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모 감독이 그려낸 가장 성숙한 사랑 이야기인 <5일의 마중>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모택동의 공산당 정권에 의해 투옥되었던 대학교수 ‘루옌스(진도명)’는 10여년이 흘러 출소해서 집에 오지만 심인성 기억장애를 앓고 있는 아내 ‘평완위(공리)’는 늙어버린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는 딸 ‘단단(장혜문)’이 무용을 그만두고 방직공장에서 일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녀의 기억은 마치 어느 특정 순간에 멈춰버린 듯하다. 그녀는 5일에 온다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매달 5일이면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간다. 루옌스는 그런 평완위에게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자 애쓴다.
평완위의 기억 속 루옌스는 빛바랜 사진 속 젊은 모습이다. 따라서 그녀가 기다리는 남편은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에서 와야만 한다. 세월을 거스르지 않고는 그녀기 원하는 만남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기다림이 미래가 아닌 과거로 향했을 때, 그녀는 도착적인 시간성에 포획된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기다리는 대상은 젊은 남편이 아니라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다시 말해 남편이 반혁명분자로 잡혀가기 전에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던 그 시절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과거에 그러했듯 잃어버린 그 시절을 되찾기 위해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 연도와 달을 지워낸 5일의 마중을 반복하는 것은 스스로를 순환되는 시간성에 가두는 행위이다. 그것은 앞으로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항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몸짓이다.
그 시절과 함께 회귀하지 못한 채 나이만 들어버린 루옌스의 등장은 그녀의 기다림을 헛된 노력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그녀가 구축해 놓은 견고한 상상적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위험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을 애써 부정하고 심지어 그 부재의 기간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팡 아저씨’와 그를 동일시하면서 그를 집 밖으로, 그녀의 상상적 공간으로부터 쫓아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옌스는 그녀 곁에 가까이 머물며 자신에 대한 그녀의 기억을 조금씩 되돌리고자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운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옥중에서 썼던 편지 꾸러미 상자를 그녀 앞으로 보낸다. 그는 그 상자를 집까지 옮기는 것을 도와주고 그녀를 대신해 편지들을 직접 읽어주면서 가까워진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주기 위해 매일 방문하던 그는 남편이 아니라 편지 읽어 주는 남자로 각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망설인다. 그녀의 세계에 동화되기 위해서는 남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상상적 세계와 자신의 현실 세계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야만 한다.
한편, 평완위는 설날에 감기로 몸져누워있는 그에게 떡국을 가져다준다. 그녀는 그에게 새로운 이름과 위치를 부여하며 자신의 세계 속으로 점차 받아들인다. 비록 그녀에게 있어 그에 대한 감정은 부부관계의 사랑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이 정립한 그와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친밀한 감정들을 쌓아가는 것이다. 결국 루옌스는 그녀만의 견고한 세계를 깨려는 더 이상의 시도를 하지 않고서 그 세계에서 그녀가 원하는 모습으로 들어가 살기로 결심한다.
몇 년이 지난 후의 어느 겨울, 루옌스는 자전거 뒤에 달려 있는 수레에 수북이 쌓인 눈을 치우고 그 위에 조심스레 평완위를 태운다. 목적지는 기차역이며 그곳에서 그들은 ‘루옌스’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서 나란히 출구 쪽을 바라본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와버렸기에 다시는 올 수 없는 루옌스를 찾는다. 그들이 함께하는 이러한 마중들은 이제 익숙한 일상이 된 듯하다. 이 마지막 장면은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랑에 관한 오랜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의 사랑을 정의한다면, 사랑은 서로의 세계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