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깊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절기상 입춘이었던 것을 보니 봄의 문턱에 다다른 모양이다. 겨울, 이곳 사람들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와서 생겨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일러준다. 지역 명 앞 글자를 눈설(雪)자로 고쳐 넣어 설창이라고도 부른다는 이곳, 고창에서 어느새 나는 세 번째 겨울을 보내고, 네 번째 봄을 맞는다.
마침 근무하고 있는 고창문화의전당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창읍성 초 앞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이 있어 나는 그 길을 즐겨 걷는다. 가만히 들어서 멀찍이 우물 한번, 꽃은 지고 가지와 잎만 남은 동백나무 한번 쳐다보고 한눈에 봐도 그리 넓지 않은 조그마한 고택을 찬찬히 둘러본다.
조선후기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당시 내로라하는 명창들이 드나들었다는, 그러나 지금은 적막한 기운마저 감도는 이곳에 서 있노라니 매서운 찬바람에 코끝을 찡끗거리며, 치맛자락을 한손으로 휘 감은 채 판소리 한 대목을 흥얼거리는 호기로운 여자소리꾼 진채선과 그의 스승 신재효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고창은 판소리의 중시조라고 하는 동리 신재효 선생이 나고 자란 곳으로 유명하다. 동리 신재효 선생의 업적은 다방면에서 조명되어져 왔고, 그의 제자 진채선에게는 조선최초의 여류명창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들을 소재로 한 공연물도 많은데, 1998년 6월 18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초연된 국립창극단의 <광대가>가 아마도 최초의 공연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신재효 역할을 맡았던 김일구 명창이 처음으로 소리는 없고 사설만 있는 신재효의 광대가에 작창을 해서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 진채선을 다룬 오페라 <채선>과 같은 작품도 전주 무대에 오르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진채선과 신재효라는 인물이 공연의 소재로 사용된 결정적 계기는 2010년 이정규의 장편소설 <진채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설 <진채선>은 국악뮤지컬 집단 타루에 의해 국악뮤지컬<진채선 - 꽃처럼 피고진 채선>으로 재탄생된다. 이후 타루는 꾸준히 진채선과 신재효를 조망하였는데 <운현궁 로맨스>와 이를 새로운 버전으로 재구성한 <채선이야기>까지 이렇게도 신재효와 진채선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곳 고창에서 공연과 문화예술 관련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현재 고창에 거주하며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신재효와 진채선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제작했던 광대의노래 <동리, 봉황은 오동을 기다리고>, 얼마전 MBC에서 제작하여 방영되었던 <시대의 벽을 넘은 여성 진채선> 또한 3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도리화가> 등의 작품들에 감사한 마음이다.
이제 고창에서 올렸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려고 한다. 물론 앞서 서두가 길었던 신재효와 진채선을 소재로 한 작품들로 고창 내에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국악예술단 고창’과 함께 했던 프로젝트 사업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이다.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은 특별히 전라북도 내에 고풍스러운 한옥이 많고,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형과 무형의 자원을 결합하는 사업으로 기획되었고, 이를 야간에 시행하여 체류형 관광객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사업이다. 2012년에 고창군이 도내 공모사업에 선정되면서 몇 편의 공연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2012년 5월 18일부터 10월 13일까지 5개월간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7시30분에 동리 신재효 고택에서 진행되었던 2012년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은 금요일과 토요일에 각각 다른 두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는데 토요일 공연 <신 도리화가>는 신재효와 진채선, 진채선의 소리를 사랑했던 흥선 대원군과의 관계와 스승인 신재효와 제자 진채선의 애틋한 사랑을 다룬 내용으로 주호종 연출, 안세형이 극작을 맡았다. 또한 금요일에 진행되었던 신재효 고택의 구석구석을 풍물 굿을 통해 천천히 둘러보며 이곳을 찾은 관객의 복을 빌어주는 형식의 관객 참여형 공연 <오동나무집 엿보기>는 고창농악보존회가 주관하였다. 2012년은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을 고창에서 시작하게 된 원년으로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펼쳐진 다양한 공연으로 인해 고창의 주말이 풍성했다.
2013년 역시 같은 사업으로 국악예술단 고창과 <광대열전>이라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동리 신재효가 경복궁 낙성연에 보낼 명창을 선발하는 고창명창대회를 열며 펼쳐지는 관아의 3인조 판소리패의 좌충우돌 에피소드와 여류명창 진채선의 탄생기를 재미있는 픽션으로 그려낸 퓨전코믹판소리극으로 고창명창대회는 트렌디하게 오디션 형식을 차용하였다. 2013년 5월 25일부터 10월 5일까지 매주토요일 오후 8시에 고창모양성 앞 야외특설무대에서 진행되었고, 회당 평균 302명의 관객이 찾는 등 성공적인 반응을 보였고 작년과 동일하게 주호종 연출, 경민선 작가가 참여한 작품이었다.
2014년에는 <광대열전>의 두 번째 버전 <광대열전2-대단한 탄생>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신재효가 조선조 최고의 프로듀서라는 설정으로 역시 경복궁 낙성연 대회에 참가할 소리꾼을 선발하는 과정을 그리는 과정을 그렸는데 2013년 <광대열전>과 다소 차이가 있다. <광대열전>에서는 진채선과 가족에 얽힌 이야기를 탄탄한 전개를 통해 풀어가며 고창명창대회인 오디션을 가볍게 처리해나갔다면 2014년 <광대열전2-대단한탄생>은 스토리라인은 단순화시키고 치열한 오디션 현장을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마치 콘서트 현장에 온 듯 한 느낌으로 정통 판소리와 퓨전형식의 전통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2014년 5월 17일부터 10월 25일까지 매주토요일 오후 8시에 총 27회의 공연을 진행했으며, 황두수 연출, 경민선작가가 제작에 참여하였다. 한옥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공연에 대한 만족도는 굉장히 높았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간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의 제작과 현장운영에 참여하면서 가슴 벅차게 뿌듯한 순간도 있었지만 동시에 어려운 순간도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날씨와 환경 등 다양한 변수를 가지고 있는 야외공연을 해마다 약 6개월간 장기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임에 틀림없다. 매주 주말을 반납하고 무대 셋업과 철수, 리허설, 관객모객, 객석관리 및 그밖에도 매회 다양하게 일어나는 버거운 숙제를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총괄기획을 맡았던 나를 성장시키고, 고창의 예술단체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도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고창을 찾는 관광객과 고창군민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 사업이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 공연의 개발이라는 방향을 가지고 있어 꾸준하게 신재효와 진채선의 소재로 공연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올 해에도 고창의 고즈넉한 한옥에서 신재효와 진채선을 노래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고창문화의전당 공연기획담당 전주희
고창문화의전당 공연기획 및 홍보총괄 업무를 맡고 있으며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 꿈다락토요문화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 운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