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기록의 나라’라 불릴 만큼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그중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은 왕을 중심으로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총 망라한 조선을 보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왕조실록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기록문헌들이 많지만, 최근 발견된 정조의 어찰첩은 새로운 사료적 측면을 떠나서 한 나라의 왕의 사적인 부분과 솔직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귀추가 주목된다.
이러한 정조의 어찰첩은 기존에 연구되었던 정조의 정치적 행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편지로 대신들과 긴밀히 밀담을 나누었고, 그러한 편지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대략 300통 정도이다. 그 중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 사이에 오고간 편지가 무려 297통이다. 최근 정조의 어찰첩에 대해 여러 책들이 출판되었는데, 그 중 『정조의 비밀편지』는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오고간 편지를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오고간 편지가 세상에 공개된 경위와 그 내용, 더불어 편지 속에 나타난 정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나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오고간 편지는 정조가 죽은 1800년 무렵에 오고간 편지들로, 정조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원래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이 편지를 받은 즉시 읽고 바로 폐기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심환지는 이를 폐기하지 않고 남겨놓았고, 이후 심환지 후손들이 보존하고 있었던 것들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은밀히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을까? 이는 일단 정조시대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당시 정조는 역적으로 몰려 희생된 사도세자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보통 역적의 자식들은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영조는 정조를 사랑하여 그를 살려두고 사도사자의 형이었던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삶을 살게 하였다. 정조는 세손으로 즉위하여 세자처럼 지내다가 영조가 죽기 4개월 전부터 대리청정을 수행하였고, 영조 사후 정조는 왕으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왕이 되면서부터 자신의 아버지는 ‘효장세자’가 아닌 ‘사도세자’임을 천명하였다. 이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아갔던 노론계열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늘 암살의 위협 속에 살게 되었고,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자객이 정조가 묵고 있는 곳에 지붕을 뚫고 침입하려던 모습까지 나타난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정조는 친위대인 장용영을 신설하고 궁중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으는 데도 힘썼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치를 계승하여 노론과 소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도태되어 있었던 남인 계열과 학문이 뛰어난 서얼 출신들을 관료로 등용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조의 말년의 삶은 어땠을까? 정조는 평생 자신의 생각과 다른 대신들과 치열하게 다퉈야 했고, 그 속에서 오고간 것이 바로 정조의 비밀편지이다. 특히 심환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한 노론 벽파로써 정조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순조 즉위 후에도 심환지는 영의정에 올라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장용영을 혁파하고 정조가 실시한 일련의 정책들을 파기하면서 정조의 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어찰첩이 발견되면서 지금까지 정적으로 평가되었던 둘 사이의 관계에 의문이 제기된다. 정조는 왜 심환지에게 무려 297통이나 되는 편지를 썼을까? 편지 속에서 정조는 심환지를 앞세운 벽파에 대해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으며, 벽파의 주축인물과도 정치적 사안을 논의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조는 심환지에게 민감한 정치 현안의 처리와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많이 보냈는데, 이는 심환지가 정조의 일종의 정치적 멘토로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불어 『정조의 비밀편지』에는 정조의 어찰첩에 나타난 정조의 인간적 면모와 편지 내용 속에 등장한 어구와 문체를 분석하는 등,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서술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정조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을 정조의 어찰첩을 통해서 분석해냈고, 정조가 독살이 아닌 종기가 원인이 되어 승하했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심환지와 정조 사이에 오고간 편지를 중심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책 내용이 정조의 말년부분에만 치우쳐진 경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정조는 세종대왕보다도 더 성군으로 칭송받아야 할지 모른다. 세종은 태종이 이미 자신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시책을 펼 수 있었지만, 정조는 시책 하나하나 늘 자신의 반대파와 싸워가면서 성취해 나가는 일종의 승부사와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정조는 정적의 의견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정적을 자신의 멘토로 삼았다. 이러한 정조의 모습은 지금의 정치에 많은 귀감이 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서 배척하기보다 철저하게 내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조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의 정치인들도 그러한 덕목을 갖추고 기르길 소망해본다.
『정조의 비밀편지』에는 정조의 어찰첩에 나타난 정조의 인간적 면모와 편지 내용 속에 등장한 어구와 문체를 분석하는 등,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서술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정조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을 정조의 어찰첩을 통해서 분석해냈고, 정조가 독살이 아닌 종기가 원인이 되어 승하했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심환지와 정조 사이에 오고간 편지를 중심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책 내용이 정조의 말년부분에만 치우쳐진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좀 더 도움이 되는 책을 몇 가지 소개한다.
역적의 아들 정조
설민석 지음 | 휴먼북스
이 책은 정조가 태어나면서 왕위로 즉위하는 과정과 그의 일대기를 서술했다. 영화 ‘역린’을 봤다면 더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정조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장면 여섯 가지를 이야기한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던 어린 시절, 동궁 시절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세력들의 협박 편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표한’ 즉위식, 암살 위협을 받은 존현각 사건, 화성 건설 등 정조의 업적 그리고 죽음까지 다루고 있다. 영조, 사도세자, 정조 각자의 입장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왜, 그랬을까?’고민하고 생각해보며 ‘비극 3대’인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한층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상각 지음 | 추수밭
이 책에서는 앞부분에 정조의 화성행차 그림을 삽입하여, 그림 속에 나타난 행차의 모습을 실제 상황처럼 묘사하여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정조가 행한 업적과 정조를 거쳐 간 사람들에 대해서 주제형식으로 서술하여 읽기 편리하다. 이 책은 인간 이산과 왕 정조로서의 다양한 얼굴들을 모자이크처럼 맞춰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입체적인 얼굴을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책이다. 저자는 조선의 대표적인 개혁군주로만 바라볼 때 놓쳤던 정조의 다양한 모습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험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단련시켰던 어린 시절의 절박함, 역적으로 몰아 숙청한 정적들에 대한 복수와 군주로서의 책무 사이에서 갈등했던 인간적 고뇌 등을 보여준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박석무 지음 | 한길사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고 소득을 고루 나누어 갖자는 다산의 '전론'사상을 어떻게 해야 실현할 수 있을까. 깨끗하고 맑은 세상으로 바꾸자던 그의『목민심서』정신은 언제쯤 실현될 것인가. 다산의 시대와 사상을 종합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일대기. 그가 이룩한 진보적 ·실용적 학문, 그 희망과 꿈의 세계와 만난다.
어찰첩과는 좀 동떨어진 내용이지만 정조하면 떠오르는 사람,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 평전 가운데 가장 짜임새 있고, 고증이 세심하여 읽기에도 좋은 책이다. 저자는 다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다산의 생애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조와 18세기
역사학회 편 | 푸른역사
18세기는 한국에서만 의미 있는 세기가 아니다. 한국에서 18세기가 상공업 발달, 문예부흥, 정조 같은 탕평군주의 시대였다면, 서양에서도 18세기는 절대왕정, 계몽사상, 시민혁명의 시대였고, 중국은 경제 번영, 문운, 평화의 시대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는 자부의 세기였던 것이다. 통상 근대화의 표준으로 간주되는 서양의 18세기가 전형적이기는커녕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취급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다수의 글들이 명시적, 암묵적으로 서양의 18세기 발전수준을 거울삼아 전개된다.
가장 분명하게는 18세기 조선의 사회경제 발전의 수준을 다룬 이헌창, 루이 14세와 정조의 절대왕정을 비교한 김기봉, 그리고 중국의 18세기 경제 발전을 주로 서양과 비교한 한승현의 글이 그렇다. 18세기 조선의 탈중화를 ‘자국화’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계승범의 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 근대화의 한 국면인 민족주의 혹은 국민국가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