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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 | 연재 [클래식 뒷담화]
프랑스에서 벌어진 오페라 전쟁과 개혁
문윤걸 |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5-01-05 10:04:32)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양 클래식 음악의 꽃은 오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드라마, 음악, 연기, 무용, 미술 등이 하나가 되어 오감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1597년 야코포 페리가 피렌체에서 최초의 오페라를 올린 이후 오페라는 당시 상업의 중심지였던 베니스와 나폴리를 중심으로 발전해갔습니다. 마땅한 즐길 거리가 없던 때라 오페라는 순식간에 대중화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오페라가 매우 세련되고 수준높은 음악 장르지만 당시에는 부를 축적한 귀족과 신흥부자들의 오락이며 여흥거리였지요. 특히 상업 오페라 극장이 곳곳에 세워지면서 이 극장들은 수익을 높이기 위해 대중들이 선호할만한 형태로 작품을 만들기를 원했으며, 그런 작품들을 중심으로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오페라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벨칸토 창법의 등장과 함께 노래가 중심이 되는 오페라로 발전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춤을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특성에 맞게 발레가 반드시 삽입되는 프랑스식 오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독일에서는 딱딱한 독일어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어렵자 아예 중요한 아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대사는 그냥 노래가 아닌 대사로 전달하는 오페라가 만들어 졌구요. 

이처럼 형식이야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공통된 특징은 대중의 반응이 좋은 쪽으로 변화해 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페라에서 중요한 것은 수익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 TV 드라마에서 시청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하지만 시청율이 높다고 해서 좋은 드라마가 아니듯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보듯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대중의 속물적 취향만을 고려한 오페라에 대해서 비판이 일어나면서 오늘날의 오페라로 변화해 갔습니다. 

이런 변화의 중심지는 오페라의 본 고장인 이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엉뚱하게도 프랑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것은 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프랑스가 이탈리아 오페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즐겼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 시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바로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을 수립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군주로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18세기 초 프랑스는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를 자기들 식으로 바꾸어 프랑스식 바로크 오페라를 정립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는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다루는 ‘비극 오페라’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를 <오페라 세리아>라고 부릅니다. 프랑스는 오페라 세리아를 받아들여 프랑스식 오페라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를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라고 하는데 <서정 비극>오페라라고 합니다. 

프랑스식 오페라를 정립해 낸 인물이 바로 장 자크 륄리라는 인물입니다. 륄리는 뛰어난 음악실력과 정치적 감각을 겸비하여 루이14세의 절대적인 총애와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륄리는 오직 자신만이 최고의 음악가라고 믿고 자신의 스타일대로 프랑스 오페라 작곡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작곡가들에게 이 스타일을 따르도록 요구했고 이 스타일로 만들지 않은 오페라는 공연할 수 없도록 조치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조차도 부족해 자기 작품만 공연하도록 했습니다. 륄리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으로 그의 작곡방법은 음악과 노래를 중심에 놓고 거기에 발레를 섞어 만든 오페라 세리아적 방식이었습니다. 

륄리의 고전적인 오페라만이 공연되는 상황이 지속되자 이에 반기를 든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이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1차 오페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인물은 라모라는 음악평론가이자 작곡가였는데 50세가 넘는 나이에 첫 오페라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 오페라가 륄리의 규칙을 무시한 파격적 오페라였던 것입니다. 라모의 오페라가 발표되자 그동안 륄리의 독선에 숨죽였던 음악가들과 애호가들이 라모의 파격적 혁신에 적극 동조하면서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륄리를 옹호하는 측은 라모의 파격적인 혁신에 대해 전통적인 오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고, 라모를 옹호하는 측은 라모의 파격적인 혁신이야 말로 새로운 오페라 시대를 여는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 논쟁은 전국적인 논쟁으로 번져갔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도 한몫했습니다. 절대군주의 총애를 받고 있는 륄리를 지지하는 것은 곧 절대왕정이라는 당시의 정치체제를 지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고, 라모를 지지하는 것은 정치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진보적 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논쟁에 계몽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오페라 형식에 관한 논쟁을 넘어 사상과 정치성향에 관한 논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교계에서 낯선 사람들과 처음 만나 인사할 때 륄리와 라모 중 누구를 지지하는지 물어 보고 대화를 시작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논쟁은 또다른 논쟁이 시작되면서 의외의 상황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새로운 논쟁은 새로운 형식의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수입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오랫동안 진지하고 심각한 비극 오페라가 주류였는데 그마저도 긴 시간동안 공연하다 보니 중간에 휴식시간(인터미션)을 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급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휴식시간을 참지 못하고 뭔가를 해주길 원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휴식시간에 음악을 연주해주기도 하고 짧은 음악극(막간극)을 공연해주기도 했는데 엉뚱하게도 이 막간극이 인기를 모았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본 공연보다도 이 막간극을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았을 정도니까요. 사람들이 막간극을 좋아했던 이유는 본 공연은 진지하고 심각하고 무거운 내용에 스토리마저 엉망이었는데 막간극은 유쾌하고 코믹하면서도 현실을 풍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어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막간극이 인기를 모으자 아예 막간극을 독립시켜 별도의 오페라로 만들어 손님을 유치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형식의 오페라를 <오페라 부파>라고 합니다. 이 오페라 부파가 프랑스에 들어 왔던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도 오페라 부파는 크게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러자 프랑스에서 제2차 오페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오페라 부파 공연으로 프랑스에서 인기를 모은 극단이 부퐁 극단이었는데 이 이름을 따 <부퐁 논쟁>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에서는 앞선 논쟁에서 적대적이었던 륄리파와 라모파가 같은 편이 되고 외국에서 수입된 오페라 부파 지지파와 싸우게 됩니다. 이유는 륄리와 라모가 음악적 성향은 달랐지만 오페라의 소재나 줄거리는 륄리가 정립한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 서정비극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페라 부파는 현실을 비틀고 조롱하는 내용으로 유쾌하고 발랄해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잘 표현하는 오페라라는 평가를 받으며 대중의 지지를 모아갔습니다.  

이 논쟁은 앞선 륄리와 라모의 논쟁보다 더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오페라란 무엇이며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정치적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논쟁 중에 분에 못 이겨 결투를 벌이는 일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승부는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고전 오페라 지지자들이 이겼지만 궁극적으로는 오페라 부파측이 이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고전 오페라는 프랑스 대혁명 후 귀족 사교계가 무너지면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오페라 부파는 <오페라 코미크>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대표적인 오페라 양식으로 자리잡았으니까요. 더욱이 이 논쟁은 오페라 혁명이라고 까지 일컬어지는 <글룩의 오페라개혁>으로 이어져 오늘날 오페라의 원류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프랑스의 오페라 개혁이 오늘날 오페라의 뿌리가 되지만 이 과정이 오직 음악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사회가 새로 한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중의 취향 못지않게 정치개혁도 중요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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