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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우정 안에서 반짝이는 삶의 희망
<야간비행>
김경태(2014-12-02 10:10:39)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퀴어영화 감독인 이송희일이 청소년들의 일상을 날선 시각과 더불어 따뜻한 마음으로 들여다본 영화 <야간비행>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주로 동성애자들의 사랑과 이를 억압하는 사회의 충돌을 멜로드라마적인 코드로 풀어냈던 그가 이번에는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학교와 악순환에 갇힌 왕따 문제를 다루며 진정한 우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비록 영화의 배경은 고등학교이지만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관계에 대한 성숙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게이인 ‘용주(곽시양)’는 같은 학교 친구 ‘기웅(이재준)’을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다. 과거 중학교 시절에만 해도 용주와 기웅은 ‘절친’ 관계였다. 그런데 당시 기웅의 아버지가 정리해고에 대한 앙갚음으로 다니던 공장에 불을 지르면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 그 후 용주와 기웅은 각각 모범생과 일진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용주는 그런 기웅의 주변을 맴돌며 과거의 그 좋았던 관계로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적어도 그때는 동성애자이거나 방화범의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오로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있었다. 용주는 기웅에게 그 시절의 추억들을 환기시키며 줄기차게 구애를 한다. 

기웅은 마침내 용주의 끈질긴 구애에 반응을 보인다. 용주의 부탁대로 그들은 중학교 때처럼 함께 누에섬을 자전거로 누비고 갈대숲 속 냇가에서 수영을 한다. 그들이 욕망하는 유토피아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곳은 과거의 가장 행복했던 특정 시점으로서의 ‘그때, 거기’를 현재로 소환해내야만 일별할 수 있는 퇴행적 공간이자 ‘오래된 미래’이다. 그처럼 유토피아는 과거로 향하지만 당연하게도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대한민국 최남단 기차역이 있는 여수로 떠나고자한다. 여기에서 영토의 끝이라는 지리적 한계 지점을 지향하는 것은 그곳이 공간의 소멸, 혹은 장소의 부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아 갈 수 없기에 다시 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공간적 대체이자 은유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유토피아는 영영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용주의 구애에서 방점을 찍어야 하는 부분은 이성애자인 기웅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예전과 같은 밝은 모습을 되찾아주는 것이며, 나아가 그 시절의 완전무결했던 친구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친구가 없으면 세상은 끝이라는 구호 아래 이제 용주의 사랑은 보다 넓고 깊은 우정으로 승화된다. (아니, 그러고 보니 사랑은 원래부터 시작과 함께 우정을 지향점으로 삼는 것 아니던가?!) 한편, 기웅이 용주의 구애에 감응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바로 용주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면서부터이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다. 그러면서 성적을 위해 친구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삭막한 학교의 규율에 정면으로 저항한다. 이렇게 영화는 서로의 소수자성을 공유하며 외로움을 달래줄 위안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에 맞서는 힘을 우정 안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 그들의 유토피아는 우정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우정 안에서 그들은 삶의 용기를 얻는다. 용주가 우정의 징표로 기웅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을 향해 ‘그냥 한 번 웃어주는 것’이다. 그 한 번의 미소를 통해 새로운 관계는 반짝이며 열릴 수 있다. 행복한 미래는 서로에게 보내는 우정 어린 작은 몸짓들 속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학교에서 이탈한 그들이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눈물을 훔치며 서로에게 기대는 마지막 장면이 그래도 희망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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