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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 | 연재 [클래식 뒷담화]
너무 아름다워서 더욱 슬픈 전설, 클라라 하스킬
문윤걸(2015-03-03 15:59:09)

피아노의 성녀’, ‘다시 태어난 모차르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 피아니스트’, ‘천재 중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는 연주자가 있습니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난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 1895. 1. 7 ~ 1960. 12. 7)이라는 피아니스트입니다. 하스킬은 뛰어난 연주 뿐만 아니라 견디기 힘든 고난과 역경을 반복하면서도 그마저도 음악으로 승화시켜 그녀의 삶 자체를 감동으로 만든 연주자로 유명합니다.

 

그녀의 첫 번째 불행은 세 살 때 일어났습니다. 집에 큰 불이 일어났고 불 속에서 아이들을 구한 아버지가 후유증으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하스킬은 외가의 도움으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뛰어난 음악가들이 그렇듯 하스킬도 신동 중의 신동으로 꼽혔습니다.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몰랐던 여섯 살 어린 나이에 모차르트의 소나타 한 악장을 딱 한번 듣고도 그대로 연주했다는 일화가 있으니까요. 그 덕에 하스킬은 외삼촌의 도움으로 일곱 살 되던 해에 빈에서 거장 알프레도 코르토로부터 본격적인 피아노 수업을 받았는데 석달 만에 더 가르칠 게 없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11세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였고 4년 만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두 부문에서 수석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음악성이 뛰어났으며, 당시 최고 연주자이던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등과 협연하며 음악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습니다.

이 시절 하스킬은 뛰어난 재능에 탁월한 감성과 지성,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외모까지 함께 갖추어 곧 음악계를 평정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191318,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그것도 기교적으로 완전무결하며 음악적으로 온갖 찬사를 아낌없이 받을만하다는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시기에 다발성 신경경화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것입니다. 뼈와 근육, 세포와 세포가 붙어버리고 몸의 신경이 마비되는 이 병은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온몸에 깁스를 한 채 무려 4년 동안이나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병은 나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던 아름다운 외모는 사라졌습니다.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 아름다운 얼굴은 할머니처럼 주름진 얼굴로 바뀌었고, 반듯했던 허리는 굽어지고 비틀어지면서 곱추가 되고 만 것입니다. 더욱이 그녀를 돌보아주던 유일한 희망, 어머니마저 돌아가셨고 하스킬은 고통과 절망, 그리고 암흑같은 세계에 홀로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스킬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2126세에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피아노 연주는 더욱 나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복귀 무대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대가 아닌 곳에서 대중과 만나는 일을 두려워했습니다. 연주회 후에 리셉션에도 잘 참석치 않았고 음악계의 영향력 있는 매니저들과도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또 일반 대중들도 아름답지 않은 그녀의 외모 때문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음악팬들만큼은 하스킬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하스킬은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했고, 또 아름다운 외모도 잃어버렸지만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나치의 등장이었습니다. 하스킬은 유태인인데다가 몸마저 불편했으니 인종청소를 하던 나치에게 붙잡힌다면 여지없이 학살당할 처지였습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하스킬은 마르세이유로 피신했습니다.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하스킬에게 더 큰 불행이 겹쳐 왔습니다. 그만 뇌와 척수에 종양이 생겼고, 종양이 시신경을 눌러 실명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다행히 하스킬을 위해 마르세이유까지 찾아와준 유태인 의사로부터 수술을 받을 수 있어 겨우 몸을 추스렸지만 계속된 불행은 그녀의 심신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모든 것을 잃을 거듭된 역경으로 그녀의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졌지만 내면은 더욱 더 깊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이를 자신의 피아노 연주에 고스란히 실어냈습니다.

1950년 전쟁이 끝나고 하나 둘 제 자리를 찾아가면서 하스킬도 다시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 무렵 부터 한 그녀의 연주는 모두 최고의 연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음반 평론가들은 1951년부터 그녀가 사망한 1960년까지 10년 동안 그녀가 녹음한 모든 음반들이 다 명반이며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라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특히 최고 중의 최고로 꼽히는 녹음은 바이올리니스트 아르쿠르 그뤼미오와 협연한 모차르트 소나타(특히 E단조 K.304), 그리고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죽기 한달 전에 녹음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과 24번 음반이라고 합니다).

하스킬의 연주를 가장 잘 설명한 회고담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당대 최고의 지휘자인 카라얀과 협연한 하스킬의 공연을 본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모로 불리는 명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회고담입니다. 니콜라예바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당시 떠오르는 지휘자인 카라얀을 보기 위해 잘츠부르크의 공연장에 찾아갔다. 협연자인 피아니스트 하스킬이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구부정한 자세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백발머리 때문에 흡사 마녀와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는 순간 카라얀이라는 존재는 내 머리에서 사라졌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스킬이 지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최고의 모차르트 연주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콘서트는 내가 경험한 최고의 콘서트였다.”

음악팬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면서 그녀에게서 가혹한 시련과 역경은 끝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결정적인 마지막 시련을 하나 더 남겨 두었습니다. 1960126. 운명의 날. 그녀는 며칠 전인 121일 파리 상젤리제 극장에서 최고의 파트너였던 바이올리니스트 그뤼미오와의 공연을 마치고 다음 공연장소인 벨기에 브뤼셀로 떠났습니다. 브뤼셀 역에 도착하니 그뤼미오의 부인이 마중나와 있었습니다. 먼발치에서 그뤼미오 부인과 눈 인사를 마친 후 역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만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잠시 의식을 되찾았지만 다시 의식을 잃었고 다음날 아침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불행은 그녀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연주자를 이처럼 허망하게 잃은 음악팬들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는 시련과 역경을 안타까워 했고 이를 전설같은 이야기로 두고 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잠시 의식을 되찾았던 마지막 순간, 하스킬은 함께 있던 동생들에게 내일 공연은 힘들 것 같다. 그뤼미오씨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전해다오. 그래도 손은 다치지 않았으니 울지 마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평생을 거듭된 역경 속에서 살아야만 했고, 그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연주를 걱정했고, 또 어떤 고난과 불행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찾아내 마침내 이겨내는 모습에서 그녀의 평생이 어떤 삶이었는지, 그리고 그녀의 음악이 왜 감동적인지 깨닫게 합니다. 청소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더욱 더 음악에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클라라 하스킬에게 음악은 곧 삶이며 존재의 이유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시련과 역경, 그것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클라라 하스킬의 음악에서 찾아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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