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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 | 연재 [클래식뒷담화]
영영 묻힐 뻔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문윤걸 교수 (2014-11-03 16:29:53)


유럽 음악사에는 유명한 미완성 작품들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미완성 작품은 아마도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아닐까 싶네요. 젊은 분들은 못 보신 분도 많겠지만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아마데우스>라는 영화 때문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또 유명한 미완성 작품은 베토벤의 교향곡 10번입니다. 베토벤은 모두 9개의 교향곡만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음악사가들은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이는 항상 두 가지 작품을 동시에 작곡하는 베토벤의 독특한 작곡 습관 때문입니다. 베토벤은 교향곡 5<운명>6<전원>을 동시에 작곡했고, 7번과 8번도 동시에 작곡했습니다, 그래서 9번 교향곡을 쓰는 동안 동시에 10번 교향곡도 진행했을 것이라 추측했고, 한발 더 나아가 10번의 스케치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마침내 1983년 베리 쿠퍼라는 영국의 음악학자가 베를린 국립 프러시아 문화재단 도서관에서 베토벤의 새로운 작품 흔적들을 발견했고, 그 파편들을 5년 동안 조각조각 모아 낸 끝에 이것이 베토벤 10번 교향곡의 1악장 임을 밝혀 냈습니다(이 작품은 1988년 런던 로얄 리버풀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작곡가들이 미완성 작품을 놔둔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슈베르트도 그 자체로 충분히 완성된 것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고 평가를 받긴 하지만 1, 2악장만을 가진 미완성 교향곡(8번 교향곡 B단조, 작품 759)을 남겼습니다.


작곡가들이 미완성 작품을 남기는 경우는 대부분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슈베르트는 31살에 요절했지만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시킬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슈베르트가 1, 2악장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해 3악장을 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만약 슈베르트가 자신의 미완성 교향곡이 그 자체로 완성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했다면 이 작품을 살아 있는 동안 연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슈베르트의 생전에는 연주되기는 커녕 영원히 묻힐 뻔했습니다. 이 작품은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지 37년 후인 1865년에 우연한 계기로 초연되어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과연 슈베르트가 이 작품에 애정이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실제로 슈베르트는 이 작품을 1,2악장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3악장을 스케르초로 구성해 9소절의 오케스트라 악보와 그 뒷 부분의 피아노 스케치를 남기는 등 3악장과 4악장을 쓸 계획이 있었으니까요.


이 작품은 악보 원본에 18221030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이 날짜가 작곡에 착수한 날인지 아니면 제2악장을 완성한 날인지, 아니면 작품과는 아무 상관없이 기록된 날짜인 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음악사가들은 여러 정황상 작품이 악보에 기록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슈베르트가 사망한 해가 1828년이니까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슈베르트 사후 이 작품은 안젤름 휘텐브렌너’(1794~1868)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이 초연된 것도 안젤름이 이 작품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기 때문인데 안젤름이 이 작품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안젤름과 슈베르트 사이에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슈베르트는 상당히 소심하고 사교성도 부족해서 생전에는 지금과 같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는 주변 인물들의 도움에 크게 의지했습니다. 25살이 되던 1821년은 슈베르트 전기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습니다. 이 해에 슈베르트는 빈 음악계의 유력자들로부터 유능한 작곡가로 공식 인정을 받아 <마왕>을 시작으로 여러 권의 가곡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이 가곡집이 인기를 모으면서 오페라(마법의 종)도 작곡해 빈 궁정 오페라극장에 올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보다도 1821년이 슈베르트 전기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지금까지 슈베르트의 활동을 개별적으로 후원하던 친구들이 후원회를 결성하여 슈베르트의 창작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슈베르트의 음악만을 연주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임을 구성한 사람은 슈베르트보다 8살이 많았던 요제프 폰 슈파운으로 시인, 작가, 화가, 배우, 법률가,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후원자를 모았습니다. 이들은 거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이 모임을 슈베르티아데’(슈베르트의 밤 Schubertiade)이라고 합니다.


안젤름은 이 모임의 핵심 멤버로 그라츠라는 도시의 유력한 작곡가였습니다. 안젤름은 슈베르트를 후원하기 위해 오페라를 의뢰해 작품을 받았는데 그만 그라츠 오케스트라의 능력부족으로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슈베르트에게 미안했던 안젤름은 대신 슈베르트를 그라츠시 음악협회 명예회원으로 추대했습니다. 안젤름의 이러한 마음 씀씀이도 고맙고 당시 작곡가가 음악협회 명예회원으로 추천되면 답례로 교향곡 하나를 협회의 도서관에 바치는 관행도 있고 해서 슈베르트는 안젤름에게 바로 교향곡 한편을 작곡해서 증정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824, 슈베르트는 교향곡 한 편을 안젤름에게 보냈는데 이상한 건 완성된 곡이 아닌 1, 2악장만을 보낸 것입니다. 슈베르트가 왜 미완성 작품을 보냈는 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릅니다. 추측으로는 슈베르트가 답례약속을 바로 지키지 않고 차일피일하자 고지식한 교장선생님이었던 슈베르트의 아버지가 슈베르트에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자주 채근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이전에 보내주었던 오페라를 연주할 기량도 안되는 그라츠시 오케스트라에게 작품을 줘봐야 어차피 연주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설도 있고, 우선 일부만 보내주고 나머지는 차차 보내줄 생각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안젤름은 작품의 일부만 받았는데도 나머지 부분을 보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 작품은 묻히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한참 후입니다. 빈의 정부 관리였던 안젤름의 동생, 요제프 휘텐브렌너가 빈 음악협회 교향악단 지휘자 요한 헤르벡에게 형 안젤름의 작품을 연주해 달라는 청탁을 하며 형에게 슈베르트의 미완성 작품이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헤르벡은 바로 안젤름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비록 슈베르트의 작품이라 해도 미완성이라는 데서 별 호기심도 없었고, 유명 작곡가도 아닌 안젤름의 작품을 연주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차일피일 핑계를 대며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5년여가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슈만이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을 빈 음악협회 서고에서 발견해 멘젤스존에게 위촉해 초연을 하는 등 슈베르트의 기악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누이의 병문안 때문에 그라츠시에 들른 헤르벡은 우연히 한 식당에서 안젤름을 만났습니다. 헤르벡은 안젤름에게 당신의 작품을 연주하고 싶다고 말하며 슬쩍 슈베르트의 작품 중 연주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함께 연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안젤름은 자신에게 슈베르트의 작품을 많다며 악보 뭉치를 꺼내 놓았는데 그 속에 미완성교향곡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작품은 슈베르트 사후 37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86512, 빈에서 초연되었는데 이상한 일은 분명 슈베르트는 2악장까지만 작곡했는데 연주회에서는 3악장까지 연주된 것입니다. 이유는 2악장까지만 있는 게 마음에 걸렸던 지휘자 헤르벡이 슈베르트의 다른 교향곡에 있는 3악장을 이 작품에 붙여서 연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주회 후 평론가들은 3악장의 비밀을 알아챘고, 1,2 악장만으로도 충분하며 슈베르트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는 호평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867년에 런던에서 영국 초연, 1868년에는 보스톤에서 미국 초연되며 연이어 호평을 받으면서 슈베르트의 대표곡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백조는 아무리 못나도 결국 백조가 되어 날아 오르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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