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지위와 역할이 고정된 암울한 벌집
벌The bees|랄린 폴 지음|권상미 옮김|알에이치코리아
이 작품은 모든 지위와 역할이 고정된 암울한 벌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용기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광기를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욕망은 죄악이며 기형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사회인 벌집에서 허영과 나태, 질문은 금지되어 있다. 잔혹한 통치하에 벌들은 계명을 복창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만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랄린 폴은 주인공 플로라의 눈을 통해 벌집과 꿀벌들의 조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기능과 구조를 정교하게 알려준다. 수년간의 자료 섭렵, 생물학자들과 양봉가들의 인터뷰를 거쳐 구현된 벌집의 세밀한 묘사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에 나오는 수도원을 연상케 하고 벌들의 생태에 대한 서술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닮았다.
FBI와 뉴욕경찰을 움직인 책?
플래시 보이스|마이클 루이스 지음|이제용 옮김|비즈니스 북스
베테랑 트레이더였던 브래드 카츄야마는 어느 날 자신의 주문 내역이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일을 경험한다. 나아가 주식을 매매할 때, 시장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채고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문제를 파헤칠수록 그는 초단타매매를 비롯해 미국의 거대 금융회사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들의 약탈적 성격과 비윤리성을 깨닫는다. 이 책은 어떤 원리로 그런 거래가 이루어지는지, 그로 인해 이익을 얻는 집단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이를 통해 탐욕이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되는 세상에서 정의, 신뢰, 정직의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만난 너와 나
나의 딸의 딸|최인호 지음|최다혜 그림| 여백
이 책은 작가이기에 앞서 한 아버지이며 할아버지인 최인호가 딸과 손녀에게 전하는 가슴 벅찬 사랑과 감사의 고백이다. 이야기 속에는 돌도 지나지 않은 아픈 딸을 들쳐 업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가는 아버지가 있고, 밤새워 시험 공부하는 딸을 몰래 훔쳐보며 홀로 한숨짓는 아버지가 있다. 또 거기엔 유아원을 ‘땡땡이’ 치고 손녀를 데리고 백화점에 놀러갔다가 딸에게 들켜 혼이 나는 할아버지가 있으며, 손녀 앞에서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춤추고 노래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딸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삶의 지속,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만난 너와 나의 인연의 신비에 대한 경탄이자 찬미이다.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지만, 때로 돌아보면 생명의 경이로움이었음을 일깨운다.
속 시원하게 웃긴 어느 여자의 이야기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아버지는 태어나기 전에 사라지고,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법의 하얀 가루로 잊어보려다 일찍이 세상을 떠나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아온 놈베코가 자신 앞에 연이어 나타나는 불행한 사건들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헤쳐 나가며 행복을 쟁취해가는 과정을 만나볼 수 있다. 분뇨통을 나르던 그녀가 다이아몬드 28개를 손에 넣고 세계의 왕들과, 대통령들과 사귀고 열국을 벌벌 떨게 하고 세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까지의 여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놈베코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동안 유쾌함과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고백의 문장들| 이성복 지음| 열화당
산문집 '고백의 형식들'에는 1976~2014년 사이에 이성복 시인이 쓴 산문 21편이 담겨 있다. 책에 실린 산문 '시에 대한 각서'에서 시인은 "사람의 지옥은 시의 낙원이다. 시 쓰는 사람은 필히 더럽고 불편한 삶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흔 해 가까이 이루어진 이성복 시인의 사유의 편린들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삶은 무엇인가’, ‘이 세상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이 물음들은 냉정한 자기 성찰로, 세상 모든 ‘입이 없는 것들’에 대한 사유로, 글쓰기의 수많은 유비와 은유로,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고백’들로 그를 이끈다.
인간의 비밀을 ‘정확한 문장’으로 말하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마음산책
문학평론가로 이미 두꺼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저자는 어두운 극장에서 메모를 하고, 같은 영화를 대여섯 번 반복해서 보며 영화평론을 해나갔다.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모르는 저자는 문학평론가로서 물을 수 있는 것을 묻고자 했고, 좋은 이야기에 대한 글과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밀에 대한 글을 써내려갔다. 칭찬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에 대해서만 쓰고자 한 저자의 정확한 칭찬을 만나보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2012년 6월부터 2014년 4월까지 약 2년간 ‘씨네21’에 발표했던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연재 글 19편과, 2011년 웹진 ‘민연’에 발표했던 글 2편, 2013년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 발표했던 글 1편을 묶어 27편의 영화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총 22편의 글을 주제와 성격에 따라 4부로 나누고, 연재 외 발표 글을 5부 ‘부록’으로 엮었으며, 사랑, 욕망, 윤리, 성장의 이야기를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