즘에 대한 욕망이다.

 

먼저 우리는 마이클 키튼이라는 배우가 그가 맡은 배역인 리건처럼 과거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 영화로 부와 명예를 쌓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버드맨>은 그의 삶을 반영한 자전적인 영화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리건이 실제로 비범한 능력을 지닌 버드맨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며 그 자체로 슈퍼히어로 영화로서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극배우가 되려는 자아와 버드맨으로서의 자아로 분열된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싸이코 드라마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그가 염력으로 물건을 움직이거나 하늘을 나는 모습은 타인에게 목격되지 않는 자신만의 망상이다. 또한 할리우드 오락 영화의 허상을 성찰하는 자기반영적인 영화이자, 완전한 리얼리즘의 획득이라는 영화의 오랜 숙원에 한 발짝 더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예술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러한 특성들을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전략으로 컷의 흔적을 모두 지워내며 마치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촬영한 듯한 착시효과를 만들어냈다(분명 촬영 당시에는 컷이 존재했지만 그 횟수가 몇 번인지에 대해서는 제작진이 밝히고 있지 않다). 컷이 없이 사건이 진행되지만 촬영시간/상영시간과 영화 속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 컷이 없기에 당연하게도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전통적인 기법인 페이드아웃과 페이드인조차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물며 시간의 경과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자막조차 없다. 이 말은 즉슨, 시간의 경과가 오로지 카메라의 움직임만으로 부지불식간에 표현된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기껏해야 등장인물에게서 고개를 돌려 텅 빈 공간과 사물을 잠시 비추거나 느리게 훑고 지나간다. 그러면 어느새 다음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라고 말한다.

 

편집을 포기하면서 얻는 가장 큰 효과는 사실감이다. 영화는 컷 없이 배우의 에너지만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연극을 모방하고 궁극적으로는 컷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탐한다. 리건의 몸짓들과 그가 목격하는 환영들은 현실을 환기시키는 영화적 테크닉 속에 자연스레 녹아 들어가며 그 비현실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그곳에 관객이 인식할 수 있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없다. 리건의 분열증이 초래하는 환영들은 적어도 그에게만은 현실이다. 어느 순간, 관객은 그의 분열증에 동참하며 그만의 현실을 체험한다. 더 이상 영화 속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목도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현실처럼 느껴지느냐이다.

우여곡절 끝에 리건은 연극 무대에 오른다. 주인공인 권총으로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진짜 총을 꺼내 자신을 향해 쏜다. 관중들은 기립박수와 환호성으로 그가 보여준 생애 최고의 연기에 답례한다. 그 순간, 영화 속에 죽어있던 컷들이 일시적으로 되살아난다. 그것은 영화가 이제껏 차곡차곡 쌓아온 현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현실로 도약한다는 신호이다. 언론에서는 그가 이제껏 없던 장르인 슈퍼 리얼리즘’- 현실을 초월한 (환상이 아닌) 현실 - 을 만들어냈다고 호들갑이다. 그리고 이제 리건은 진짜 버드맨이 되었다! 이번에는 그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고 다만 딸의 시선과 표정을 통해 그 사실을 짐작하게끔 할 뿐이다. 리건의 분열증적 현실에서 벗어나 마침내 슈퍼 리얼리즘의 세계에 당도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