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콘서트’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1977년에 상영된 이탈리아 영화지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던, 그러나 지금은 반백수 중늙이가 된 남자, 리처드, 그는 오랜 슬럼프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다친 손을 치료하러 병원에 들렀다가 운명적인 사랑에 마주합니다. 백혈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밝고 쾌활하며 티없이 맑은 소녀, 스텔라를 만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스텔라는 하루 하루 수명을 다해가면서도 오히려 자신보다는 사랑하는 남자가 재기하도록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스텔라에게서 용기를 얻은 리처드는 마침내 <스텔라에게 바치는 콘체르토>라는 곡을 작곡해 무대에 오릅니다. 무대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리처드를 보며 행복한 표정으로 ‘사랑하는 리처드’라는 말을 남기며 숨을 거두는 스텔라. 이 대목에서 다들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리고 혹 남이 볼까 눈물을 훔치느라 애먹지요.
라스트 콘서트, 마지막 연주회, 이 말만으로도 그냥 애잔함이 밀려 옵니다. 늦가을 찬바람이 살살 감기는 석양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이 슬프고도 감동적인 라스트 콘서트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영화와는 달리 실제로 일어난 라스트 콘서트에서는 연주자인 피아니스트가 백혈병을 앓는 주인공입니다. 그는 루마니아 출신의 디누 리파티(Dinu Lipatti, 1917. 3.19~1950. 12. 2)라는 천재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디누 리파티는 33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아 겨우 5년 정도밖에 연주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장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는 피아니스트로 손꼽히고 있으며 그가 남긴 레코딩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디누 리파티는 루마니아의 부유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전문 음악가의 길을 걷진 않았지만 유명한 바이얼리니스트였던 사라사테의 제자였고, 어머니 역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으니 음악가로 성장하기에는 축복받은 환경이었지요. 리파티는 4살에 모차르트의 미뉴엣을 연주하는 등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으며, 17세에는 음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이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1934년 17세가 되던 해에 리파티는 비인국제콩쿠르에 출전하였는데 결과는 2등에 그쳤습니다. 이유는 연주 실력 때문이 아니라 경쟁자보다 어리다는 것이었습니다. 1등을 한 연주자의 나이는 대회 출전 제한연령에 차 있었고, 리파티는 17세에 불과해 아직도 기회가 많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명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가 이 결과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코르토는 콩쿠르에 무슨 나이가 고려되어야 하냐며 당연히 리파티에게 1등을 주어야 한다며 강력히 항의했고 주최측이 이를 묵살하자 바로 심사위원직을 사임하고 리파티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리파티는 단번에 유명인사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리파티의 실력이 정점에 오르려는 순간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어려서부터 건강에 조금씩 문제가 있었는데 단지 좀 허약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만 그것이 불치병인 백혈병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의사는 그에게 당장 입원해서 병을 치료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리파티는 입원할 경우 연주활동을 거의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병치료와 연주활동을 병행하겠다고 고집했고 여주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백혈병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리파티가 27세가 되던 1944년이었으니 6년간 투병활동과 연주활동을 병행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간 셈이지요.
병마가 조금씩 조금씩 생명을 갉아 먹어 바람에 그의 삶은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지만 무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진통제를 맞으며 계속 무대에 올랐고 그때마다 빼어난 연주를 남겼습니다. 마침내 1950년 9월 16일 프랑스의 동부지역에 있는 브장송에서 음악제가 열렸고 리파티를 초청했습니다.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져 겨우 몸을 가눌 정도였던 그의 건강을 염려한 주치의와 아내, 주변 사람들은 더 이상은 무리라며 이제 그만 쉬면서 질병치료에 전념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청중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결국 브장송 음악제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브장송 음악제 무대에 오르는 날, 연주를 겨우 서너시간 앞둔 저녁, 그는 정신을 잃었다가 주사를 맞고 간신히 깨어났습니다. 그래도 무대에 서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고 무대로 나아갓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계단을 오르는 것 조차 힘들어 했습니다. 주사 몇 대를 연거푸 맞은 후 겨우겨우 무대에 올랐습니다. 퀭한 눈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몸 상태로 무대에 오르는 리파티에게 청중들은 존경과 염려, 그리고 사랑과 경외심을 담아 큰 갈채를 보냈습니다.
리파티는 이날 <바흐의 파르티타 1번>,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 <슈베르트의 즉흥곡>, 그리고 마지막으로 <쇼팽의 왈츠 14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 곡을 연주하고 나와서 다시 주사를 맞고 들어가 또 한 곡을 연주하고 그렇게 한 곡 한 곡 힘들게 연주해 나갔습니다. 너무나 많은 주사를 맞은 나머지 얼굴은 퉁퉁 부어 표정이 지어지지 않을 정도였고 그런 리파티를 보는 관객들은 가슴조리며 여기저기서 흐느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연주곡인 쇼팽의 왈츠곡 14곡 중 13곡을 연주했고 이제 마지막 단 한 곡의 소품만 남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였나 봅니다. 힘에 부쳐 끝내 이 한 곡을 연주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 곡을 남긴 채 청중들에게 고별 인사를 했습니다.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무대를 사랑하고 청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그에게 감사와 존경을 한껏 담아 보냈습니다. 청중들의 박수가 끝이질 않자 리파티는 힘겨운 몸으로 다시 피아노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앙코르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앙코르곡으로 리파티가 선택한 곡은 바흐의 <인간 소망의 기쁨되시는 예수>라는 곡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마지막 연주곡이 된 이 곡을 아주 담담하게 연주해 나갔습니다. 이 연주가 끝난 후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3개월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브장송 음악제에서의 이 연주회는 그대로 실황녹음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음반으로 남아 있습니다. 실황녹음인 탓에 현장의 숨소리까지 모두 기록되었는데 특히 리파티의 거친 숨소리마저 그대로 담겨 있어 더욱 감동적입니다. 이 음반은 가장 권위있는 음악평론지인 그라마폰지가 70주년을 맞이한 1995년 10월에 선정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클래식레코딩 100선>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또 그가 죽기 5달 전에 녹음한 쇼팽의 왈츠 14곡은
하지만 아쉬운 것은 브장송 음악제에서 연주한 마지막 곡, 리파티의 마지막 곡이자 그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남긴 마지막 기도와 같았던 앙코르곡 <인간 소망 기쁨되시는 예수>는 실황음반에 담기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연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현장의 감동적인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던 EMI 음반회사의 저명한 녹음 프로듀서가 레코딩 버튼을 누르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보다는 음악과 청중, 그리고 무대에 헌신하고자 했던 천재음악가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어떻게 해야 퇴장하는 자가 아름다울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