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형사 ‘아키카주(야쿠쇼 코지)’는 분노 조절 장애로 가족과 떨어진 채 홀로 살고 있다. 아내로부터 여고생 딸 ‘카나코(고마츠 나나)’의 실종 소식을 듣고 그녀를 찾는 과정 중에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그 진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카나코에게 완전히 매혹되어버린 이들이 그녀에 의해 부지불식 간에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녀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소년에게 마약을 먹여 노인에게 몸을 팔게 만들고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그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다고 웃으며 항변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그 진실을 넘어 그녀가 영화 속에 존재하는 방식,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가 뒤얽힌 파편화된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그녀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녀의 모습은 누군가의 회상이나 꿈, 환상 속에 느닷없이 출몰하고, 나아가 영화의 자의적인 편집 속에서(마치 이 영화마저 그녀를 단편적으로 기억하듯) 반복적으로 틈입한다. 다시 말해, 마치 그녀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유령’처럼 소환되어 영화 전반을 떠돈다. 유령과도 같은 카나코의 존재성은 이내 현실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원리를 규정한다. 그곳은 무규칙이 유일한 규칙인 꿈처럼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세계이다.
그 자유로운 세계는 미성년이라는 그녀의 미성숙한 상태와 일맥상통한다. 감독은 아직 현실의 때가 묻지 않은, 혹은 현실 원칙에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함이라는 그 미지의 영역에서 불온한 가능성을 읽어낸다. 그녀는 그 미지의 순수성에 의해 철저히 뒤틀린 존재이다. 아이같이 순수하다는 것, 그것은 선악의 이분법 자체가 부재한 백지 같은 상태이다. 그 선악의 구분은 어른들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부패한 경찰과 야쿠자는 자신들만의 규칙이 있으며, 카나코는 그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된다고 말한다. 결국 영화 속에서 대립되는 두 세계는 선한 세계와 악한 세계가 아니라 ‘규칙이 있는 세계’와 ‘규칙이 없는 세계’이다. 우리는 그 규칙에 입각해서만 카나코를 ‘악마’로 규정할 수 있다.
선과 악의 언어가 정립되지 않은 그녀의 순수한 세계에서 사랑의 언어는 그녀가 규정하기 나름이다. 따라서 그녀는 사랑하기 때문에 키스할 수 있듯이, 사랑하기 때문에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랑의 언어가 곧바로 파멸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곳에서는 죽음조차 현실의 죽음과 다르기에 두렵지 않다. 심지어 그녀는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인 아키카주에게조차 ‘사랑해’라고 속삭이며 입맞춤을 한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세계에는 근친상간에 대한 도덕적 금기의 언어조차 부재한다. 그 ‘사랑해’라는 말은 상대방을 자신의 규칙 없는 세계로 초대하는 일종의 주문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며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것은 이미 상대방이 자신의 세계에 이미 들어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녀가 주인인 세계에서 그녀가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카나코가 자신의 딸에게 매춘을 주선한 사실을 알게 된 여교사는 그녀를 죽이려 한다. 그녀가 여교사에게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를 묻자,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카나코는 비웃는다. 그녀의 세계에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딸의 실체를 알게 된 아키카주는 그녀를 찾고자 하는 욕망이 더욱 강렬해지고 그만큼 더 난폭해진다. 그는 딸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이다. 그는 여교사처럼 딸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선택을 하는 대신에 딸을 직접 죽이는 선택을 하려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카나코가 해왔고 원했던 방식, 즉 사랑하니까 죽일 수도 있다는 그 방식대로 그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잘못을 뉘우치기 위한 최후의 처절한 몸짓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